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와 <퍼스트 리폼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하트스톤>은 뒷날 “당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언제 알았나요?”라는 질문을 받은 성인이 떠올리게 될 어느 여름의 이야기다. 10대에 막 들어선 아이들에게 커밍아웃은 아직 지평선 너머의 문제다. 단짝 토르(발더 아이나르손)와 크리스티안(블라에 힌릭손)은 어떤 성 정체성이냐에 앞서 섹슈얼리티 자체를 처음 발견하는 시기다. 구드문드르 아르나르 구드문드손 감독은 성애의 모양새를 미처 갖추지 않은 성적인 체험을, 뺨의 솜털까지 잡아내는 촉각적 촬영으로 표현한다. 2차 성징의 도래를 앞두고 매일 변모하는 거울 속 자신에게 눈을 뗄 수 없는 토르는 장차 이성애자로 성장한다고 해도 지금은 남성의 육체에 매료돼 있다.
04/08
<어스>에 인용되는 예레미야서 11장11절은 우상을 숭배하는 예루살렘 시민들을 향한 계고다. 지하의 테더드들을 혁명으로 이끈 레드(루피타 니옹고)가 해석하는 ‘우상’은 아마 지상인들의 물질주의와 이기적 시야였을 것이다. 전형적 중산층인 애들레이드의 남편 게이브(윈스턴 듀크)가 줄곧 언급하는 관심사는 물건의 구매와 소유다. 그는 바닷가 별장이 있는 사람이면 응당 갖춰야 한다고 믿는 모터보트를 사서 길들이느라 애를 먹고, 조금 더 유복한 백인 친구 조시 가족의 고급 자동차를 시샘한다. 조시는 보트를 처음 손에 넣은 게이브에게 갖춰야 할 옵션을 나열하고 조명탄이 빠졌음을 지적한다. 게이브는 자못 애석해하지만 역설적으로 막상 도플갱어들이 습격해왔을 때 목숨을 구해주는 무기는 조시의 조명탄이 아니라 본인의 시원치 않은 보트다. 한편 레드와 동지들이 선택한 무기는 가위다. 이 중 이미지를 모티브로 삼은 영화답게 두개의 날이 교차하는 흉기다. 그러나 레드를 지도자로 밀어올린 결정적 무기는 춤이다. 1:1로 연결된 지상 본체의 흐릿한 복사물 같은 행위밖에 하지 못하던 도플갱어들은 레드의 춤 안에서 정신을 발견한다. 독창성과 주체성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레드가 메시아로서 지위를 인정받은 경위다. 그런데 영화의 설명에 따르면, 지상인과 테더드의 관계는 한 영혼을 가진 두개의 육신이다. 영혼은 다르지 않으니, 엄밀히 말하면 테더드에게 결여된 것은 영혼을 표현하고 현실로 옮기는 능력이다. 요컨대 보이지 않는 아이디어에 형상을 부여하는 예술 행위가 혁명의 씨앗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짐작건대 교육이 단절된 레드는 춤을 통해 언어 능력 및 연결된 사고 능력을 보존했고, 지하인들은 예술을 빌려 다른 세상을 비로소 꿈꾸게 된 셈이다.
레드에게 공격당한 애들레이드는 여태 이룩한 지상의 삶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동안 옷을 붉은 피로 물들여가고 영화 말미에는 그야말로 누가 레드인지 분별하기 어려워진다. 관객인 나 역시 애들레이드의 승리 앞에 안도해야 할지 좌절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어스>는 호러 장르가 기본적으로 약속하는 정화 효과를 제공하지 않는다. 결말로 달려가는 과정의 액션들로 가벼운 카타르시스를 준 다음 피날레로 그 쾌감을 일종의 실수로 만든다. 마지막에 과거를 완전히 기억해낸 애들레이드는 후회나 죄책감 대신 안도감이 서린 미소를 짓는다. 함께 웃을 수는 없지만, 태어날 때부터 가능성이 차단된 삶을 박차고 나온 소녀를 비난할 수 있을까. 인생을 통째로 도둑맞고도 굴복하지 않고 고통 속에서 자신뿐 아니라 동포의 해방을 꾀한 인물 역시 두려움보다 존경의 대상에 어울린다. 실상 레드와 애들레이드는 동일한 몰이꾼으로부터 도주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둘의 생존투쟁은 얼굴 없는 몰이꾼을 찾지 못한 채 한 사슬에 묶여 있는 상대를 향한다. 그리고 <어스>는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슬픔을 남긴다.
