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김군> 강상우 감독, 신연경 PD, 고유희 PD - 5·18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던지는 질문
2019-05-23
글 : 이화정
사진 : 오계옥
고유희 PD, 강상우 감독, 신연경 PD(왼쪽부터).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록한, 당시 사진 속의 한 남자. 보수논객이자 군사평론가 지만원은 건장한 체격, 매서운 눈매의 그를 북한특수군 ‘제1광수’로 지목하고, “광주 시위는 북한군 600명이 내려와 저지른 폭동이다. 따라서 민주화 시위도 없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보수진영에 의해 광주민주화운동의 북한개입설이라는 왜곡된 역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그때, 제1광수의 존재에 대한 증언이 등장한다. 당시 만삭의 몸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게 나눠주었던 여성, 주옥씨가 ‘제1광수’가 자신이 알고 있는 시민군 ‘김군’임을 밝히고 나선 것이다. 다큐멘터리 <김군>은 그 한장의 사진이 던져준 호기심에서 출발해, 어딘가 있을 ‘김군’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다.

사라진 김군의 행방을 찾는 영화적 서스펜스로 출발해 무수한 ‘김군들’이었을 당시 시민군의 응어리진 내면을 만나기까지 다큐멘터리 <김군>은 밀도 높은 서사로 대중의 긴장과 감정을 이끌어내도록 영리하게 조율된 프로젝트다. 영화를 연출한 강상우 감독과 신연경, 고유희 PD 모두 광주 당시를 경험하지 않은 1980년대 이후 세대라는 점은 이들이 ‘다시 쓰는’ 광주의 서사를 더 흥미롭게 하는 요소다. 소재가 주는 무게에서 벗어나 <김군>이 전개한 형식적인 차별점과 새로운 시선이 환기하는 바를 그들과의 대담으로 풀어본다.

-한명의 감독과 두명의 PD가 함께한 현장이었다. 함께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강상우_ 혼자서는 시작도 완성도 엄두를 못 내는 일이었다. 두 PD님 모두 연출 작업을 병행하는 분들이기도 해서 영화의 구성과 편집을 함께 고민했다. 처음엔 광주 이야기를 담는 데 5·18과 관련 없는 작업, 현재 광주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다. 광주와 5·18은 항상 같이 매칭되어 있다. 광주가 지금 가진 소비도시로서, 발전지향적인 도시로서의 부분을 탐색하다보면 새로운 시각으로 5·18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관심사를 안고 시작했다. 거기 초점을 두고 2014년경 신연경 PD와 작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광주 사람들을 만나다가, 영화 속 김군의 사진을 처음 우리에게 알려준 주옥 선생님과 만나게 됐다. 보수논객 지만원씨가 광주민주화운동의 사진 속 한 인물이 평양의 사진 속 인물과 동일인이다, 사진 속 인물이 80년 광주에 온 북한특수군 ‘제1광수’라고 지칭했다. 그 남자가 바로 주옥 선생님이 광주 전시장 속 사진에서 알아본 ‘김군’이었다. 우리 영화의 시작이었다.

=신연경_ 다른 영화 때문에 서울에 있었는데 감독님과 안지환 조연출이 광주에서 전화를 했다. 사진 이야기를 그때 처음 들었는데 전율이 오더라. 이건 영화를 만들라고 하늘이 던져준 거다 싶었다. 5·18과 관련 없는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우연히 연결지점을 포착하게 된 것이다. 5·18이 가지고 있는 무거운, 민주화의 서사가 이미 있고, 그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우리가 가진 정보만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루는 건 전혀 생각지 못할 일이었는데, 이렇게 구체적인 정황이 있다면 우리도 5·18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 민주화에 대한 거대 담론에 기대서 가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호기심이 생기는 일에서 출발한다면 가능하겠다, 그럼 이걸 영화로 만들어보자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생긴 거다.

