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해피엔드>, 쉼표와 침묵 사이, 처절한 부르주아 가족의 풍경
2019-07-11
글 : 김나희 (클래식음악평론가)
보이지 않는 것

한편의 영화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영화적 경험이란 과연 무엇일까? 미하일 하네케의 <해피엔드>는 지금껏 그가 선보여 온 모든 영화적 여정이 장면마다 담겨 있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몸 어딘가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겹다. 걷다가 이내 무릎이 뚝뚝 꺾일 것만 같다. 하네케는 이제 어디로 향할 것인가. 칸국제영화제에서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받은 <아무르>(2012) 이후 하네케는 모든 것으로부터 한뼘 더 거리를 두기로 결심한 듯싶다.

프랑스 북부지방은 역사적으로 영국과 인접해 양모가 수입되는 거점이었다. 근현대 국가로 기틀을 갖추기 전까지 오랫동안 릴을 비롯한 이 지역은 프랑스 왕조의 세력이 미치지 않았다. 오늘날의 벨기에, 네덜란드와 한데 묶여 플랑드르로 일컬어졌다. 수입된 영국산 양모가 바로 가공되면서 중세 직후 12세기부터 직물, 섬유산업의 중심지가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릴은 인구수로 프랑스에서 4번째에 불과하지만 가장 먼저 산업화가 이뤄진 도시이며, 그 결과 막대한 부를 축적한 신흥 부르주아 가문들이 출현한 곳이기도 하다(실제 LVMH(루이비통 모에 헤네시) 그룹의 본가도 이쪽 출신이다). 그룹의 대표 브랜드인 디오르, 겐조 정장의 제조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2000년대 중·후반, 물가가 싼 동유럽으로 공장들이 이전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칼레는 도버해협을 건너는 해저터널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벌써 20년 넘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유로스타(해저터널을 달리는 고속열차)가 런던과 파리 사이를 오간다. 유럽까지 긴 여정을 불사한 난민들은 최종 목적지인 영국에 도착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 해저터널을 건넌다. 자주 유로스타를 이용하는 승객들은 피부로 변화를 느끼고 있다. 2015년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연착과 사고로 인한 정차의 빈도가 잦아졌다. 철도회사에서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댈 뿐이다. 멧돼지 혹은 노루가 한밤중 해저터널 속 철로에 난입했다고 말이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으나 아무도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는다. 미디어도 보도하지 않는다. 난민보다는 멧돼지라고 하는 편이 조용히 넘어가는 더 나은 이유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의 우아한 시혜적 태도에 관하여

프랑스는 1789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세계인권선언문을 발표하며 인간의 천부인권을 명문화했지만, 1960년대까지 가장 오랫동안 식민지를 유지한 열강 중 하나였다. 제국주의 시대는 끝났다고 하지만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로 대표되는 북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은 여전하고, 오늘날 프랑스 곳곳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프랑스 귀족, 부르주아 계층의 수발을 드는 것은 여전히 이들의 영역이다. 피부색과 인종이 다른 이들이 더 낮은 계급에 존재한다. 공고한 계급적 장벽은 일상 곳곳에 놓인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경비원, 도우미, 택시/우버 기사, 배달부, 건물 청소부, 공사장 인부…. 단순 육체노동은 옛 식민지 출신자들의 몫으로 사회가 정해놓았는가, 하는 착각마저 든다. 서울에서 얼핏 외모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 조선족 인력을 마주할 때와는 다른 감정을 남긴다. 식민지를 벗어나 본국에서 일하고 돈을 버는 것이 나름의 특권이기에 이들을 고용한 프랑스인들은 우아한 시혜적 태도를 갖는다.

조르주(장 루이 트랭티냥)의 생일 파티에서 피에르(프란츠 로고스키)가 모로코 요리 타진을 나르는 경비원 라시드의 아내 자밀라를 ‘노예’로 지칭하며 요리 솜씨를 극찬한다. 피에르는 정말 별 뜻 없이 칭찬을 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인다. 파티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노예’라는 표현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다. 자밀라만이 어쩔 줄 몰라하며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셰퍼드에 물린 라시드의 딸을 찾은 앤(이자벨 위페르)은 고급 초콜릿 상자를 내밀며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다가 앞으로 가족들이 물리면 어떻게 되겠느냐며 개 단속을 여러 번 부탁한다. 노예제는 진작에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로랑 일가에게 있어 그들과 동일한 위치의 ‘인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가업을 이으며 앤이 운영하는 건설회사의 현장에서 난 사고로 피해를 본 가족들과 합의하는 장면에서는 잠시 눈을 감아야만 했다. 담당 변호사를 내세워 “민사적으로나 형사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도의적으로 지급하는 합의금”을 지불하는 방식이 우아하고 세련되며 너무나도 예의 바른 탓이었다. 차라리 천박하고 흉한 갑질이었다면 더 나았을까. 그 금액은 3만5천유로(약 4600만원)였다.

