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영 감독의 데뷔작 <보희와 녹양>은 다가오는 여름의 햇살을 닮았다. 모든 것이 찬란하고 싱싱한, 그래서 가끔은 더 아픈 10대 중반의 나이. 영화는 생애 처음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소년 보희(안지호)와 그의 단짝 녹양(김주아)이 겪는 푸릇한 성장통을 맑은 시선으로 지켜본다. 저마다의 우울과 슬픔으로 버거워 보이는 어른들을 헤아리기 시작한 두 친구는 서울의 이곳저곳을 가르지르는 로드무비 끝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주변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단편 <옆 구르기>로 2016년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희극지왕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던 안주영 감독이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과정을 통해 만든 작품답게, <보희와 녹양>은 성장담을 애호하는 감독의 재기발랄한 취향이 한껏 빛나는 영화다.
-뜻대로 되지 않는 짝사랑과 옆 구르기 연습에 매진하는 중학생의 이야기를 단편 <옆 구르기>로 풀어내 주목받았다. <보희와 녹양>도 아빠를 찾으려고 애쓰지만 마음처럼 잘 안 되는 과정이 담긴다. 무언가를 시도하려 하지만 그것이 잘 안 돼 고전하는 청소년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 나이 땐 그게 뭐든지 다 잘 안 되지 않나. 쉬운 게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스스로의 힘으로 잘 풀리지 않으니까 현실에 없는 것을 꿈꾸기도 하고. 이를테면 내 경우는 초능력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식이었다. 그 당시에는 너무 힘들고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 사건들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되면 사실 별거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조용한 소년과 대찬 소녀의 듀오 구성은 관습적인 성역할이 전도된 것 같은 느낌도 준다. 사회적 메시지를 위해 고안한 설정이라기보다 캐릭터를 향한 감독의 취향과 애정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보희와 녹양을 연기한 두 10대 배우는 어떻게 캐스팅하게 됐나.
=최대한 캐릭터와 실제 성격이 비슷한 배우를 찾고 싶었다. 배우가 가지지 않은 특성을 전부 새롭게 만들어내기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안지호 배우는 우선 마스크가 마음에 들었고, 보희와 성격이 비슷해서 바로 결정했다. 녹양 역은 오디션 기간이 길었는데, 김주아 배우가 단연 눈에 띄었다.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자연스럽고 당당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화는 사촌누나의 남자친구인 성욱(서현우)을 비롯해 여러 낯선 타인을 만나는 로드무비 구성을 취한다. 각자 방식은 다르지만 대개 호의와 친절을 베푸는 어른들의 모습을 그렸다.
=‘아이들이 서울을 돌아다니며 어떤 사람들을 만나면 좋을까’ 고민했다. 사실 영화에도 마냥 좋은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현실에선 아이들끼리만 낯선 곳을 돌아다니면 그보다 훨씬 나쁜 일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아이들을 자유롭고 안전하게 풀어주고 싶었다.
-극중에서 보희는 “녹양처럼 되고 싶다”라고 말한다. 부재하는 아버지를 염원하듯, 전형적인 남성성을 갈망하기도 한다.
=한창 자기에게 없는 것을 갈구하는 시기다. 그게 아버지든, 단짝 친구의 성격이든.
-자신의 성적 지향을 따라 가족을 떠난 아버지의 진실이 드러나면서 보희는 한층 성숙해진다. 모험 끝에 보희가 자기 이름, 성격, 외양을 비롯해 가족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뭉클하다.
=사실 처음 시나리오를 쓰면서는 굳이 아버지가 등장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쓰다보니 보희가 이렇게까지 애타게 찾아 헤매는데 한번은 만나게 해주자 싶은 마음이 들었다. (웃음) 다만 가족을 떠난 아버지의 사연이 너무 뻔하거나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아야 했다. 아버지의 개인적인 이유이면서, 보희로서는 좋다 혹은 싫다 식으로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지점을 만들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 모두 강인하게 그려진다. 녹양의 할머니, 보희의 엄마, 사촌누나 남희, 그리고 녹양까지 여성 캐릭터들이 세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도 흥미롭다. 20대인 사촌누나 남희의 경우 결혼을 하지 않고 자기 직업을 갖고 자유롭게 살아간다.