=고유희_ 그 당시 광주에서 공연예술계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일을 접고 좋아하는 영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서울로 왔을 때였다. 그때 감독님과 신 PD가 사진 한장을 보여주면서 이 사진을 단서로 광주 관련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데 어떠냐고 하더라. 보는 순간 그 인물에 매료됐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연경_ 그렇게 ‘김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작품을 발전시켜보자는 데 모두의 의견을 모았다. 감독님이 제안한 건, ‘5·18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들이 모여서 팀 작업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작품에 착수하면 감독, 스탭으로 역할 구분이 있었던 것과 달리 이번엔 영화하는 또래들이 모여 협업하는 프로젝트로 다가오더라. 그렇게 고유희 PD까지 모여 4명이 시작했다. 총 9개월간 광주에 숙소를 얻어서 생활을 함께했다. 리서치는 어떻게 할지, 구성은 어떻게 할지, 또 추적은 어떻게 할지 세부 계획을 논의한 후 대략적인 시나리오 방향도 잡아나갔다.

-세분 모두 1980년대 이후 출생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하게 작용했던 ‘광주를 경험한 세대’에서 벗어난, 광주를 전혀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본 광주민주화운동이다. 80년대 군부독재 상황은 세분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나.

강상우_ 광주 하면 초등학생 때 <동아일보> 사진기자들이 낸 사진집 <광주, 그날>이 기억난다. 사진집 속 무장시민군들을 보는데,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또 총을 들고 있으니 무섭기도 했다. 후에 본 김군의 이미지와 비슷했고, 그 이미지에 매료됐다. 5·18은 내게 무겁고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노래도 너무 예스럽게 들렸다. 앞서 만들어진 광주에 대한 영화들에도 공감하기 힘들었다. 내겐 납득할 수 없는 분노와 죄책감을 바탕으로 한 진한 감정들이 낯설었다. 386세대의 유산이 어떤 강요로 다가왔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고유희_ 난 1987년생이라 83년생인 감독님보다 더 기억이 없다. (웃음) 내가 가지고 있던 80년대에 대한 이미지는 하나였다. 아버지 본가가 제주도인데, 아버지가 서울에서 재수할 때였다고 한다. 영장이 나왔는데, 제주에 있는 할머니가 광주에 흉흉한 일이 벌어졌다고 하니 고향으로 내려오라고 했다더라.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퍼진 건 그로부터 시간이 지나서였지만, 이미 당시에도 알 만한 사람들은 알음알음 소식을 접했을 거고, 영향이 컸을 것 같다. 나 역시 죄책감의 서사를 강요당하는 건 불편하고, 특히 최근 다큐멘터리, 극영화에서도 이런 방식의 작품들이 보이면 싫었다. 영화를 만들면서도 그런 태도로 흐를까봐 항상 경계했다.

● 신연경 PD_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2010) 조감독, <간지들의 하루>(2012) 조감독·편집, <위켄즈>(2016) 조감독. <만신> 스크립터 당시 연출부였던 강상우 감독과 만났다.

신연경_ 중학생 때 전교조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덮고, 책 이면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면서도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 평소 내가 좋아한 선생님들이 광주 이야기를 할 때 죄의식, 엄숙함으로 일관하는데 그 감정이 나에게까지 전달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시간이 지나고, 그들도 광주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는데 왜 자신들의 정신의 근원을 광주로 가져가는가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던 것 같다. 나 역시 그들의 말을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감독님과 작업하게 됐다.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가지는 질문들이 오히려 <김군>의 영화적 형식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사진 한장으로 김군의 행방을 찾아가는 과정의 긴장감, 서스펜스 구축이 다큐멘터리의 전반부를 이룬다. 지금 세대는 익숙한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의 ‘그것이 알고 싶은’ 호기심과도 비슷해 보인다.

강상우_ <그것이 알고 싶다>의 형식이 이미 많은 영화들의 미스터리 장르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 케인>(1941)에서 로즈버드를 찾아가는 고전적인 방식부터 있었다고 보고, 내가 워낙 사라진 글램록 스타를 찾아가는 <벨벳 골드마인>(1998)의 전개 방식을 좋아하기도 한다. 또 범인이 잘못된 살인의 실체를 찾아가는 에롤 모리스의 다큐멘터리 <가늘고 푸른 선>(1988) 같은 작품은 편집 후반에 신물나게 봤는데, 이 작품들이 이후 수사물 장르에 영향을 줬겠구나 싶었다. 거리를 둔 세대로서, 애초 사진 한장으로 추적해나간다고 한 방식도 오히려 우리처럼 5·18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가볍게, 산뜻하게 덤빌 수 있는 것 같았다. 오직 사진에 존재하는 단서들로만 추적을 확장하고 관련된 인물들을 만나면서 점점 이야기를 넓혀가는 거다. 처음엔 그래서 오프닝에 나온, 페퍼포그 차, 경찰 가스차를 탔던 분들과 연관 있는 분들만 모셔서 인터뷰했다.

