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마음속이 복잡해진다. 선과 악의 잣대로 규정할 수 없는 그의 인물들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혼돈의 세계를 헤매며 답을 구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도 영화는 그들에게 명확한 해법을 주지 않는다. 이처럼 비정하고 냉혹한 현실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정호 월드’는 그러나 뜨겁다. 마치 바위가 다시 떨어질 걸 알면서도 산 위로 돌을 굴리는 시시포스처럼, 이정호 감독이 창조한 세계 속 인물들은 현실이 쉽게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세계의 부조리에 몸을 부딪힌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부서지고, 누군가는 괴물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신작 <비스트>는 연쇄살인사건을 둘러싸고 두 형사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조명한다. <방황하는 칼날>(2013) 이후 5년 만의 복귀작인 이 영화는 더 깊은 절망과 더 복합적인 감정들을 가지고 있다.
-<방황하는 칼날>과 <비스트> 사이, <탐정: 더 비기닝> <더 폰> <석조저택 살인사건>의 각색 작업에 참여했다.
=<탐정: 더 비기닝> 김정훈 감독, <그래, 가족> 마대윤 감독과 함께 영화 <청풍명월>(2003)의 연출부로 활동했다. 그 작품을 인연으로 셋이 자주 만나며 소통하는데, 가끔 각색 의뢰가 들어오면 공동으로 작업한다. <간첩> <탐정: 더 비기닝> <더 폰>이 그런 사례다. ‘시나리오 마무리는 우리가 한다’는 마음으로 작업한다. 정작 자기 작품 쓸 때는 다들 힘들어하면서. (웃음)
-<비스트>는 여러모로 전작 <방황하는 칼날>의 연장선에 놓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악의 경계가 흐릿한 세계에서 방황하는 형사가 다시 한번 등장한다. 이렇게 ‘이정호표 형사영화’가 시리즈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짐작도 해본다.
=시나리오 집필 과정에서 가끔 이성민 선배가 연기하는 ‘한수’를 ‘억관’(<방황하는 칼날> 속 이성민 배우의 역할명)이라고 쓴 적도 있다. 글쎄, 이 영화를 보고 <방황하는 칼날>을 떠올렸다면 단정적이고 확정적인 걸 선호하지 않는 나의 취향이 반영됐기 때문인 것 같다. <비스트>의 한수는 통제력을 잃고 선을 넘기 직전의 상황에 처한 형사의 이미지고 이는 <방황하는 칼날>의 형사 상현(정재영)도 마찬가지다. 법과 인간적 이해, 그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끌린다.
-프랑스영화 <오르페브르 36번가>가 원작이다. 이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처음부터 이 영화의 존재를 알았던 건 아니고, 지인에게 리메이크 제안을 받은 뒤 보게 되었다. 1970년대 고전 프렌치 누아르의 느낌이 물씬 나는, 매력적인 영화였다. 나는 특히 이 작품의 엔딩을 인상 깊게 봤다. 두 남자가 화장실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데,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 담겨 있더라. 그 엔딩 신 때문에 리메이크 연출 제안을 받아들였다. 형언할 수 없는 두 인물의 감정을 중심에 놓고, 이러한 감정에 다다르기까지의 이야기를 역으로 발전시켰다.
-오리지널 영화는 정의감이 투철한 형사와 권력욕이 강한 형사간의 대결을 다룬다. <비스트>는 두 형사의 대결 구도에 다양한 개성을 가진 등장인물들의 사연을 더하고, 연쇄살인범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과정을 비중 있게 조명한다. 전반적으로 이야기의 갈래가 늘어났는데, 각색 과정에서 어떤 고민을 했나.
=리메이크작을 연출할 때마다 다음의 원칙을 지키려고 한다. 원작의 내용은 바꾸되 정서는 유지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오르페브르 36번가>는 프랑스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경찰 내부 조직간의 알력 다툼이 있었고 그 사건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졌다고 하더라. 그러니 프랑스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 영화가 실화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지가 흥미로웠을 거다. 그런데 실화의 매력을 제외하고 영화적으로 원작을 보았을 때에는 이야기가 왜 앞으로 더 흘러가지 않고 멈춰 있지, 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좀더 장르적으로 치고 나갈 수 있는 지점이 있었으면 했다. 그런 고민 끝에 시한폭탄 같은 정보원 춘배(전혜진)의 비중이 커졌고, 연쇄살인범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 전반을 관통하게 됐다.
