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러브리스>에서 카메라는 왜 아이를 놓쳐버렸나
2019-05-08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실종 수색 전단의 존재론

안드레이 즈뱌긴체프 감독은 늘 건조한 풍광을 보여주는 숏으로 영화의 문을 연다. <리턴>(2003)의 동요하는 바다의 겉과 속, <리바이어던>(2014)의 파도 치는 해변은 단지 거대한 풍광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영화 속 사건과 관련된 결정적인 장소다. <리턴>의 바다는 추락사한 아버지의 주검이 침잠하던 곳이며, <리바이어던>의 바다는 어머니 릴랴가 몸을 던진 곳이다. <러브리스>(2017)의 오프닝은 눈 덮인 겨울 숲을 보여주는 몇개의 숏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 장소가 전작처럼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결정적인 장소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종된 알로샤(마트베이 노비코프)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비밀스러운 장소라는 점에서 숲은 중요하다.

알로샤의 하교 시간에 맞춰 카메라는 마중 나온 것처럼 교문 밖에서 그를 기다린다. 알로샤가 유일한 친구와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오프닝에서 등장했던 숲이 자리한다. 알로샤는 흙 속에 묻혀 반쯤 드러난 낡은 끈을 리듬체조하듯 몇번 휘휘 돌린 뒤 높다란 나뭇가지 위로 던져 올린다. 소년의 이러한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기에 관객이 가진 정보는 너무 적다. 그러나 알로샤를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장면이기에 외면할 수 없다. 이 장면을 어떤 상징으로 읽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 장면은 오히려 의미화되지 않았기에 의미가 있다. 어쩌면 길가에 떨어진 무언가를 발견한 뒤 가지고 놀다가 버려두는 지극히 아이다운 행동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숲과 카메라는 소년의 행위를 비밀스럽게 숨겨둔다. 관객은 카메라의 중재하에 인물로부터 의미를 알 수 없는 어떤 신호를 받은 셈이다.

귀가 후 알로샤는 여전히 밖의 세상에 정신이 팔려 있다. 창가에 놓인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창문에 시선을 고정한 알로샤의 모습에서 주목할 것은 그가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그가 풍경과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소년의 시점숏으로 창밖을 비추던 카메라가 물방울 맺힌 창으로 초점 이동하는 장면은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주려 한 것이 창문일 수도 있음을 짐작게 한다. 즈뱌긴체프 영화에서 창문은 소통 불능을 보여주는 효과적인 장치로 쓰여왔다. <리바이어던>에서 창문은 공권력에 항의하는 콜랴(알렉세이 세레브리아코프)와 드미트리(블라디미르 브도비첸코프)의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도록 막는 것으로 기능했다. 카메라는 구획된 경계 안에서 밖에 있는 인물들을 찍으며, 이들의 목소리가 안에서는 어떻게 들리는지 보여줬다. <러브리스>에서 차단된 창문은 여기저기에 산포한 개인들의 창으로 드러난다. 알로샤의 실종 당일 제냐(마리아나 스피바크)와 연인 안톤(안드리스 카이스)의 드라이브 장면에서 이들과 동석했던 카메라는 어느 순간 외부로 이동해 이들의 대화를 소거한다. 부부가 된 제냐와 안톤의 일상을 보여주는 유일한 장면에서 함께 있던 두 사람은 테라스 창으로 분리된다. 창문은 이제 공권력에 맞선 개인의 불능을 보여주는 것에서, 가족 공동체 내부에서 작동하는 소통 불능을 표시한다.