고유희_ 사진 한장에서 나오는 다양한 기억들, 진술을 끌어내고 이걸 담는 게 우리 영화의 핵심이었다. 이걸 잘 따라가면 우리가 만들려는 영화의 형태가 나오겠더라. 처음엔 영미권 다큐멘터리들을 참고삼아 보기도 했지만 미국적인 아카이브 영화와 우리가 가진 역사와 푸티지로 만드는 건 다르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표현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다르다는 데 공감했다.

강상우_ 증언자들이 인터뷰할 때 에롤 모리스 영화를 보면 ‘내가 그때 75년 8월 23일 오후 3시30분에 75년식 포드승용차를 타고…’ 식으로 정확한 기억을 이야기한다. 전라도는 아니다. (웃음) 우리가 만났던 선생님들은 주어도 이야기를 안 하신다. (웃음) 그랬나, 그랬다니까, 이러신다. 어떤 디테일의 짜맞춤을 통해서 긴장감이 발생하는 미국적인 다큐멘터리처럼 갈 수는 없겠다는 것을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됐다. 그래서 우리가 집중한 게 증언자들의 감정이었다. 그분들이 체험한 기억을 영화로 시각화, 청각화하고자 했다. 그 당시의 냄새까지도. 김군과 직접 관련된 분이 아니더라도 당시 같은 시기를 경험한 분의 증언을 서술하는 것도 김군을 알아가는 데 중요하다고 봤다. 그가 왜 그때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단서가 된다고 생각했다.

신연경_ 더군다나 미스터리 추리물로서의 집요함을 끝까지 유지하기에는 증언자들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 간신히 수소문해서 찾아도,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결론으로 간 경우가 많았다. 그럴수록 더욱더 철저하게 사진에 집중했다. 사진을 반복해서 보면서 사진 안의 상황들이 가진 디테일을 찾는 데 집중했다. 추적물의 인과관계로 풀리지 않지만 이렇게 관객들에게 이미지에 집중해 보게 만드는 재미들을 가져가려 했다.

김군,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

-자료가 만들어낸 기적 같은 전개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푸티지 영상과 사진, 기사들을 접했나. 초창기에는 자료를 비롯해 인물들까지, 접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신연경_ 우리가 김군을 찾는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했을 때는 광주 5·18기념재단에서도 지만원 발언 논란에 대한 대응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정치적으로 논쟁이 뜨겁게 과열된 때였고, 그분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소속도 불확실해 보이니 인터뷰, 촬영 모두 거절했었다. 감독님이 재단에 장문의 편지를 보내도 답변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재단 도움 없이 가자 하고 착수했는데, 인천다큐멘터리포트(다큐멘터리 프로젝트의 제작, 배급, 펀딩 지원)에 프로젝트를 공개하고, 광수가 아닌 시민군이라는 걸 증명하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그분들도 도움을 주는 쪽으로 전환하셨다. 이후 재단에서 영화에 필요한 자료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셨다.

강상우_ 사진 자료들의 힘이 정말 컸다. 항쟁 당시 찍은 사진 원본들을 보면 크기가 14K나 된다. 너무 커서 로딩이 잘 안 될 정도로, 지만원이 공개한 사진의 저화질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 확대를 하면 할수록 사진 속의 모든 정황이 보이는데 거기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팩트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인상적인 것 중 하나가 김군을 찍은 이창성 사진기자가 “얘가 이렇게 많이 찍혔어?” 하시더라. (웃음) 김군이 자신의 필름에 이렇게 많이 있는지, 이렇게 많이 찍혔는지도 몰랐던 거다. (김군의 사진은 2008년 이창성 기자가 발간한 사진집 <28년 만의 약속>에 수록됐다.-편집자)

