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시즌 피날레
2019-05-15
글 : 김혜리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스 스티븐스>

<미스 스티븐스>는 교사의 이야기다. 사별의 회한에서 벗어나지 못한 레이첼 스티븐스(릴리 레이브)는 스트레스를 감추는 데에 능하다. 학생들의 사적인 질문을 침착히 걷어내고 좋은 교사의 본분을 다하려고 한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갇혀 있어.” 영어수업 중 레이첼이 던진 한마디가 본인의 이야기임을 눈치채는 학생은 거의 없다. 어느 날 예술적 재능이 풍부한 한 소년(티모시 샬라메)이 그의 슬픔을 알아보고 다가오자 레이첼은 이 갑작스런 친밀함을 교사로서 현명하게 관리하고자 최선을 다한다. 줄리아 하트 감독은 엄살 부리기 싫어하는 주인공의 성격을 존중하듯, 프레임의 구도와 조명을 통해 간접적 방식으로 레이첼의 심리적 고립을 표현한다.

04/23

<어벤져스: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의 언론 배급 시사에 앞서,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관계자가 무대에 올랐다. “오늘 예고편은 <토이 스토리4> <라이온 킹> <알라딘>이 준비돼 있습니다.” 기내식 메뉴를 안내하는 승무원의 말투랑 비슷했다. 비행기의 목적지는 1990년대인가 보다. <정글북>의 존 파브로 감독이 연출한 <라이온 킹> 예고편은, 기억에 생생한 1994년작 애니메이션의 시그니처 숏을 고스란히 재연하고 있었다. 갓 태어난 심바를 들어올리는 제사장 원숭이, 비탈을 뒤덮은 들소떼, 보름달 앞을 가로지르는 심바와 하이에나 친구들의 실루엣까지.이토록 똑같은 영화가 왜 한편 더 필요하단 말인가 반문하는 나와, 삼촌 스카 역의 성우가 제레미 아이언스가 아니라는 사실에 철렁하는 교조적인 내가 갈등하는 사이, 실사판 <알라딘>의 트레일러가 시작됐다. 발리우드 뮤지컬풍인 애니메이션의 대표적 노래와 대사가, 푸르게 피부를 칠한 윌 스미스의 지니는 조금 힘들어 보였다. 실사판으로 리메이크를 꼭 해야 한다면, 디즈니 작품 라이브러리 중에서도 초현실적 만화체 판타지인 <알라딘>보다 사실주의적 톤의 원작이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04/24

<엔드게임>은 예측 가능해 보였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이하 <인피니티 워>)가 뿌린 씨를 되도록 화려하게 거둬들이는, 실질적인 <인피니티 워2>가 될 거라고 예상했다. 타노스의 종말 스냅에서 살아남은 어벤져스들이 어떻게든 타노스를 무찌르고 스톤들을 손에 넣어 스러진 생명들을 되살려내겠지. 엄밀히 말해 이 추측이 틀린 건 아니지만, 우리가 쉽게 예측한 역습은 영화 시작 20분경에 끝나버린다. 네뷸라(카렌 길런)의 인도로 타노스의 거처를 찾아낸 어벤져스들은 적을 쓰러뜨리고 인피니티 건틀렛을 차지하지만 스톤들은 목적을 완수하고 파괴된 다음이다. 관객은 망연자실해진다. 자,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인피니티 워>가 슈퍼히어로 절반의 소멸이라는 전례 없이 비극적 사태로 끝났음에도 관객의 마음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블랙팬서2>와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제작이 예고된 상태에서, 와칸다 영웅들과 피터 파커(톰 홀랜드)를 정색하고 애도하긴 어려웠다. 평범한 학생이 되기로 결심한 소년이 다음 영화에서는 어벤져스에 합류하고, 슈트 없는 아이언맨이 되겠다던 영웅은 더 많은 슈트와 함께 돌아왔다. 죽음을 포함한 어떤 상실과 은퇴 선언도 네일아트 정도의 지속력 밖에 없다는 사실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를 비롯한 코믹스 원작 영화들의 커다란 결함으로 지적돼왔다. <로건>은 이 안전망을 찢어버림으로써 새로운 경지에 이른 슈퍼히어로영화가 됐다. 어떤 행위도 진정한 의미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지 않을 때 관객은 감정을 투사하기를 멈춘다. 허망한 복수가 페이드아웃되고 ‘5년 후’라는 글씨가 화면에 뜨는 순간은 마블 영화를 통틀어 가장 크게 놀랍다. 그리고 이후 <엔드게임>은 <인피니티 워>의 스토리를 이어받되 21편의 영화로 엮어온 MCU ‘시즌1’ 전체의 피날레라는 정체성에 집중한다.

