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기록된 사실, 역사가 된 이유
2019-05-22
글 : 이용철 (영화평론가)
나아가기 위해 돌아가야 한다, 어디로

*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은 문득, 시작한다. 바튼(제레미 레너)의 가족이 전원의 집 주변에서 한가한 오후를 보낸다. 잠시 후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 장면의 정체는 뭔가. 이어 크레딧이 나오고 현재로 돌아오는데 전편의 엔딩에서 대충 몇주가 지난 시점이다. 그렇다면 첫 장면은 불과 몇주 전의 것이다. 관객으로 치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이하 <인피니티 워>)를 본 게 꼭 1년 전이니 당시의 장면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첫 장면은 플래시백인가? 정확히 말하면 ‘아니다’. 바튼은 <인피티니 워>에 나오지 않았다. 즉, <엔드게임>의 첫 장면은 ‘새로운 장면’이다. 굳이 표현하면 ‘과거의 미래형’인 셈이다. 헛소리처럼 들리겠으나, 어쨌든 영화예술에서만 가능한, 우리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기술이다. <엔드게임>은 영화만의 또 다른 능력으로, 살아남은 어벤져스를 먼 행성으로 데려간다. 거기서 그들은 타노스(조시 브롤린)와 재회하고, 토르(크리스 헴스워스)가 타노스의 목을 벤다. 관객으로선 난감하다. <엔드게임>의 상영시간이 3시간이라는 걸 알고 입장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전편의 복수를 목격한 것이다. 이제 어벤져스는 무엇을 할까. <엔드게임>은 다시 영화적 마법을 발휘해 5년 뒤로 훌쩍 이동한다. 영화를 믿는다면 덩달아 이동에 동참해야 한다. 세상은 여전히 우울하다. 악당은 죽었고, 바튼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마약업자, 갱단을 제거하는 중이다. <엔드게임>의 오프닝 크레딧은 스티브 윈우드가 부르는 <Dear Mr. Fantasy>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 그는 “이 우울함에서 벗어나도록 음악을 연주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음악은 행복은커녕 눈물을 불러일으킨다’. <엔드게임>의 초반부가 초래하는 정서와 똑같다. 판타지씨의 음악이 실패하듯, 판타지 영화의 주인공들이 온갖 것을 해보지만 불행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엔드게임>이 할리우드영화에 던지는 첫 번째 코멘트는 그러하다. 현실에 복수를 가하는 액션극이 1980년대에 정점을 찍은 뒤 수십년 동안 반복해서 쏟아져나왔다. 미국은 매번 그들이 ‘악’이라 규정한 적과 싸우느라 허우적댔고, 할리우드의 액션극은 상존하는 악의 뒤를 밟는 짓 이상을 하지 못했다. 초반부에서 실패의 시간을 연출한 <엔드게임>은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재출발한다.

상처를 치유하려고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로저스(크리스 에반스)는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같은 말을 나타샤(스칼렛 요한슨)에게도 했다가 한소리 듣는다. 답을 모르는 채 치유받아야 할 자에게 나아가라고 군소리하는 것은 공허하다. 로저스가 간과한 것은 그를 비롯해 주변의 모든 이들이 과거를 직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SF영화에서 시간을 되돌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벤져스의 능력 정도라면 시간 이동쯤은 쉽게 가능할 것 같다. 여기서 <엔드게임>은 할리우드영화에 두 번째 코멘트를 던진다. 시간 이동에 관한 대화에서 그들은 그러한 주제를 다뤘던 수많은 할리우드영화를 불러낸다. <미래의 추적자> <사랑의 은하수> <터미네이터> <스타트렉4> <엑설런트 어드벤처> <사선을 넘어> <타임캅> <핫 텁 타임머신> 등 아무 죄 없는 영화들이 불려나오고, 사랑스러운 <백 투 더 퓨처>라고 해서 면죄부를 부여받지는 못한다(그런데 <다이하드>는 왜 말한 걸까). 우습게도 그들은 할리우드영화와 무관한 현실의 인물인 것처럼 리스트를 객관화한다. 리스트의 영화가 틀렸다, 혹은 그들은 시간 여행을 하지 않겠다, 가 아니라 다르게 가겠다는 것, 그게 <엔드게임>의 뜻이다. 단순히 다른 시간으로 왕복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도다. <엔드게임>은 놀랍게도 자기의 본질을 선배 SF영화가 아니라 영웅의 원형인 ‘서부극’에서 찾는다.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 할리우드는 ‘서부극’을 통해 미국의 역사를 전파했다. 현대인에게 19세기 말의 미국을 물어보면 대답은 어김없이 서부극의 한 장면으로 돌아올 것이다. 지금 서부극을 안 본다 해도 상관없다. 이미 서부극 속 ‘공동체의 이상향’이 미국의 역사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존 포드의 자기반영적 서부영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의 엔딩에 흘러나오는 대사– “전설이 사실이 될 때는 전설을 기록한다”– 는 선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기록된 것은 실제로 밸런스를 쏘아죽인 자가 아니라, 그를 죽였다고 알려져 영웅이 된 이다. 할리우드 장르를 이끌었던 수백 서부극에서 허구가 사실을 구축(驅逐)하고 전설이 역사로 새겨지는 과정을 포드는 그렇게 간파했다. <엔드게임>은 그런 역사 수업을 시도한다.