신연경_ 감독님이 자료에 욕심이 하도 많아서. (웃음) 신문 조각 기사 하나까지 그 당시 나온 것은 모두 찾고 공유했다. 김군의 총기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임했다. 항쟁의 구술 서사는 기본이고 청문회 영상까지, 얻을 수 있는 자료는 다 얻었다. ‘넝마주이’, ‘페퍼포그’ (pepper gas: 폭동 진압용 최루가스) 같은 키워드로 단서들을 수집했고, 관련된 증언을 해줄 수 있는 분들은 다 찾아다녔다. 또 연구자들에게 구한 조언을 통해 디테일한 것들은 다시 조사하고, 그것들을 맞춰가면서 증언이 가진 객관성을 확보해 나갔다. 정보들을 쌓아가면서 밝혀지는 것들을 영화에서 보여줘야 이 이야기는 성립하니까. 그런데 어느 정도 정보가 쌓이고 나서부터는 그것도 여의치 않더라. 김군과 같이 사진 찍힌 어느 분을 찾았고, 이분만 찾으면 정황을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해서 무작정 찾아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고민이 생기더라. 그럼 이 과정을 어떻게 영화에 넣을 것인가. 거듭되는 실패만을 반복해서 보여줘서는 안 되는데 말이다. 이 단계에서 어떻게 더 나아갈지 고민을 많이 했다.

강상우_ 실패하는 건 괜찮은데, 그 지점에서 어떻게 유의미한 것을 관객이 얻을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가령 김군이 넝마주이라고 해서 그걸 단서로 찾았을 때, 이제는 넝마주이의 흔적은 모두 없어졌다. 그들이 살았다고 추정되는 곳으로 가볼 수는 있지만, 그곳은 이미 도시 재개발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광주라는 도시의 재개발로까지 방향을 확장해야 하나. 그런 고민이 있었다. 부디 잘 실패했으면, 실패의 과정을 잘 담은 영화면 좋겠다 싶었다.

-김군에게 점차 접근해 갈수록, 찾는 이들이 경험한 긴장도 커졌을 것 같다. ‘김군’의 존재가 어떤 의미에서는 다큐멘터리의 목적성에 부합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것 같다.

강상우_ 김군은 항쟁에 참여한 그 많은 사람들 중 한명이다. 분명한 건 그가 비주얼적으로 매료될 만한 지점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거다. 그러니 지만원이 김군을 ‘제1광수’로 지정하지 않았을까. 주옥 선생님이 그를 알아본 것도 돌아보면, 당시 막걸릿집에 있던 무수히 많은 사람 중에서 그를 분명히 기억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렇게 시선을 잡아 끄는, 매료의 지점을 가진 김군을 매개로 광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 수많은 ‘김군들’을 동시에 담을 수 있도록, 밸런스를 가지려 노력했다. 시네마베리테적인 접근이 오늘날 영화에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면, 오히려 예능이나 유튜브에서 그 방식을 활용한다는 생각이 든다. 즐겨보는 프로그램 중 하나가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인데, 그 프로그램이 연습생 한명의 서사처럼 시작해서 그 한명의 이야기가 점차 101명의 이야기로 퍼져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도 100여명의 생존자를 만나서 한명의 이야기를 찾아 나가고, 한명의 이야기로 100여명을 만나는 방식이었다. 광주항쟁이 어떤 한명의 지도자에 의해 일어난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열흘 동안 누가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집단지성이 발생했다는 것을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말하고 싶어서였다.

● 고유희 PD_ 단편 <The Pool>(2016) 연출, <풍경>(2013) 조연출. 강상우 감독의 <클린 미>에 스탭으로 참여했다.

고유희_ 감독님이 <프로듀스 101>을 언급하는 것에 덧붙이자면, 소재를 가볍게 다룬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맥락에서 좀더 자유롭게 이야기해보자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다. 우리는 기존의 한국에서 나온 다큐멘터리를 나열해서 거기서 방법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5·18을 다루는 게 기본적인 태도였다. 아무래도 큰 사건을 다루다보면 엄숙주의가 다큐멘터리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 부담을 최대한 털어내는 것이 우리에게는 중요했다. 돌아보면 정말 열심히 찾고 열심히 만나러 다닌 것 같다.

