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미하엘 하네케의 <해피엔드>가 보여주는 가족이 있는 신경증적 풍경에 대하여
2019-07-03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어떤 죽음의 예고

미하엘 하네케는 자신의 열두 번째 장편영화 <해피엔드>에서 이전까지 했던 작업들을 한데 모으고 있다. 이를테면 작품 전반에 사용되는 ‘서스펜스가 동반된 퍼즐 맞추기’ 방식은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들>(1994)에서 이미 보았던 것이며, 햄스터가 죽는 오프닝 장면은 <베니의 비디오>(1992)의 돼지잡기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가족’이라는 기초 세포와 ‘타인’이라는 외부와의 관계는 <퍼니 게임>(1997)에서 보았던 대립의 양상과 비슷하고, ‘커뮤니케이션 가능성 없음’의 키워드는 <미지의 코드>(2000)에서 보았던 메시지와 같다. <피아니스트>(2001)에서 본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태도가 <해피엔드>에 일부 반복해 나타나며, <하얀리본>(2009)에서 보았던 반성적인 사유의 방식은 ‘난민 문제’와 만나서 새로운 주제를 드러낸다. 물론 가장 두드러지는 비교는 <아무르>(2012)와 연관돼 있다. 장 루이 트랭티냥이 연기하는 조르주 캐릭터는 <해피엔드>와 <아무르>를 충실하게 연결시킨다. 다만 이전의 하네케가 ‘우화 만들기’에 열중했다면, 이번에는 ‘우화 깨트리기’에 골몰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번 영화에서 주인공은 지극히 현실적인 죽음의 충동을 고민하고 있다. 조르주가 죽으려는 것은 혼란스럽기 때문도 끔찍해서도 아니다. 다만 현재의 자신이 비극적이기 때문에, 그는 죽으려 마음먹는다. 이와 같은 결심이 영화 속 모든 사태를 열려 있게 만든다.

이해할 수 없던 몇몇 대사들에 대하여

영화를 본 직후 극장을 나서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몇몇 대사들이 떠올랐다. 우선 로랑 가문의 집사가 앤(이자벨 위페르)에게 “이제 이곳을 떠나는 건가요?” 하고 물을 때, 그가 왜 그녀에게 그렇게 질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약혼의 상황이나 개에 물린 상태와 전혀 상관없는 질문을 그는 던졌다. 이어서 토마스(마티외 카소비츠)의 채팅상대 ‘클레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점도 불편했다. 침대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검은 여인을 특정하기엔 영화가 주는 정보가 부족했다. 만일 하네케가 아니라면 넘어갔을 디테일들이다. 하지만 <해피엔드>는 하네케의 영화이고, 그는 늘 양식화된 조각 상태의 시퀀스를 내놓는 감독이다. 따라서 그가 ‘감정적 동결’이라 불렀던 해설의 방식을 떠올려 이를 설명하려 한다. 말하자면 하네케가 선호하는 코드의 형태를 이용하는 것이다. “첫째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을 찾고, 둘째 캐릭터를 이용해 두려움을 투사한 뒤, 셋째 심리적 순서의 패턴을 깨달아 스스로에게 질문하라.” 하네케의 영화에서 일부분의 이미지는 전체적 맥락과 연관돼 있다. 그렇기에 앤이 왜 ‘떠날 것’이라 예측하는지, 클레르가 과연 ‘누구’인지, 그리고 에브(팡틴 아흐뒤엥)는 이복동생에게 왜 ‘어머니를 잃을 것’이라 말하는지 관객은 하네케의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해체되었기에 생성된 미스터리를, 관찰 가능한 임상의 부분을 통해 설명해내야 한다. 비견컨대 이전의 어떤 작품들보다, <해피엔드>는 풍부한 인물 구성을 자랑하는 하네케의 영화다. 3대에 걸친 대가족 구성원들이 간략히 소개된 뒤, 비중의 차이 없이 인물들의 성향이 나열된다. 대다수가 의사소통에서 문제점을 가진다는 데 공통점이 있지만, 자세히 보면 개인별 양상은 다르다. 먼저 1대 조르주는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노인으로 묘사된다. 특히 에브와 만나서 이 점은 더욱 강조된다. 마치 그는 치매 노인의 전형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그의 서툰 접근방식이 좀더 낫다. 적어도 그는 인간적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2대 앤과 토마스는 젠틀하지만 인간미가 없는, 의심스러운 자들로 표현된다. 그들은 마치 외국어를 주고받듯 사무적인 방식으로 상대방과 소통한다. 그들의 말을 표면적으로 완전히 믿기는 어렵다. 심지어 ‘사랑한다’는 말조차도 상투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표현이 세련돼 보인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은 진정한 부르주아들이다. 마지막으로 3대 에브와 피에르(프란츠 로고스키)는 다른 인물들과 비교할 때 솔직한 편에 속한다. 그들은 울거나 포효하며, 심지어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서서히 무너진다. 특히 에브에게서 커뮤니케이션 양상은 SNS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그 상황은 지극히 위태롭다. 아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입을 꾹 다문채로 보낸다. 하지만 그러한 자폐적인 성향이 채팅창에서는 극복된다. 소녀가 지닌 진행과 정지의 오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치유되지 못하지만, 여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면에서만큼은 긍정적이다.

