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얀 드봉 / 출연 키아누 리브스, 샌드라 불럭 / 제작연도 1994년
1994년,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마치고 친구들과 학교 근처 영화관에 가서 <스피드>를 보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나는 영화에 완전히 압도됐다. 고등학생의 시험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주는,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만드는 영화였다. 테러범(데니스 호퍼)은 출근길 버스에 폭탄을 설치하고, LA경찰인 잭(키아누 리브스)에게 3가지 조건을 내건다. 속도가 50마일 이하로 내려가면 폭탄이 터지며, 승객 중 누구도 내려서는 안 되며, 3시간 내에 370만달러를 입금하라는 것이다. 테러범이 내건 조건과 출근길 시민들을 볼모로 한 협박은 나에게 리얼하게 느껴졌고, ‘저런 아슬아슬한 상황을 잭이 어떻게 해결해나갈까’ 하는 생각에 같이 고민하며 영화에 몰입했다. 더구나 버스기사가 총에 맞자 승객이었던 애니(샌드라 불럭)가 버스를 운전하게 되면서 잭 혼자 영웅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잭과 애니 그리고 버스 승객이 함께 이 고난을 해결해나간다는 점이 나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특히 애니 캐릭터가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지만 솔직하고, 귀여우며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이어서 더 좋았다. 긴박한 상황 설정과 촬영감독 출신인 얀 드봉의 탄탄한 연출력, 새로운 두 청춘 스타의 탄생 등은 나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영화를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나는 순진하게도 이렇게 재밌는 영화를 만들면 그 과정도 신나고 재밌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내가 알고 있는 영화 관련 직업은 감독과 배우밖에 몰랐기에 배우는 아닌 것 같아 감독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2019년 현재, 나는 감독은 아니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은 프로듀서라고 생각했고, 제작부 막내부터 시작해 프로듀서를 거쳐 아토ATO를 공동 설립하며 제작자가 되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25년 만에 다시 <스피드>를 보았다. 영화 초반 잭이 임무 수행 도중 동료에게 “내가 왜 이 직업을 선택했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이 질문은 테러범 역시 잭과 같은 경찰이라는 단서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질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나, 영화인이 된 나는 잭의 질문을 들으며 ‘<스피드>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 영화인이 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정반대 지점에 있는 영화를 만들고 있네…. 인생은 참 알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 테러범 또한 경찰이었지만, 테러범이 된 것이다. 테러범이 던진 조건은 나의 인생에도 던져져 있다. 신인 제작자, 더구나 독립·예술영화 제작자, 기획비의 부족, 이전과 다른 영화계의 근로환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드> 같은 영화는 물론 다양한 이야기와 장르의 영화를 만들고 싶은 꿈. 어느덧 40대에 접어들면서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과연 나는 아토ATO 멤버(김순모, 이진희, 제정주)와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나갈 것인가? 나조차 내 앞날이 어떻게 전개되어갈지 흥미진진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잭처럼 같이 고민할 사람들이 내 옆에 있다는 것이다.
● 김지혜 영화제작자. 영화사 아토ATO 공동대표이사. <용순>(2016), <우리집>(개봉예정)을 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