-증언자들의 증언 장면에서,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그들의 모습이 아니라, 80년 당시 금남로로 총을 들고 나가야 했던, ‘민주주의가 뭔지’ ‘전두환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에 분노했던 청년들, 순수했던 그들의 얼굴을 포착하는 것이 이 영화가 감정적 포문을 터뜨리는 장면이다. 광주를 경험하지 않았던 세대가 그리는 서사라는 ‘우려’ 섞인 시선을 가뿐히 넘어 지금의 청년들이 당시의 청년과 마주하는 새로운 시각은 이 영화의 또렷한 성과로 보인다.

강상우_ 증언자들이 당시 자신이 예뻤고, 젊었다고 말한다. 트럭을 타고 다닐 때의 쾌감도 스스럼 없이 얘기한다. 당시 그분들의 나이가 많게는 20대고, 대부분 10대에 불과했다. 엄청난 비극의 역사, 학살의 현장이라는 엄숙한 상황에서 어린 소년, 소녀들이 그 상황에 직면에 각자가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동참해나간 거다.

신연경_ 김군을 추적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가야 하나, 끊임없이 고민했다. 저널리즘의 가치를 가진 기존의 다큐멘터리와 우리 영화는 다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년’, ‘청소년’, ‘청춘’이라는 키워드도 그렇게 나왔다. 왜 우리 영화에서 그 키워드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했나 물었을 때, 우리가 증언자들을 만났을 때 그 얼굴이 있더라. 이야기할 때 표정과 눈빛을 보면 ‘과거에 그랬어’가 아니라 앳된 사람들의 생기가 느껴졌다. 우리가 만난 분들 모두가 그때의 상황을 아직 자신들 안에 품고 있었다.

고유희_ 선생님들이 아무래도 자주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구술하다보니, 인터뷰를 자주 하신 분들은 몇년 전 자료에서 본 것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이야기하셔서 놀랐다.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정형화된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사진을 보여주니 그분들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지더라. 사진에서 본인들을 찾으시며 생동감 넘치는 기억을 들려주셨다. 사진을 통해 자신들이 지나왔던 미성년의 기억을 복기하신 거다. 그게 지금까지 증언자들의 발언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낸 것 같다.

신연경_ 본인들이 기존에 증언한 패턴이 있으니 우리도 그런 걸 원하는 줄 알고 처음엔 계속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걸 깨는 작업이 필요했다. 사진을 매개로 하니 당시의 냄새, 촉각 같은 디테일한 부분까지 기억해내시는데, 그런 부분을 설명하실 때 표정이 달라졌다. ‘5·18을 모르는 아이들과 대화한다’ 하는 이런 장벽은 아예 없었던 것 같다.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새롭게

-그런 답안이 나올 수 있도록, 질문 자체가 달라졌을 것 같다.

강상우_ 좋아하는 노래도 묻고, 날씨도 묻고.

고유희_ 항쟁의 상황이 아니라, 그 이전의 이야기도 물었다. 어떤 청년기를 거치셨는지.

강상우_ 우리가 자꾸 물으니 불쌍하고 측은해 보여서 이야기를 해주신 것 같기도 하고. (웃음)

신연경_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와서, 이 사람 저 사람 찾고 있는데, 어쨌든 광주에 관심이 있다니 신기하네, 공부 많이 했네, 하신 것 같다. 그분들이 많이 도와주셨다. 주위 친구들에게 연락해 연결해주셔서 만난 분들이 많다.

고유희_ 짧지 않은 시간을 찾아뵈니 신뢰가 쌓인 것 같다. 우리를 다른 분들께 소개해줄 때는, “잘 도와줘. 웬만한 기자들보다 광주에 대해 더 잘 알아” 하고 어느새 추천을 해주시더라.

-그 맥락에서 볼 때 인터뷰 세팅, 질문자의 구성도 눈에 띈다. 특히 기존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이 질문자로 나서는 게 일반적이라면, 영화에는 감독이 나오는 대신 배우(김예은)를 비롯해 안지환 조연출이 주요 질문자로 등장한다.