투명한 창문 옆에는 컴퓨터 ‘윈도’라는 다른 창문이 있다. <리바이어던>에서 경찰공무원은 거대한 창문 뒤 항의하는 시민 대신, 작은 컴퓨터 화면 속 카드게임에 열중했었다. 보리스(알렉세이 로진)의 회사 사무실에서는 컴퓨터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긴 행렬을 볼 수 있다. 동료들은 서로의 가족을 모르기 때문에 누군가 이혼 후 가짜 가족을 사내모임에 데려온다고 해도 알아차릴 수 없다. 또 다른 창은 각자가 손에 쥔 스마트폰이다. 제냐는 영화에서 휴대폰을 놓지 않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스마트폰의 여러 기능 중 강조되는 건 사진과 관련된 용도다. 제냐는 미용실에서, 보리스의 연인인 마샤(마리나 바실레바)는 아기용품을 구경하던 중 엄마와 셀카를 찍는다. 제냐와 안톤이 식사하던 레스토랑 한쪽에서는 ‘사랑과 셀카를 위해’라는 구호 아래 셀카를 찍는 어떤 무리를 보여준다. 스마트폰의 자족적 성격이 유난히 강조되는 가운데, 실종된 알로샤를 찾는 데 있어 스마트폰은 이상할 만큼 언급되거나 쓰이지 않는다. 제냐의 휴대폰 속 가족사진에서 확대한 알로샤의 얼굴이 실종 전단 사진으로 쓰인 것만이 실종과 관련된 유일한 휴대폰의 쓰임이다. 알로샤의 수색 작업은 철저히 아날로그적이다.

이제 이 글을 쓴 목적이기도 한, 영화라는 카메라를 생각할 차례다. 영화 속에 재현된 창문들과 창문의 비유로서의 카메라가 폐쇄적이라면, <러브리스>가 영화와 카메라라는 창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비전은 어떠한가. 우리는 카메라 속 세계와 진실로 소통하는가. 영화를 보면서 든 결정적인 의문은 알로샤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태도였다. 카메라는 알로샤의 비밀을 우리에게 낱낱이 보여준다. 이혼을 앞둔 제냐와 보리스가 알로샤의 책임 문제로 서로를 힐난할 때, 욕실 문 뒤에서 숨죽이며 서럽게 울던 알로샤의 얼굴을 카메라는 기어이 대면한다. 알로샤가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면서 잠들 때도 카메라는 그곳에 있었다. 다음날 아침 강압적인 제냐에 맞서 조용히 먹기를 거부하던 알로샤가 미처 감추지 못한 눈물방울을 관객은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관객으로 하여금 알로샤의 부모가 볼 수 없던 것을 보게 만들었던 카메라는, 왜 등교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선 알로샤를 기꺼이 놓쳐버리고는 찾지 않는가. 알로샤의 마지막 행적이 찍힌 CCTV 역시 그가 집을 나서는 장면만 보여줄 뿐이다. 이는 누군가의 죽음을 미스터리로 남겨놓지 않았던 감독의 전작과 비교해도 예외적인 선택이다.

알로샤를 떠나보낸 카메라의 선택을 무책임한 것이라 힐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처음에는 이를 냉정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이 필요했던 이유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영화는 부재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는 누군가를 보여주는 대신, 그 부재가 어떤 식으로 사그라지는지를 바깥의 시선으로 끝까지 목도한다. 부재의 시간은 부모가 수색구조단체와 함께 숲과 폐건물, 병원을 옮겨 다니며 알로샤를 찾는 장면으로 채워진다. 이를 통해 알로샤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도처에 존재하게 된다. 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건물 외벽에 붙은 실종 전단을 보여주는 일련의 장면들이다. 누군가는 전단이 행인들로부터 소외당하는 현상에 주목하지만, 나는 알로샤의 전단만이 부적처럼 남아 장소를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 벽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외면받는 비장소이기도 하다.

<리바이어던>에서 콜랴는 저항하다가 밀려났지만, <러브리스>에서 제냐와 보리스에게 집은 팔아 없애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알로샤는 다르다. 집이 팔리는 순간,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알로샤의 존재 역시 위태로워진다. 알로샤가 집을 보러온 이들을 적대시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알로샤가 실종된 뒤, 그의 집과 방은 몇년간 보존된다. 알로샤의 방이 뜯겨나간 뒤에도, 알로샤의 실종 전단이 붙은 건물 외벽은 아직 남아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다시 처음의 숲으로 돌아간다. 알로샤가 던져 올린 끈은 아직 거기 있다. 아마도 실종 전단이 붙은 벽이 사라진 뒤에도 끈은 남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러브리스>가 보여준 세계 속에서 숲은 물질적인 것이 남아 저항하는 최후의 장소다. 알로샤의 부재는 실종 전단만큼이나 얇아진 우리의 저항과 내몰림을 은유하며, 이를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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