하네케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전작 <피아니스트>(2001)에서 다뤘던 가학적 성애에 대한 욕망 역시 이메일과 페이스북 메시지가 대신한다. 부르주아 출신의 토마스(마티외 카소비츠)가 클레르(불륜 상대)에게 우아한 표현으로 상대를 찬미하며 섹스에 대한 적당한 온도의 문장을 사용하는 반면, 클레르가 토마스에게 보내는 답장은 훨씬 직접적이고 뜨겁고 강렬한 쾌감, 가학적인 체위, 구체적인 섹스를 담고 있다. 결국 이메일을 받고 토마스는 다음날 일찍 집을 나선다. 구체적인 장면은 화면 바깥에 놓이게 된다. 전작 <아무르>를 연상케 하는 에피소드 역시 엿보인다. 수차례 자살을 시도해온, 여든이 훌쩍 넘은 할아버지 조르주는 회사 운영까지 관두고 지극정성으로 돌보던 아내를 견디다 못해 질식시켰다고 고백하고, 자살 시도 후 집에 돌아온 열두살 손녀 에브(팡틴 아흐뒤엥)는 여름 캠프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애의 음식에 몰래 진정제를 타먹여 점점 얌전해지는 모습을 지켜본 경험을 털어놓으며 화답한다.

외과의사 같은 응시

<해피엔드>의 미덕은 이 영화가 어떤 순간에도 뜨겁지도 서늘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하네케는 지독하리만치 거리를 유지하며 현대의 미디어, TV뉴스, SNS, 컴퓨터, 스마트폰을 통해 점점 더 고립되는 존재들을 환부를 바라보는 외과의처럼 응시할 뿐이다. 거기에는 강렬한 비명도 감정적 호소도 없다. 그저 보여주고 펼쳐놓을 뿐이다. 지금 바로 이 순간,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가차없는 현실이 그곳에 있다. 어린아이의 시선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하얀리본>(2009)이 연상되지만 <해피엔드>는 두번의 황금종려상 이후, 하네케가 지금까지 구현해온 영화적 세계를 마무리 짓는 가장 간결한 영화적 제스처로 보인다. 뼈만 남기겠다는 듯, 그는 미세한 침묵의 순간들을 눈부시게 활용한다.

쉼표로서 기능하는 침묵은 결코 닿을 수 없는 존재인 로랑가 인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정서적 거리를 대변한다. 영원히 가 닿지 않는 불완전한 소통만 행해진다. 침묵의 종류는 다양하다. 때로는 아주 짧게 스쳐가거나, 얼마쯤 지속되거나, 이따금 길게 이어진다. 하네케는 자유자재로 장면 곳곳에서 침묵을 사용한다. 음표 사이 존재하는 침묵 속에서, 아직 다 끝나지 않은 음악이 들려오는 것처럼, 이 쉼표들은 우리의 존재 깊은 곳으로 들어와 면도날처럼 사정없이 선득한 통증을 만든다. 통증으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동시에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에브가 스냅챗으로 우울증 환자인 엄마의 모습을 생중계하고 햄스터에게 약을 타 먹여 죽일 때, 앤이 숨어버린 피에르를 찾아가 하소연할 때, 토마스가 페이스북 메시지로 숨겨둔 성적 판타지를 이야기할 때, 에브가 휠체어를 탄 채로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조르주의 모습을 그저 비디오로 찍고만 있을 때, 파편처럼 흩어진 침묵이 우리를 상처내며 지나간다.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도 지독할 만큼 외롭고 불행한 인물들의 내면이 전해진다. 지독한 반어였던 <퍼니 게임>처럼, <해피엔드>라는 제목은 지독한 여운을 남긴다. 침묵 속에 배어있는 일상의 폭력과 극단적인 이기심은 쉽게 말해지거나, 들리거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아직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쉼표들에 실린 선명한 풍경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건너편에 놓인 우리에게까지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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