비극이 예정되어 있으니…

그렇다면 가려진 행복이 아닌, 영화가 드러내 보이는 가시적인 정서는 무엇인가? 단적으로 <해피엔드>에서 가장 강조되는 양상은 ‘죽음’이다. 영화에서 죽음은 ‘자살’과 ‘모친살해’의 모티브로 변형되어 곳곳에 나타난다. 처음 조르주가 자살을 시도한 이후, 자살 충동의 의지는 에브에게서 명백히 드러난다.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던 아이가 어느 순간 통제력을 잃으며 약을 삼킨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강박관념을 간접적으로 할아버지에게 고백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이는 완전히 솔직해지지 못한다. 캠프에서 독살한 친구에 대한 고백은 사실 어머니를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을 포장한다. 한편 성년이 되려면 4년이나 남은 에브에게서 발견되는 오만함의 극치는 그녀를 나쁜 방면으로 용맹하게 만든다. 그 결과 에브는 아버지에게 심리적인 복수를 행한다. 어머니 살해를 통해서다. 그 성패는 모호하다. 분명한 점은 에브가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저택에 무사히 잠입했다는 사실이다. 소녀는 아마도 당분간 아버지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성공은 양가적이다. 즉 불안을 동반하고 있다. 갓 태어난 이복동생을 보며 에브가 예측하듯, 아버지는 곧 다시 사라질 것만 같다. 사촌으로 소개된 인물의 상황 역시 걱정스럽다. 에브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부재의 상황에서 피에르는, 대체된 새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곧 떠날 예정이다. 수동적이며 나약한 피에르에게 미국인 새아버지는 어머니를 앗아가는 사람일 따름이다. 불완전한 내면세계에서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은 비극을 불러올 것이다. 부르주아 지도층으로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도덕성 파괴는 이미 가시적인 레이스에 올라 있다.

이제 클레르가 누구인지 답해야 할 차례다. 우선 클레르는 인터넷상의 여인이며, 보이지 않는 자이고, 또한 어머니의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불완전한 공격성과 사디즘의 습성이 그녀의 어투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직접 본 적은 없다. 토마스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죽음을 향한 의지처럼, 클레르는 현실적인 동시에 접근 불가능한 영역에 놓인 인물이다. 에브는 남몰래 그 자리를 탐한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리고 영원히, 소녀의 소원은 성취되지 못할 것이다. 위태로운 옹벽을 지닌 칼레의 부르주아 가정은 그렇게 임시적인 봉합을 취하고 있다. 영화의 말미, 바닷가에 선 에브의 행동을 떠올려본다. 하네케가 만든 이 고전극의 결론에서 아이는 SNS 화면이 켜진 휴대폰을 들고 외롭게 서 있다. 어쩌면 우리가 알 수 있는 진실은 점점 더 좁아지는 것 같다. 이토록 창백하고 냉담한 반복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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