● 강상우 감독_ 단편 <클린 미>(2014), <안마도>(2014), 장편 <어느 게이 소년의 죽음>(2009), <백서>(2010) 등 연출. <만신>(2013) 연출부, <위로공단>(2014), <위켄즈>(2016) 등을 촬영했다. <김군> 제작을 위해 만든 1011 필름의 대표.

강상우_ 2016년에 영화의 오프닝인 청문회 신을 찍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김군 관련 취재가 많이 진행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영화의 후반을 어떻게 끝낼까,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했다. 자연스럽게 찾는 사람의 비중이 커질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인터뷰어를 다양하게 구성하자 해서 김예은 배우도 참여하게 됐다.

신연경_ 인터뷰를 촬영할 때도 기존의 다큐멘터리에서처럼 각 잡고 찍은 게 아니라 대화하는 방식을 최대한 살렸다. 질문자가 바닥에 앉아 쇼파에 앉은 증언자를 올려다보며 정겹게 대화를 나누는 구도를 취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었지만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같이 즐겁게 대화했다. 그런 분위기를 살리려고 늘 인터뷰 세팅을 고민했다.

강상우_ 헤드숏으로 일관된 다큐멘터리가 주는 답답함이 있다. 증언자들의 일방적인 멘트로 가는 것보다 대화의 맥락을 죽이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5·18을 잘 모르는 젊은 세대들에게 그분들이 편하게, 그때 자기 또래의 나이였던 사람에게 말할 때 생생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다고 봤다. 내가 원래 카메라를 훑어서 촬영하는 걸 좋아하는데, 이게 혼자 질문도 하고 카메라도 움직이려니 힘들어서 안 되겠더라. (웃음) 온전히 대화만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진행자가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촬영자의 위치에서 거리를 조절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 촬영하는 게 즐겁기도 했다. 촬영은 즐겁지만, 편집은 가끔 괴롭고, 연출은 항상 괴롭다. (웃음)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 된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는 지속적으로 기록될 것이고, 기록되어야 한다. 그 시기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 세대의 대두, 그리고 그 시각이 반영된 다큐멘터리라는 점에서 <김군>이 주는 역사 다큐멘터리로서의 새로운 기준점은 가치를 더한다. 작품을 통과하면서 세분에게도 남은 지점들이 있다면 무엇인가.

신연경_ 소소한 인물에서 시작해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업을 주로 해왔다. 역사적 사명감보다는 그런 작업의 연장선에서 김군을 찾아오다보니 이렇게 개봉까지 하게 됐다. 조연출 작업을 하다가, 이제 극장에 걸리는 일까지 참여하면서 내게도 이 작품이 주는 의미가 크다. 다음 작품도 임흥순 감독님 조연출로 다시 광주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워낙 결이 다른 작품이지만 이 작품을 하면서 경험한 동력을 가지고 열심히 임하고 있다. 더불어 우리가 광주 하면 열흘간의 항쟁에 대해서 반복해서 이야기하지만 그 이후의 서사 역시 중요하다. 이후 수감되고 그것이 전과 기록으로 남아 군복무가 불가했고, 그래서 일자리 찾는 것도 어려워지는 등 항쟁 이후에도 그분들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후의 이야기가 이제는 더 크게, 더 많이 이야기되고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유희_ 역사라는 큰 주제로 접근했으면 이 작업을 할 수 있었을까. 사진이라는 단서로, 호기심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어쨌든 장편 PD라는 크레딧을 달고 무모하게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어려움도 배움도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오픈월드형 온라인 게임에서 펼쳐지는 10대 청소년들의 모험을 그린 다큐멘터리 <E.S.P>(감독 정재훈)를 진행 중이다.

강상우_ 커다란 사명감에서 시작했다기보다 호기심과 이 사진의 매력이 중요한 동기였다. 그러니 <김군> 같은 작업을 또 할 수 있을까. 여러 사람들의 도움, 정말 좋은 아카이브, 용기 있는 증언들이 이 영화를 만들어주었다. 이제 또 <김군>을 잊고 새로운 작업을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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