-<비스트>를 통해 “리얼리즘이 아니라 장르적 느낌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발언과 일맥상통하는 대답이다.
=이 작품은 감정적으로 복잡한 영화고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가 무거워진다. 그런 작품을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로 만들면 나는 못 볼 것 같았다. 박찬욱 감독님의 <올드보이>(2003) 개봉 당시 누군가, 이 작품의 미술은 왜 리얼리즘적이지 않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러자 박찬욱 감독님이 “아휴, 이런 영화를 어떻게 리얼리즘적으로 만들어요. 철저하게 영화적인 느낌으로 가야지”라고 했다더라.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그런 취지로 말씀하셨다는데 나도 비슷한 맥락으로 생각했다. 이야기는 무겁더라도 촬영, 미술, 조명 등 시각적으로는 극의 분위기를 밝혀보자는 이야기를 스탭들과 자주 나눴다.
-극의 중심이 되는 건 원작과 마찬가지로 두 형사다. 한수는 뛰어난 감각과 행동력을 가진 형사고, 민태(유재명)는 이성적이며 냉철하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단순히 기질 차이라고만 볼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 오간다. 이들을 어떤 인물로 그리고 싶었나.
=시나리오 집필 과정에서 영화 <아마데우스>(1984)를 떠올렸다. 한수가 모차르트라면, 민태는 살리에리다. 질투, 열등감, 시기심. 민태는 인정받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큰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면 한수를 이기고 싶은 건지, 경찰 조직의 과장이 되고 싶은 건지 그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원래 그렇잖나.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가 아니라 복합적으로 감정이 뒤섞여 있다. 한수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떠올리며 만든 캐릭터다. 오랫동안 형사로 일하며 범죄에 환멸을 느낀 그는 어느 순간 경찰로서의 선을 넘어 범죄자들에게 과도한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몇 번째 신, 몇 번째 컷에서 갑자기 변하는 게 아니라, 점점 스며들듯이 변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긴장감 있게 만들어보고 싶었다.
-<베스트셀러>(2010), <방황하는 칼날>에 이어 배우 이성민과 다시 한번 협업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그동안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역할을 자주 맡았던 것 같은데 이번 영화에서는 날카롭고 때로는 비열한 모습도 보여준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한수 역에 성민 선배를 생각했었다. 다혈질에 폭력적인 인물인데 이성민 배우가 가진 선하고 인간적인 느낌이 있으니 그런 사람이 한수를 연기하면 인물에 대한 관객의 거부감이 중화될 것 같았다. 이번 영화는 감정의 결이 너무 복잡해서 그 결을 어느 선까지 표현해야 할 지 정말 고민이 많으셨을 거다. 겉으로 봤을 때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바짝 긴장하고 있는 인물을 연기하기가 쉽지 않다.
-유재명 배우는 이전에 눈여겨봤던 작품이 있는지.
=드라마를 잘 안 보는데, 지인의 추천으로 <비밀의 숲>을 보고 유재명 배우에게 깜짝 놀랐다. 한국에도 이렇게 섬세한 연기를 하는 배우가 있구나 싶더라. 민태는 어떻게 보면 선한 사람 같고, 어떻게 보면 나쁜 사람 같기도 한, 복잡적인 결을 작은 떨림과 호흡으로 보여주는 게 매우 중요했던 인물이었는데 유재명 배우가 그런 연기를 잘해줄 거란 강한 확신이 있었다.
-현장에서 두 배우의 호흡을 지켜보는 쾌감이 있었겠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서는 리허설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 했다. 두 배우가 서로의 에너지를 어떻게 주고받을지 나부터가 너무 궁금했고, 첫 테이크가 그렇게 기다려지더라. 본인과 다른 에너지를 가진 상대방이 치고 들어왔을 때, 그 연기를 깊이 존중하면서도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두분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렇게 두 배우의 첫 테이크를 보면 머리가 막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분들의 연기를 보고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수정한 경우도 있었다.
-한수의 정보원으로 등장하는 춘배 역의 전혜진 배우가 강렬하다. 다른 범죄영화였다면 남자배우가 연기했을 법한 인물이다.
