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7월 1일, 한국영화계 최초의 홍보마케팅사 ‘올댓시네마’가 문을 열었다. 국제영화제와 영화잡지가 막 생기기 시작한 그때 영화도 이제 전문 홍보마케팅사의 손길을 거쳐 대중에게 매력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올댓시네마의 첫 작품인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컬러 오브 나이트>(1994)의 카피라이트는 ‘지금 새로운 자극이 시작됐다!’였다. 미국에서 그해 최악의 영화로 평가받았던 영화가 국내에서는 흥행했으니, 홍보마케팅을 모르던 시절, 그 필요성을 깨닫게 해준 사례였다. 한국에서 홍보마케팅을 시작한 지 25년. 올댓시네마에는 <쉬리>, <매트릭스> 시리즈, <해리 포터> 시리즈 등을 포함해 500여편의 필모그래피가 쌓였다. “한 5년 하려나” 하면서 시작했는데 여기까지 이르렀다는 채윤희 올댓시네마 대표는 이제 마케팅뿐 아니라 영화계 여러 곳에 영향력을 끼치는 영화인으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1월에는 “입지를 바꾸면서 또 새로운 자극을 주려고 한다”며 오랜 광화문 시대를 접고, 홍대 인근으로 사옥을 옮겼다.
-1994년 오픈했으니 올해가 올댓시네마 25주년 되는 해다.
=축하 연락이 많이 온다. (웃음) 후배들이 ‘대표님이 롤모델이니 부디 30주년, 40주년 쭉 해달라’고 한다. 내가 언제까지 하는지에 따라 이 직업의 수명이 늘어나는 거고 본인들도 따라서 일할 수 있는 거라고. 전에 같이 일했던 직원이 ‘20대에 보고 40대가 되었어요’라고 문자가 왔기에 내가 답변으로 후다닥 도망가는 캐릭터 이미지를 보냈다. 정신없이 왔는데, 돌아보니 벌써 25년이 됐다.
-21개 영화 홍보마케팅사의 근로 환경 개선을 위해 만들어진 한국영화마케팅사협회(KFMA)가 2013년 창립했다. 이 분야가 전문 직종으로 자리잡는 동안 올댓시네마의 역사가 곧, 한국영화 홍보마케팅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사 기획실에서 홍보마케팅까지 했으니 올댓시네마 전에 따로 전문 대행사는 없었다. 나는 그때 양전흥업을 거쳐 삼호필름에서 일하며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 <첫사랑>(1993) 같은 작품에 참여할 때였는데 지금 명필름의 전신인 명기획에 있던 심재명(현 명필름 대표)이 어느 날 “선배님 차나 한잔하시죠” 하고 연락이 왔던 기억이 난다. 기획실에서 일하는 여성이 아예 없을 때였으니 막 일을 시작한 우리끼리라도 서로 알자는 거였다. 그렇게 만난 인연이 지금까지 쌓여 영화계 여성 인력이 됐다. (웃음) 90년대 초 삼성, 대우, SK, 현대 등 대기업이 영화계에 들어오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나는 영화기획사 다니다 결혼 후 잠깐 쉬고 있었는데 삼성드림박스에서 홍보마케팅만 전문으로 해달라는 제안이 왔다. 기획사 다닐 때 홍보마케팅을 담당했으니 이 일을 해봐도 재밌겠다 싶어 고민 끝에 올댓시네마를 만들었다.
-‘올댓시네마’라는 이름은 어떻게 만들었나.
=한달쯤 이름을 고민했는데 영화계에서 일하는 남편이 ‘올댓시네마 어때?’ 하더라. ‘올댓재즈’에서 따온 건데 듣기 괜찮더라. 올드한 이름이 아니라서 한 이름으로도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지 싶다. 그런데 처음엔 회사 이름이 어렵다고 타박을 많이 받았다. 사무실에 전화 오면 십중팔구 ‘거기 올드시네마예요?’ 아니면 ‘월드시네마예요?’라고 묻고 그랬다. (웃음)
-대행사가 처음이니 모든 기준을 새로 만들었겠다.
=뭘 해도 다 처음이었다. 딱히 물어볼 데도 없었다. 행사하면 백월(Back Wall) 만들고, 마이크 가지고 하는 사소한 진행 방식도 다 처음이었다. 나중에 미국, 일본 등에 가서 봐도 우리나 큰 차이가 없었다. 예전엔 시사도 남산감독협회 시사실 혹은 길 시사실 같은 전용 시사실에서 따로 했지 지금처럼 일반 극장에서 하지 않았다. <쉬리>(1998) 때 처음 일반 극장에서 시사를 했다. 워낙 화제작이라 기자, 배급업자 등이 많이 몰렸고 시사실로는 자리가 부족했다. 한관으로는 모자라 몇개관을 빌렸던 기억이 난다.
-소위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작인 <쉬리>는 올댓시네마의 입지를 다진 작품이기도 하다.
