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13년의 공백>이 조심스럽게 접어둔 시간과 기억의 풍경
2019-06-13
글 : 송경원
내가 몰랐던 당신의 기억을 회상하며

좋은 영화를 볼 때 누군가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느낌을 받는다. 배우로 활동 중인 사이토 다쿠미의 첫 장편 연출작 <13년의 공백>은 가족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13년 동안 사라진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전해 듣는 이 영화는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담백하고 절제된 시선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2017년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판타랜드 대상을 시작으로 20회 상하이국제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15회 블라디보스토크국제영화제 최우수 남자배우상을 수상하며 완성도를 검증받았다. 무엇보다 원작자 하시모토 고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잔잔한 가운데 흐르는 애틋한 정서가 심금을 울린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가족의 거리.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가족의 풍경.” <13년의 공백>이 채워지는 시간을 여기에 옮겨 적어보았다.

언젠가 어디선가 들은, 친구네 아버지 이야기다. 늘 사람 좋은 미소를 한 그분은 어쩌다 술에 취해서 우리를 만나면 했던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곤 하셨다. 그렇다고 아주 수다스러워지는 건 아니고 과묵한 사람이 수줍게 속내를 드러내는 정도였는데, 내 기억엔 주사마저 너무 평범해서 심심했던 분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희한한 건 정작 그때 그분이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반복했던 이야기의 내용만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거다. 아마도 아들 자랑이었던 것 같은데 내게 친구네 아버지는 살짝 처진 어깨와 뭔가 미안한 표정 정도의 희미한 인상으로만 남아 있다. 했던 말을 반복하는 사람들의 가슴엔 구멍이 뚫려 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사람들은 그 빈칸을 견디지 못하고 공백을 메워보려 다양한 방법으로 발버둥을 친다. 친구네 아버지의 반복된 주사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내겐 그분의 심심한 주사가 후회로 남은 어떤 시간, 자신의 과거를 향해 말을 거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매번 반복했던 그 이야길 새삼 다시 듣는다 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그건 온전히 그분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회상이란 각자 작가 되어 써내려간 이야기다. 똑같은 과거라도 누가 어떤 자리에서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법이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압축을 전제로 한 방식이라 하루치의 체험을 온전히 전달하려면 온전히 하루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리는 시간을 자르고, 사연을 붙여서, 이야기의 형태로 포장한다. 때문에 이야기의 사건과 사건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엔 미처 담아내지 못한 꽤 넓은 공백이 자리한다. 누군가의 기억을 듣는다는 건 그 나머지 공백을 상상해보는 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친구네 아버지는 슬퍼보였다.’ 이 한 문장에는 수많은 사연과 시간들이 접혀 있다. 친구네 아버지가 술만 취하면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던 건 어쩌면 그 감정을 온전히 풀어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계셨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때로 어떤 종류의 영화들은 이렇게 접힌 행간과 시간들을 펼쳐서 슬쩍 보여주기도 한다. 사이토 다쿠미 감독의 <13년의 공백>이 바로 그렇다. 배우이기도 한 사이토 다쿠미의 데뷔작인 이 영화는 말없이 과거를 ‘보여주는 것’으로 목구멍 아래 삼켰던 수백 마디 말을 대신 전하는 종류의 영화다.

애틋한 거리감, 기억의 이면을 들추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던 아버지가 다시 돌아왔다. 정확히는 아버지의 죽음이 당도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다. 하지만 애도의 분위기나 슬퍼하는 기색 같은 건 없다. 자신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도박꾼이었던 아버지는 13년 전 담배를 사러 간다고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만 했고 형은 집안 살림을 도맡아왔다. 가족 모두가 지금까지 지독한 고생을 버텨낸 것이다. 바꿔 말하면 13년 동안 그 시간을 함께하지 않은 아버지를 가족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위암에 걸려 석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연락이 왔으니 화가 날지언정 슬퍼할 이유가 없다. <13년의 공백>은 둘째 아들 마츠다 코지(다카하시 잇세이)의 시점에서 아버지와의 기억을 더듬어간다.

