최근 큰맘 먹고 운동을 시작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차근차근 망가진 몸을 계속 방치했다간 정말 큰일 날 것 같아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생존을 위한 긴급 처방이랄까. 나름 거금을 들여 비싼 프로그램을 등록해버리니 귀찮고 힘들어도 돈이 아까워 꼬박꼬박 운동을 나가게 되었다. 세상 밝은 미소의 트레이너 선생님이 매번 나를 지옥의 문턱까지 보내버렸지만, 그렇게 한달여를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니 체력이 증진되는 것이 느껴졌다. 근력이 생기니 생활에도 활력이 붙고 마음의 여유도 생겨 불현듯 제대로 몸을 만들고 싶다는 새로운 욕심까지 생겨났다. 체육관 내 피트니스 대회에 나가보라는 선생님의 제안에 흥분한 나는, 사실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에밀리 블런트 같은 팔뚝이 갖고 싶었다고, <그래비티>의 샌드라 불럭 같은 허벅지와 <아토믹 블론드>의 샤를리즈 테론 같은 등 근육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고 밑도 끝도 없는 소망들을 단숨에 쏟아냈다. 그리고 스스로 놀랐다. 실은 늘씬하고 마른 몸이 아니라 탄탄하고 힘 있는 몸을 늘 바랐다는 걸 새롭게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솟구치고 있을 때 <캡틴 마블>을 보았다. 영화 내내 자신 있게 주먹을 휘두르며 싸우고 또 싸우는 여성 캐릭터를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희열이 느껴졌다. 수많은 캐럴들이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는 장면에서는 나도 극장 안의 모든 여성 관객과 같이 전율하고 울컥했다. 계속 ‘안 된다’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기어코 다시 일어서는 마음이 어떤 건지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을 통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극장을 나오면서 문득 건강하고 멋진 몸에 대한 갈망을 넘어 언제 어떻게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에 휩싸였다.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근원적 열망이 오랜만에 뜨겁게 샘솟았다.
그랬다. 항상 강해지고 싶었다. 그런데 그토록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갈망을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 지나온 어린 시절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릴레이 경주의 주자가 된 뒤 매일 방과 후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으며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그때가, 고무줄놀이 할 때 더 높이 뛰고 싶어 의자 두개에 끈을 묶고 미친 듯이 뜀박질을 연습하던 그때가, 친구 따라 재미로 등록한 태권도장에 맛 들여 온종일 어떻게 하면 뒤돌려차기를 잘할까 고민하며 연습하던 그때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놀라웠다. 그토록 강해지고 싶었던 마음을 나는 어쩌다 완전히 잊고 살아온 걸까. 나는 언제 운동장에서 밀려났고, 언제 땀 흘려 뛰는 놀이를 그만두었으며, 언제 흠씬 맞아도 흥미진진한 겨루기를 포기하게 되었나. 그렇게 뛰면 가슴이 출렁거려 민망하다고, 얼굴이 까맣게 타고 다리에 알이 배면 보기에 좋지 않다고, 겨루기 하다 잘못해 여자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내게 이야기한 사람들은 누구였나. 그들의 말을 듣고, 믿고, 그래서 뛰지 않고, 땀도 안 흘리고, 상처도 나지 않아서 나는 더 행복해졌나. 더 나답게 잘 살아가게 되었나.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오늘도 체육관에 간다.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오랜 소망을 기억하며 오늘도 열심히 운동을 하려 한다. 이런 마음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체력을 회복해야겠다. 오랜만에 가슴이 뛴다. 심장 속에 불주먹이 하나 생긴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