=잘된 작품을 떠올리면 <쉬리>를 빼놓을 수 없다. 회사를 탄탄하게 자리잡게 해준 작품이었다. 언론시사 끝나고 뒤풀이하면서 스코어 맞히기를 했는데, 신현준 배우가 130만명, 강제규 감독이 110만명을 썼고, 나머지는 다 100만명이 안 되는 숫자를 썼다. 멀티플렉스가 CGV강변 지점 하나 있을 때였고, 극장도 21개관 정도에서 개봉했는데 580만명이 들었으니 대성공이었다. 매일 기록이 경신되고 행사가 이어졌는데도 영화가 잘되니 바쁜데도 힘든 줄 모르겠더라. 마냥 재밌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그런데, IMF 구제금융 시기라 ‘<타이타닉> 보면 외화가 나간다, <쉬리>를 보자’는 애국심 마케팅도 이용했다. (웃음)
-홍보마케팅사로서는 가장 떠올리기 싫은 순간도 올댓시네마가 보유하고 있다. <제5원소>(1997) 사례는 전설이 되었으니 이 자리에서 다시 듣는 것도 좋겠다.
=<제5원소> 때 수입사가 임의로 장면을 편집했고 감독은 몰랐다. 그 질문은 자제해달라고 부탁을 드리기도 했는데, 그걸 어디 막을 수가 있나. 기자회견장에서 그 질문이 나온 거다. 그때 통역하는 분이 당황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프랑스어 하는 기자 분이 옆에서 통역을 했고, 뤽 베송 감독이 자리를 떴다. 그날 감독이 묵은 신라호텔에 가서 새벽까지 대기했는데, 결국 감독의 화가 안 풀렸고 잡혀 있던 인터뷰 일정도 다 취소됐다. 홍보 담당자로는 제일 진땀 빼는 순간이었다. 그게 이슈가 되면서 흥행은 잘됐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노이즈 마케팅’으로 이용된 경우기도 한데, 그런 방식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지금도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긴 시간을 거치는 동안 업계에서 체감하는 변화는 무엇인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어떤 사안에 대해서 홍보마케팅이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일주일 정도였다면 지금은 ‘실시간’이다. 영화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이 그 속도로 움직이니 홍보마케팅도 발빠르게 대응해야 한다. 플랫폼의 다변화, 온라인 매체 다변화, 1인 매체의 증가, SNS 평가 등이 그만큼 많아졌고 중요해졌다. 과거에 우리가 내세우고 싶은 장점을 최대한 부각하는 쪽으로만 초점이 맞춰졌다면 지금은 정보가 워낙 빠르니 그렇게 해서는 금방 들통난다. 영화의 본질과 재미를 바꾸지 않는 선에서 홍보 문구에도 점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간 올댓시네마를 거쳐 독립하거나 이직한 직원들이 영화 홍보마케팅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홍보마케팅사의 사관학교’라는 수식이 어색하지 않다.
=초창기 3명으로 시작해 이제는 10명 정도 규모를 유지한다. 규모가 크면 같은 시기에 개봉하는 영화를 의뢰받는 일이 생기는데, 우리 회사에서 동시에 진행해 회사 안에서 서로 경쟁을 자제하려는 의도도 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경력사원을 뽑은 적이 없다는 거다. 사회 전반적으로 특정 전문 분야에 노하우가 쌓여야 채용이 되는 분위기인데 그러면 새로운 인력이 유입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항상 신입사원을 뽑아서 그 친구들이 단계를 거쳐서 승진하는 방식으로 직원을 관리했다. 윗급이 나가도 그 원칙을 적용했다. 우리회사 아니라도 영화계에 이런 분위기가 축적됐으면 한다.
-활발히 활동하던 대행사들이 제작 등 분야를 바꾸거나 그만두기도 했는데, 전문 홍보마케팅사로 올댓시네마가 그 자리를 지켜왔다는 데 대한 자부심도 있을 것 같다.
=또래 여성 제작자들이 성공할 때마다 ‘왜 채 대표는 제작 안 하냐’라는 질문을 받았던 것 같다. (웃음) 홍보마케팅사로 꾸준히 전문성을 쌓았다고 생각하는데도 다들 이렇게 인정을 안 해주나, 이 직업이 단순히 거쳐가는 업무라고 생각하나, 하는 생각에 오기가 생겨 ‘이것만 하겠다’고 답변했었다. 지금은 그 말이 진짜가 돼서 이 일만 하고 있는 거지. 그렇게 한길을 걷게 됐다. (웃음)
-여성영화인모임을 결성하고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활동을 하는 등 다양한 직책을 맡고 있다.
=홍보마케팅이 영화를 드러나게 하는 일이라면, 영화계에서는 ‘티 안나는’ 일을 한다. 여성영화인모임에서 하는 여성영화인 축제도 20주년을 맞는다.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로도 있는데, 영화인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업무를 한다. 거절을 잘 못하는 편이라 웬만하면 들어오는 일들을 다 하고 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