영화의 첫 장면, 사람들이 장례식장을 찾아왔다가 장소를 잘못 찾아온 걸 깨닫고 황망하게 사라진다. 코지의 아버지 마츠다 마사토(릴리 프랭키)의 장례식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지만 바로 옆 다른 장례식장에는 인파로 북적인다. 형 요시유키(사이토 다쿠미)는 씁쓸한 목소리로 “사람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장례식이라는 사건을 기점으로 영화는 빈번하게 플래시백을 삽입하며 이어진다. 아니, 이 영화 전체가 코지와 주변인들의 기억들을 더듬어가는 플래시백 구조로 이뤄져 있다. 초반 코지와 아버지가 얽힌 기억은 초라하거나 애잔하다. 어린 코지는 글짓기로 상을 받았다고 아버지에게 자랑을 하지만 도박에 여념이 없는 아버지는 무신경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도박 빚을 진 아버지를 압박하는 사채업자들은 어린 코지에게 무섭고 수치스런 존재였다. 늦은 밤 사채업자들이 문을 두드리면 일가족은 불을 끄고 집에 없는 척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수시로 떠오르는 기억은 그렇게 어둡고 아픈 기억들뿐이다.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온 배우 사이토 다쿠미는 자신의 첫 연출 데뷔작에서 욕심 부리지 않고 차분한 호흡으로 기억을, 아니 장면을 모아나간다. 이 영화의 회상 장면들은 자세한 설명 없이 과거의 순간들을 사실적으로 살려내는 힘이 실려 있다. 아버지가 도망친 후 어머니와 함께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세 가족의 시간은 마치 사진첩을 뒤적이듯 빠르게, 하지만 정확하게 제시된다.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를 배경으로 새벽에 일하러 가는 어머니, 나란히 둘러앉아 봉투붙이기 아르바이트를 하는 세 가족, 늦은 밤까지 일하는 어머니, 신문배달을 하다가 작은 교통사고가 나는 어머니의 모습이 차례로 이어진다. 사고가 난 뒤에도 영화는 별다른 말을 걸지 않는다. 어머니는 멍들고 부은 얼굴로 거울 앞에 앉아 꾸역꾸역 화장을 하고 두 아들은 또다시 일하러 가는 어머니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형제는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고 어머니의 일을 돕는다. 대화와 설명이 생략된 이 영화의 플래시백들은 짧지만, 아니 짧아서 더 강렬하게 이야기 사이에 접혀 있는 시간들을 들춘다. 무심한 척 제시되는 단편적인 기억들, 사연의 공백은 바라보는 우리의 상상으로 슬며시 채워지는 것이다. 이 영화가 극중 노랫말처럼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가족의 풍경”이 되는 방식은 구체적인 설명이 아니라 누구나 느낄 법한 감정의 공유인 셈이다.