=영화의 중심 내용이라 보긴 어렵지만 자기 할 말을 자유롭게 하는 여성 캐릭터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반영된 것 같다. 이를테면 서사 안에서 ‘엄마’ 캐릭터에 귀속되어 있더라도 자기만의 고민이 있고 특질이 있는 인물을 보고 싶다. 녹양의 할머니도 마냥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가부장 사회에서 아버지들이 밤 늦게 술 먹고 집에 와서 한풀이를 하는 것처럼, 가족을 책임져온 할머니가 술을 잔뜩 마시고 하소연하는 장면을 넣었다. 내 성장 환경과도 관련이 있을 텐데, 내게는 일종의 모계 중심 사회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전반적으로 컷이 잘게 쪼개진다. 카메라의 이동도 많고, 프레임의 크기도 다양하다. 저예산영화가 대개 카메라의 쓰임새를 미니멀하게 계획하는 점을 고려하면 특히 돋보이는 지점이다. 매 장면을 밝고 활력 있게 구성하려는 감독의 의지가 돋보였달까.
=맞다, 컷이 많다. 인물에 천천히 다가가고 오래 보여줬을 때만 얻을 수 있는 감정적인 깊이가 있는데, 물론 그것도 좋지만 <보희와 녹양>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봤다. 아이들이 ‘아무 말 대잔치’를 펼치면서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모습과 잘 동화될 수 있는 설정을 고민하면서 자연스럽게 확신하게 된 설정이다.
-영화라는 매체를 스토리 속에 중요하게 녹여냈다. 영화 속 영화와 묘한 액자 구조가 형성되기도 하고, 녹양은 시종 카메라를 들고 다큐멘터리를 찍는다.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 좀 하지 말라고 주변 동료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다. (웃음) 그럼에도 영화 속의 영화를 쓴 이유는 영화가 관계 맺음에 대한 은유로 기능하길 바라서였다. 보희가 영화 속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데, 우리가 보통 어떤 영화에 영향을 받을 때는 작품 속 이야기가 마치 자기 것처럼 느껴진 경우가 많지 않나. 동화되는 것 혹은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 영화를 보는 행위이고, 그게 곧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사는 행위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또 요즘 세대들은 영화뿐 아니라 영상 매체에 무척 가깝다. 다방면으로 접근성이 훨씬 쉬워지고, 영상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즐거운 놀이 중 하나로서 영화가 삽입되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영화 후반부에 보희가 한강에 떠 있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꽤 넓은 풀숏이라 약간 아찔한 쾌감이 있다.
=프레임 바깥에 안전요원이 있었고, 실제로 안지호 배우가 수영을 잘하는데 이 장면을 위해 촬영 전부터 연습을 많이 했다. 수영하는 이미지보다는 그저 물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을 가져가려 했다. 수영을 배우다보면 물이 더이상 무섭지 않을 때가 찾아온다. 그럴 때 물 위에 누워서 느낄 수 있는 평온함이 있다. 한강은 아이들이 돌아다니는 서울의 중심을 상징하는 공간으로서도 중요했다. 늘 근처에 있지만 쉽게 들어갈 생각을 안 하는 곳이기도 하고.
-<씨네21>과의 지난 인터뷰(1177호, 특집 ‘부산에서 만난 한국 감독들’ 기사)에서 스탠리 큐브릭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차기작에선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여줄지 기대된다.
=의외로 호러와 액션 장르를 좋아한다. 소녀가 주인공인 장르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분위기나 규모가 확실히 달라질 것 같다. <보희와 녹양>이 낮의 영화라면 지금 쓰고 있는 영화는 주로 밤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