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라짜로>를 보며 선명한 계급 격차를 의식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지주가 마을 사람들 전부를 속여 노동력을 착취하고 이주를 엄격히 금지한 사건은 분절된 두 부분을 잇는 주된 서사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계급 착취 문제와 이것이 영속되는 양상에 주목하지는 않을 작정이다. <행복한 라짜로>가 주는 감동은 명확한 현실 인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현실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원하는가. 그 이야기는 어떤 연유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가. 그것이 이 글의 관심사다.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는 실제 성인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렇다고 <행복한 라짜로>가 사전 지식을 요구하는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성경에 관해 알지 못하더라도, 어떤 성스러움에 관해 나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마을 사람들은 끊임없이 ‘라짜로’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 소리가 내겐 신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 소리처럼 들렸다. 우리는 의무적으로 혹은 필요에 따라 신의 이름을 부르며 저마다의 소망을 요구한다. 착취당하는 자에게 착취당하는, 마을의 가장 낮은 일꾼인 라짜로에게서 ‘가장 낮은 곳에 임하는’ 신이 보인다.
실제 성인에 관해서라면 침묵하겠지만, 영화 속 성인에 관해서라면 기꺼이 언급하고 싶다. 라짜로가 열병에 시달릴 때 라짜로의 얼굴이 화면 하단에 놓인 채 클로즈업되는데, 이런 프레임은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1928)을 연상시킨다. 이 순간 라짜로의 얼굴은 마리아 팔코네티가 연기한 잔 다르크의 얼굴만큼이나 성스러워 보인다. 비루하고도 성스러운 존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다른 인물은 베르너 헤어초크의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1974)의 카스파 하우저다. <카스파 하우저의 신비>라고도 알려진 이 영화는 태어난 뒤 줄곧 지하실에 감금된 채 생활해오다 세상으로 풀려난 미지의 소년 카스파 하우저의 이야기를 다룬 실화영화다. 백치로도, 천재로도 보이는 미스터리한 카스파 하우저처럼 라짜로에게는 선한 인상에 가려진 독특함이 있다. 그는 때때로 사람들의 부름을 듣지 못한 채 멍하니 서서 눈뜬 채 잠들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의심하거나 반박함 없이 그대로 믿고 따른다.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어딘가 붕 뜬 것 같은 그의 존재는 설화와도 같은 이 영화의 사건과 잘 어울린다.
라짜로와 탄크레디(루카 키코바니)의 우정은 라짜로의 부활을 기점으로 분리된 두 부분을 잇는 주된 서사 중 하나다. 둘의 관계는 계급에 의한 상하 관계처럼 읽히곤 하지만, 나는 그것만으로 관계의 순수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탄크레디가 처음으로 라짜로의 이름을 지시가 아닌 친교의 의미로 부르는 순간, 이는 거부할 수 없는 우정이라 확신했다. 당신이 이들의 우정을 믿을 수 있다면, 영화가 행하는 기적 역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라짜로의 부활 전후의 이야기를 농촌과 도시 혹은 과거와 현재라 칭할 수 있지만, 나는 진실과 거짓이라는 이름을 붙여보고 싶다. 어느 한쪽이 진실이거나 거짓이라는 말은 아니다. 농촌에서의 삶은 소수의 거짓이 다수의 믿음에 의해 지탱되었던 세계라면, 도시에서의 삶은 다수의 거짓이 소수의 믿음과 선의를 갈취하는 세계다. ‘미래’에서 온 자인 탄크레디가 거짓에 익숙한 것은 다시 생각하면 일종의 암시다. 그는 납치 자작극을 꾸미고,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라짜로에게 그들이 형제일 거라고 믿게 한다. 라짜로에게 새총을 대단한 무기라도 되는 양 하사하며 중세시대 기사 시늉을 하는 것은 단지 허풍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세계가 거짓을 통과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임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두 세계 사이에는 또 다른 세계가 숨어 있다. 바로 늑대의 세계다. 그것은 음향의 차원으로 영화 속 인물과 교신하고, 이미지를 통해 관객의 눈앞에 현현한다. 늑대의 세계는 탄크레디와 라짜로, 그리고 달과 모종의 관계를 가진다. 탄크레디는 ‘달의 표면’이라며 메마른 땅으로 라짜로를 데리고 가는데, 어딘가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린다. 탄크레디는 흥미로운 듯 귀를 기울이더니 울음소리를 흉내낸다. 이에 응답하듯 다른 울음소리가 들린다. 비슷한 장면은 도시에서 한번 더 펼쳐진다. 안토니아(알바 로르바케르)와 가족들이 모여 사는 거처를 방문한 탄크레디는 요리용 둥근 냄비를 손에 쥐더니 ‘작은 달님’이라고 칭하며 머리 위로 들어올린다. 둥근 냄비달이 뜬 저녁, 둘은 다시 늑대 울음소리를 내고 거짓말처럼 응답이 들려온다. 이어 스테파니아를 시작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 젊었던 때로 회귀한 환상 시퀀스가 잠시 펼쳐진다. 이것이 누구의 환상인지는 모호하다. 차라리 주체가 없는 영화적인 환상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은 사기와 거짓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환상의 세계로 나아가는 좁은 길을 만든다.
이때 환상은 도피가 아니다. 환상은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불가피한 속성이다. 환상은 달리 말하면 기적이다. 기적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소박하고 구체적인 사실에서 온다. 많은 종교영화들이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기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강조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영화적인 기적은 영적인 사건의 재현과 이것의 간접 체험이 아니다. 영적인 사건을 통과한 지극히 인간적인 한 사람을 목격하는 데서 기적은 생성된다. 샐리 포터의 <올란도>(1993)는 오랜 잠에서 깨어난 뒤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화한 양성 인간 올란도의 이야기를 다룬다. 나는 영화가 보여주는 사건에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과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태도에 설득되었다. <행복한 라짜로>에서 라짜로가 죽음에서 돌아온 순간보다 마음을 끄는 건, 그것이 허락한 만남의 여정이다. 라짜로가 깨어나야 했던 이유가 단지 누군가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사실에 나는 감동한다.
사고로 정신을 잃은 뒤 깨어난 라짜로는 탄크레디를 향해 먼길을 유랑한다. 비로소 성사된 짧은 만남 뒤, 그의 초대를 받아 온 가족을 대동한 채 탄크레디의 집으로 향한다. 기대된 두 계급의 화합은 탄크레디가 돌연 마음을 바꾸면서 쓸쓸히 끝난다. 고장난 자동차를 수레처럼 밀며 이동하던 밤, 일행은 오르간 소리에 이끌려 성당으로 향하지만, 비공개 의례라는 이유로 쫓겨난다. 그때 성당을 배회하다 떠나간 음악이 이들을 따라온다. 음악은 배고픈 이들에게 빵이 되지도, 고장난 자동차를 고쳐주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들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하기에는 충분하다.
이 장면이 보여준 기적은 지극히 ‘영화적’이기에 마음을 끈다. 관객에게 이 장면이 기적인 이유는 단지 음악이 이들을 따라왔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 같은 음악을 들으며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게 되기 때문이다. 음악을 따라 허공을 좇는 극중 인물들의 시선은 마치 영화 바깥의 존재를(혹은 우리를) 알아챈 것만 같다. 그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이 서글프면서도 환희에 겹다. 나는 이들의 고단한 하루를 버려두지 않고, 한줄기 음악으로 위무하기로 결정한 영화의 선택에 위로를 받는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라면 달리 어떤 것이 기적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