04/11
그는 새벽에 흐느끼며 깨어나는 자다. 퍼스트 리폼드 교회의 담당 목사 에른스트 톨러(에단 호크)는 기능하는 알코올 의존증 환자다. 즉, 술로 일을 망치는 일은 없지만 하루도 마시지 않는 날은 없다. 알코올 이외 식사에는 무심하고 전기를 쓰는 일도 거의 없고 목사관의 가구라고는 책상, 침대, 의자 하나뿐이다. 톨러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돼 있다. 군목 집안의 전통대로 명분 없는 전쟁에 참전시켰던 아들이 전사하자 톨러의 가정은 산산조각 났다. 5개월 전 진단받은 중병과 싸울 의지가 남자에겐 없다. 대신 톨러는 1년 후 파기할 일기를 쓴다. 지우고 고치고 뜯어낸 기록이 남도록 종이에 펜으로 쓴다. 톨러는 일기를 기도라고 여긴다. 목회자로서 인도하는 예배는 그를 신에게 가까이 데려다주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 “목사님은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톨러에게 필요한 것은 돌볼 사람인지도 모른다. 상담을 청해온 신도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와 마이클(필립 에팅거) 부부가 무의미 앞에 정지해 있는 그에게 출구를 준다. 죽음으로 통하는 출구일지언정 출구는 출구다. 환경운동가 마이클은 망가진 세계에 자식을 태어나게 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합리적 근거를 들어 목사에게 토로한다. 톨러는 최선을 다해 희망의 편을 들지만 “신이 세상에 이런 짓을 한 우리를 용서할까요?”라는 마이클의 반문은 그의 가슴에 박혀 뿌리를 내린다. 그날 밤 톨러는 힘겨웠던 토론을 일기에 쓴다. “밤새 천사와 씨름한 야곱이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덧붙인다. “희열을 느꼈다(exhilarating).” 마이클을 염려하는 메리는 남편과 신념은 공유하되 절망은 나누지 않는다. 톨러는 메리를 돕고 부재하는 남편을 대신하면서 심플한 행복과 신의 존재를 느낀다. “신의 축복이다(It’s god-given).” 마이클이 자살한 다음 톨러는 유품을 취한다. 미수에 그친 자살테러용 폭탄조끼와 환경 파괴 실태와 지구를 오염시키는 기업에 관한 자료다. 물건과 더불어, 목사는 내면의 진공에 죽은 활동가의 고통과 사명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지옥에서 마이클의 지옥으로 옮겨간다.
평론가로 출발한 폴 슈레이더는 1972년 <영화의 초월적 스타일: 오즈, 브레송, 드레이어>라는 비평서에서 제목에 언급된 감독들이, 심리적 인과로 전개되는 일반 영화들의 카메라워크, 편집, 외부적 음악, 액션을 구사하지 않음으로써 성취한 영화적 초월을 논했다. 반면 각본가 및 감독으로서 슈레이더는, 스스로 무엇을 구하는지 정확히 모르며 폭력과 섹스로 어지러운 낮은 땅을 헤매는 남성 단독자 이야기에 매달렸다. <택시 드라이버>(1976), <성난 황소>(1980), <아메리칸 지골로>(1980), <모스키토 코스트>(1986), <어플릭션>(1997), 그리고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도 예외는 아니다. 신과 구원을 직접 말하는 영화는 본인의 달란트 밖이라고 간주했던 슈레이더는 일흔을 앞두고 동시대 초월적 영화를 만드는 <이다>(2014)의 파벨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을 만난 것을 계기로 <퍼스트 리폼드>에 착수했다. 그러면서도 감히 맨 앞줄에 설 수는 없다는 듯 로베르 브레송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1951), 잉마르 베리만의 <겨울 빛>(1963)에서 서사를 가져오고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오데트>(1955)에서 결말의 기적을 빌려왔다. 카메라는 손에 꼽히는 예외를 제외하면 움직이지 않고 프레임을 드나드는 인물을 좇지 않는다. “필요 없는 숏은 찍지 않는다. 찍으면 반드시 쓰게 된다.” 폴 슈레이더가 밝힌 원칙이다. 외부적 음악도 초반 1시간에는 없다. 모든 스타일적 요소들은 톨러가 결단을 내리고 격앙되면서 함께 고양된다. 주제와 형식, 인물의 삼위일체를 꾀한 셈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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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블
<스탈린이 죽었다!>는 특정 인물을 따라가지 않지만, 인물이 전부인 영화다. 아르만도 이아누치 감독은 1953년 스탈린의 갑작스런 죽음 직후 며칠 동안 ‘집권하거나 죽거나’를 모토로 소련 국무위원들이 벌이는 복마전을 재연한다. 요는 배치와 진법이다. 이아누치는 비밀경찰 총수 베리아와 흐루시초프 역에 사이몬 러셀 빌과 스티브 부세미를 캐스팅해 양축을 세우고, 둘 사이에서 원칙만 복창하는 약골 말렌코프(제프리 탬보), 스탈린의 부재에 적응 못하는 순응자 몰로토프(마이클 팔린), 교착된 상황을 일격에 뚫는 주코프 장군(제이슨 아이작스)을 배치했다. TV에서 연극까지 다양한 활동 배경을 가진 이 배우들은 각기 다른 영어 악센트를 구사하며, 코미디이자 스릴러이자 사실에 기초한 정치 드라마인 작품의 복합적 성격을 채워나간다. <스탈린이 죽었다!>의 베스트 장면 다수는, 이 인물들이 한 프레임 안에 집결할 때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