5년은 히어로들이 패배의 결과를 짊어지고 체념과 싸운 시간이다. 양자영역에서 탈출한 앤트맨 스콧 랭(폴 러드)은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무수한 추모비를 맞닥뜨리고,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는 타고난 리더답게 집단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의 대화 치료 모임을 주도하고 있다. 조스 웨든 감독의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이후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거의 배제됐던 민간인들이 다시 시야에 들어온다(심지어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최대 격전은 인적 없는 공항에서 벌어졌다). 좌절에 대처하는 방식은 히어로들의 캐릭터를 재확인시킨다. 페퍼(기네스 팰트로)와 결혼한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딸 모건을 키우며 평온하게 산다. 그는 다행히 덜 잃었고 그것을 지키고 싶어 한다. “물이 맑아져 허드슨강에 고래가 보인다”고 인구 감소의 순기능을 언급하는 캡틴 아메리카는 긍정성의 화신답다. 브루스 배너(마크 러팔로)는 연구에 매진해 평생 다퉈온 헐크와 과학적 화해를 달성했다. 블랙 위도우 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요한슨)는 각지에 흩어진 어벤져스들을 총괄하며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다. 가족과 고향, 자존감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토르(크리스 헴스워스)는 아노미 상태와 술독에 빠져버렸다. 왕자이며 반신(半神)이라는 절대적 정체성이 흔들리자 뒤늦은 사춘기가 찾아온 형국이다. 앤트맨의 양자 영역 체험을 힌트로, 어벤져스는 과거의 여러 지점에서 여섯개의 스톤을 가져오는 시간 여행(time heist) 계획에 착수한다. 플롯을 불필요하게 만들어버릴 막강한 능력의 캡틴 마블(브리 라슨)은 스케줄이 겹쳐서 지구 문제에 전념할 수 없는 처지로 설명됐다.

관객만큼 마블 히어로 영화를 정주행하지 않은 히어로들이 둘러앉아 인피니티 스톤에 관한 각자의 정보를 취합하는 장면은, <엔드게임>을 준비하는 마블의 작가회의를 엿보는 듯하다. 네조로 나뉜 어벤져스들은 2012년의 뉴욕, 2013년의 아스가르드, 2014년의 모라그 그리고 보르미르로 날아가는데, 이 여정은 21편 영화에서 맥거핀 구실을 한 인피니티 스톤이 맥거핀 이상임을 확인시키는 절차이자, 각 히어로들의 사적인 회한을 치유하는 기회다. 액션이 최소화된 영화의 초반 한 시간과 사랑하는 이와의 재회 신들은, 최상급 배우들을 무더기로 캐스팅해놓고 재능을 적극 활용하지 않은 MCU 영화에서 모처럼 연기를 음미하는 시간이다. 한편 히어로들이 전작들 속으로 들어가 돌아다니는 구성은 말 그대로 자의식의 끝장이기도 하다. 촬영 시점은 확인할 수 없지만 제작비 걱정 없는 부잣집의 진면목도 보여준다(다시 소환된 로버트 레드퍼드는 심지어 은퇴작이 바뀐 셈이다). 요컨대 캐릭터와 장기 지속 서사를 한번에 갈무리하는 <엔드게임>의 성공적 본론은, 그동안 21편의 영화가 한치 빈틈 없이 연결돼 있는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엔드게임>은 유니버스를 시작한 장본인 토니 스타크로 끝난다. 온전한 피날레답게 생략된 쿠키 대신 최초의 아이언맨 슈트를 만드는 토니의 망치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진다. 히어로의 무력을 갖추고 “나는 아이언맨이다!”라고 호기롭게 세상에 외쳤던 오만한 남자는, “나는 아이언맨이다”라는 소명을 인정하는 고백으로 여정을 마친다.

단순히 말하자면 마블 스튜디오는 11년간 극장에서 TV시리즈를 만들어 온 셈이다. TV드라마는 단선적으로 연쇄되지만 스핀오프를 사방으로 연결하는 코믹스식 구성을 택한 점이 최초였다. <엔드게임>은 시즌 피날레로서 더 바랄 나위 없는 영화지만, 자립한 텍스트는 아니다. 오스카 작품상 후보 지명까지 받은 <블랙팬서>는 마블 유니버스에서 다른 작품과 얽힌 정도가 낮은 솔로 무비였다. 역시 막대한 시각효과를 동원한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 오스카를 휩쓸었으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어진 3부작의 최종편이었다. 오스카를 위시한 각종 영화상과 평론은 새로운 이 현상에 어떻게 대응할까? 넷플릭스 영화가 시네마인가를 둘러싼 갑론을박과 더불어 주시할 수밖에 없다.

<에이프릴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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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미셸 프랑코 감독- 전작으로 <크로닉>(2015), <애프터 루시아>(2012)가 있다- 의 영화를 보다가 혹시나 어떤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지면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만다. 프랑코의 인물들은 둘 이상의 가능성 앞에서 언제나 나쁜 선택을 한다. <에이프릴의 딸>의 에이프릴(에마 수아레스)은 마치 야생동물처럼, 성장한 자식을 생존 경쟁의 동등한 상대로 보는 희귀한 엄마다. 뜻하지 않게 임신한 10대 딸 발레리아(아나 발레리아 베세릴)를 찾아온 에이프릴이 수유하는 딸의 머리칼을 다정히 잡아줄 때만 해도 우리는 아낌없이 베푸는 엄마를 보지만, 에이프릴의 마음속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새 인생의 계획이 싹트고 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발레리아가 왜 임신을 엄마에게 알리길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에이프릴은 수아레스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줄리에타>(2016)에서 연기한, 끈기 있게 사랑하는 여성과 정반대의 인물이다. 그는 놀러온 사람처럼 영화 속에 들어왔다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동호회원처럼 나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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