시간을 오가는 테스트를 몇 차례 거친 후, 어벤져스는 6개의 스톤을 구하기 위해 3개의 팀을 짜 과거로 이동한다. ‘2012년의 뉴욕, 2013년의 아스가르드, 2014년의 모라그와 보르미르.’ 그러나 뉴욕에서 문제가 일어나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은 1970년의 뉴저지로 한번 더 이동을 감행한다. 이동한 과거의 장면은 얼핏 앞서 나온 영화의 클립처럼 보인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이 아닌 것이, 어벤져스가 ‘과거라는 미래’로 되돌아가 어떤 행동을 추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플래시백도 아니다. 어벤져스가 회상하자고 불러낸 장면들이 아닌 까닭이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가 플래시백으로 진실을 드러낸 것과 달리 <엔드게임>에서 플래시백이나 클립처럼 보이는 장면들은 실제 벌어진 일과, 그 시간과 공간으로의 재방문처럼 꾸며져 있다. 재방문이기에 벌어지는 일은 매한가지인데, 그들은 목적을 위해 몇 가지 액션을 취할 따름이다. 대체 역사로서의 미국 현대사를 도모했던 <포레스트 검프>와도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이다. 정교한 시간과 공간의 구성– 상상하고 기억하고 촉각으로 경험한 듯한 것들을 모두 동원해 <엔드게임>은 실제의 시공간을 창조하고 기정사실화(旣定事實化)한다. 잊힌 사실보다 기억된 허구가 더 강력하다. 흥미로운 것은 찾아가는 과거의 맨 앞이 베트남전이 한창인 1970년이라는 점이다. 1970년부터 어벤져스의 현재인 2023년 사이는 공교롭게도 미국이 대륙 바깥의 전쟁에 개입해 실패의 연속을 맛보았던 시기다(마지막으로 등장한 스탠 리가 “사랑하라!”고 말한 것을 그들은 듣지 않았다). <엔드게임>은 더 앞의 과거로 이동해야만 한다. 2차대전 이전의 미국인에게 이상의 공간이 서부라면, 2차대전 이후의 미국인에게 이상향은 2차대전의 승리를 이끈 후의 아름다운 시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타노스의 대군과 어벤져스의 연합군이 벌이는 마지막 대전투가 2차대전의 모양새를 띤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타노스 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극중 ‘자기라는 존재의 필연’을 3번 역설하는 타노스는 ‘역사 발전의 필연’을 부르짖으며 인종 말살극을 벌였던 히틀러와 겹쳐 읽힌다. <엔드게임>에서 캡틴 아메리카가 이끄는 선의 연합이 마침내 이기는 게 필연이었음이 밝혀진다. 그렇게 해서 신화와 전설로 내려오던 이야기들이 <엔드게임>에 이르러 기록된 사실, 즉 역사가 된다. <엔드게임>은 앞서 나온 21편의 시리즈와 비교해 가장 완벽한 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기록된 역사라는 점에서 그 가치는 비교를 불허한다. 과거로 시작한 <엔드게임>은 또 하나의 ‘미래로서의 과거’로 끝을 맺는다. 매번 과거의 어느 때임을 일러주던 영화는 이제 그 시간과 공간을 말해주지 않는다. 돌아온 캡틴 아메리카가 회고하는 시간과 공간이 2차대전 직후의 미국일 것임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는 재즈가 흘러나오는 낭만스러운 시간으로 돌아가 못다 이룬 약속을 실현한다. 미국이 진정 영웅다웠던 시간, <엔드게임>은 그 시간에서 끝난다. 영화는 흘러가는 매 순간을 과거로 인식하면서 동시에 과거로 돌아가는 게 가능한 유일한 예술이다. 과거로 돌아가는 순간, 현실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된다. <엔드게임>은 정의로운 승리의 역사가 절박한 나라, 미국의 꿈을 영화가 할 수 있는 진심을 다해 전달한다. 이건 21권의 서브 텍스트를 지닌 하나의 역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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