=맞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 정보원이었고, 춘배가 아니라 창배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또라이’ 같은 인물을 찾고 싶었다. 20여년 전 <품행제로>에서 류승범 배우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에 견줄 법한 신선한 얼굴이 필요했다. 그런데 수차례 오디션을 보아도 그런 남자배우를 찾기가 쉽지 않더라. 그러다 전혜진 배우를 만나게 됐는데, ‘어, 내가 찾던 또라이가 여기 있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 사람이 엉뚱하고, 터프하고, 털털한 구석도 있고, 무엇보다 이상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더라. 그 에너지가 이 영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제작사, 투자사를 설득했다. 춘배는 어렸을 때부터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시선이 자주 가는 손에도 크게 문신을 하고 후드를 덮어쓰고 다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전혜진 배우와 많은 회의를 거쳐 춘배의 룩을 만들어갔다.
-김호정 배우가 연기하는 오 마담, 이상희 배우가 연기하는 마약반 출신 후배 형사 미영 등 원작에 비해 여성 캐릭터들의 비중이 훨씬 늘었다.
=호정 선배가 처음으로 한 질문이 그거였다. “나 죽어, 안 죽어? 나 꼭 죽여줘.” 등장했다가 애매하게 사라지는 게 싫다고 하시더라. 원작에서부터 오 마담은 매력적인 인물이었는데 이번에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이 인물의 기승전결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상희 배우는 예전부터 자꾸 시선이 갔다. 유재명 선배와 함께 출연한 드라마 <라이프>에서도, 주인공 뒤에서 수술 도구를 챙기는데 자꾸 상희 배우만 눈에 보이더라. (웃음) 연기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연기를 한다는 유재명 배우의 말을 듣고 첫 촬영을 시작했는데, 한 신을 완전히 장악해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이었는데도 이상희 배우가 화면에 잡히자 갑자기 이상한 흐름이 생기며 화면에 상희 배우의 인장이 새겨지더라. 리액션을 해야 하는 성민 선배도 그런 상희 배우를 보며 놀라워하고 재미있어했다. 그렇게 독특한 연기를 하는 상희 배우에게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잇는 관찰자의 역할을 맡겨보고 싶었다.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되는 창신아파트는 차이나타운을 연상케 하는 장소다.
=내가 제작팀에 주문했던 공간은 후미진 곳에 위치한 낡은 복도식 아파트였다. 용의자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그곳이 우범지역이라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서로 자기를 잡으러 온 줄 알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면 흥미로운 그림이 만들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철거를 이미 했어야 하는데 방치된 아파트라는 느낌을 주는 장소였으면 했는데 나라가 발전하긴 했는지 전국을 다 뒤져도 그런 곳을 찾기가 어렵더라. 그러던 중 우연히 대구에 위치한 동인아파트라는 곳을 찾았다. 동선도 복잡하고 한수와 민태의 관계가 처음으로 어긋나게 되는 중요한 장면이라 오랜 시간 굉장히 공을 들여찍었다.
-안개와 갯벌이 영화의 무드를 완성한다.
=한치 앞도 볼 수 없게 하는 안개나 질퍽거리는 갯벌의 느낌이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과 비슷하다고 봤다.
-엔딩을 여러 버전으로 찍었다고.
=후반부 두 남자가 대면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이 어떤 느낌으로 완성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어떤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작품을 시작하기보다는 현장에서의 공기와 배우들의 연기에 많은 영향을 받는 편인데,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작업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감정적 엔딩이 된 것 같다. 특히 전혀 생각지 못했던 민태의 감정을 유재명 선배를 통해 볼 수 있어 좋았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 민태에 대한 부연설명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두 주인공으로의 몰입감이 떨어진다는 점은 아쉽다.
=등장인물의 사연을 얼마나,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는 정말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초창기 시나리오에는 두 사람이 어긋나게 된 과거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너무 쉽게 두 사람의 관계를 단정짓는 설정들을 자꾸 걷어내게 됐다. 과거에 둘이 파트너였고, 어떤 사건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졌다는 것 정도만 유추할 수 있어도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민태의 경우 그의 복합적인 감정을 유재명 선배가 멋지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는데 시간상 편집돼 아쉽다.
-차기작 계획은.
=대중영화 감독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좋아하는 작품을 만들면 좋겠지만 머릿속에서는 자꾸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는, 불가해한 소재와 무게감 있는 이야기에 끌린다. 그렇게 나는 지금 경계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