그들 각자의 기억과 당신(혹은 나)의 아버지

<13년의 공백>의 타이틀은 중반부가 다 되어서야 등장한다. 회상과 기억에 대한 감독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이 독특한 구성은 익숙하게 믿던 것들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타이틀이 나오기 전까지인 전반부는 아버지에 대한 코지의 회상으로 이뤄져 있다. 코지의 입장에서 바라본 기억이라고 해도 좋겠다. 관객은 짧고 선명한 코지의 회상에 감정이입하게 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정확히는 사실이되 사실의 일부다. ‘13년의 공백’이라는 타이틀 시퀀스가 지난 후 장례식장에 모인 몇 안 되는 아버지의 조문객들이 차례로 입을 열기 시작한다. 영화는 전반부의 무게를 살짝 내려놓고 여러 캐릭터들의 만담으로 유쾌하게 풀어나간다. 조문객들의 말과 추억으로 채워진 아버지의 모습은 코지의 기억과는 사뭇 다르다. 각자 자신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들려주는 조문객들은 어쩌면 아버지 인생의 대변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를 닮아 어딘지 무심하고 때로는 조금 모자라 보이기도 한 이들은 아버지가 본인 입으로는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대신 전해주는, 늦게 도착한 편지와도 같다. 한 사람의 삶은 그가 함께해온 주변 사람들에 의해 기억되는 법이다. 전반부 코지의 아버지를 보여줬던 영화가 후반부 여러 다른 기억과 말들로 채워지는 과정을 지나고 나면 전혀 다른 얼굴이 그려진다.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니 마츠다 마사토라는 남자는 어떤 사람이었나. 영화는 13년의 공백을 각자의 기억과 회상으로 메워나간다.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벗고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이 영화를 누군가에게 전달한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주 틀린 설명은 아니다. 아버지에겐 나름의 사정이 있었고 가족이 아닌 다른 이들에겐 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버지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아버지로 인해 세 가족이 힘든 세월을 겪어야만 했던 것 역시 변하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영화 역시 그런 방식으로 쉽게 화해를 강요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잘 모르고 있던 아버지의 지난 세월을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들을 때 코지의 마음은 흔들린다. 달리 말하자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어쩌면 미운 마음에 알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또 다른 얼굴들을 마주하며 코지 역시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낼 기회를 얻는 것이다. 어쩌면 코지에게 필요했던 건 아버지를 용서할 계기와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섣불리 용서를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아버지의 13년을 기억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떠나간 자를 위한 변명이 아닌 남겨진 자들을 위한 위로의 언어로 다가온다.

화해와 용서. 어쩌면 그건 단어에 불과할 뿐이다. 분노와 원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이토 다쿠미 감독은 몇 마디 단어로 압축된 복잡한 심경에 ‘각자의 기억’이란 통로를 경유해 도착한다. 행간의 접힌 주름을 펴는 데 집중한다고 해도 좋겠다.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익숙한 이야기지만 좀처럼 잊히지 않을 깊은 여운을 남기는 건 오히려 보지 않고 ‘듣기’ 때문이다. 71분의 짧은 상영시간 안에 밀도 높은 장면들을 선보이지만 이는 대부분 전반부 코지의 회상과 플래시백 장면들에 몰려 있다. 후반부 아버지의 지인들의 입을 통해서 만나는 아버지는 관객의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말로 전해진 기억’들은 관객 각자의 경험과 만나 각기 다른 부피를 획득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 순간을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기다린다. 함부로 용서를 말하지 않고 기다려준다는 것. 보이는 것을 맹신하지 않고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13년의 공백>이 삶의, 기억의 공백을 메우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 데뷔작답지 않은 담백한 연출과 여유 있는 호흡으로 애틋한 거리감을 자아낸 사이토 다쿠미 감독은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의 이야기’로 물들인다. 그러니까 이건, 당신도 언젠가 들었던 친구네 아버지의, 혹은 당신의, 어쩌면 나의 이야기다.

● 얼굴들

<13년의 공백>을 메우는 또 다른 힘은 배우들의 얼굴이다. 아버지 역의 릴리 프랭키는 몇 차례 등장하지 않지만 기억 속에 자리한 희미한 아버지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킨다. 축 처진 어깨에 사람 좋은 미소, 무기력한 가운데 수줍은 온기 등 아버지의 이미지는 상당 부분 배우 릴리 프랭키가 가진 아우라에서 빌려왔다. 아들 코지 역의 다카하시 잇세이는 관찰자로서 자신의 기억, 아버지 지인들의 기억을 가만히 바라보는 위치를 수행한다. 다카하시 잇세이의 선한 듯 슬픔이 감도는 얼굴은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애틋한 상태를 절묘하게 잡아낸다. 무엇보다 이번 영화에서 눈에 띄는 건 엄마 마츠다 히로코 역의 배우 간노 미스즈다. 전반부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다 교통사고를 당해 만신창이가 된 히로코의 얼굴과 후반부 차마 남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홀로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그녀의 모습은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회한의 무게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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