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장난감에 직접 생명을 부여한 <토이 스토리4>, 기본으로 돌아가기
2019-07-17
글 : 송경원
내가 나를 갱신할 때

<토이 스토리> 시리즈는 왜 부제를 달지 않을까. 4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그런 의문이 들었다. 3편까지는 그런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다. <토이 스토리>는 모두가 지나온 어린시절 한 페이지를 장난감에 투사한 성장 동화다. 영화마다 약간의 변주와 확장이 있긴 했어도 ‘아이들은 늘 장난감을 잃어버린다’라는 문장에서 출발한 상상이란 대전제만큼은 변함없었다. 굳이 과거형으로 표현한 것은 4편이 전작들과 결이 다른 세계관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무기질인 장난감에 ‘생명을 불어넣는 방식’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1, 2, 3편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시간에 대한 은유라면, 4편은 생명이 부여된 장난감들에 관한 직유다. 전자는 인간과 장난감의 관계를 통해서만 성립된다. 아이가 없으면 장난감도 의미가 없다. 후자는 장난감을 진짜 살아 있는 생물로 취급한다. 장난감 홀로 존재하는 독자적인 생태계가 꾸려지는 것이다. <토이 스토리4>는 전작의 여러 요소를 이어받아 출발하지만 사실상 전혀 다른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이야기인 셈이다.

태풍이 지나가고

<토이 스토리>의 네 번째 영화라는 게 <토이 스토리4>에 득이었을까, 실이었을까. 모든 속편은 전작들과 경쟁한다. 산업적으론 전작의 후광을 입고 유리한 출발선에 선 것처럼 보이지만 텍스트 중심으로 볼 땐 ‘팬들의 기대’라는 모래주머니를 몇개쯤 차고 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토이 스토리> 시리즈는 속편이 나올 때마다 전작들의 위상을 뛰어넘은 희귀한 경우다. 본래 속편은 전작의 흥행을 업고 이야기를 늘리는, 상업적 필요와 욕망의 산물이다. 최근 블록버스터들은 다음 작품을 위한 예고편 같은 행간을 미리 만들어두기도 하지만 시리즈가 속편으로 이어지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폐쇄적이다. 정확히는 하나의 이야기가 완결된 뒤에야 사후적으로 이야기를 덧대고 확장시킨다. 시리즈의 속편이 전작을 뛰어넘기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떻게 보면 이미 완결된 이야기에 다시 사족을 붙이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토이 스토리4>는 부제를 달아도 좋을 뻔했다. 아니, 부제가 필요한 영화였다. <토이 스토리4>는 앞선 시리즈를 전혀 모른다 해도 즐기는 데 큰 무리가 없는, 어떤 의미에서 전작들과 철저히 선을 긋는 영화다. 프랜차이즈로도 모자라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독특한 형태의 패키지 상품이 시장을 점령한 지금, 개별 영화로의 완결성을 중요시하는 ‘시리즈’의 귀환을 바라보는 건 어딘지 향수에 젖어드는 기분이다. <토이 스토리>가 9년이 흐른 뒤 굳이 다시 돌아온 첫 번째 이유는 이 좋은 소재를 놀려둘 수 없는 자본의 욕망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타당하지만 한편으론 게으르고 손쉬운 추측이다. (어쩌면 제작진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을) 디즈니-픽사의 내밀한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선 질문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왜 돌아왔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돌아왔느냐’로.

<토이 스토리4>가 위대한 전작들의 업적을 승계하는 방식은 시리즈의 속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리부트나 리메이크에 가까워 보인다. <토이 스토리4>의 변화를 보며 21세기 들어 디즈니가 박차를 가하고 있는 장편애니메이션의 실사화 프로젝트가 연상됐다. 나는 <토이 스토리4>의 매끈하고 안전한 귀환에서 최근 900만 관객을 돌파한 디즈니식 실사영화 <알라딘>의 그림자를 마주한다. <토이 스토리4>가 자신의 세계관을 확장, 변화시키는 방식은 곧 개봉할 존 파브로 감독의 <라이온 킹>의 예고장이 아닐까 싶은 예감도 든다. 그것이 뒤늦게 <토이 스토리4>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다. <토이 스토리4>에 만족한 사람의 열기와 실망한 사람들의 냉기가 부딪쳐 피어난 한 차례 폭풍은 이미 지나갔나 싶더니, 곧이어 디즈니 장편애니메이션 실사화의 정점을 찍을 <라이온 킹>이라는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는 중이다. 바야흐로 지금 우리는 디즈니라는 이름의 여름 한가운데 있다.

9년 동안 바뀐 것, 우디가 진짜 숨을 쉬다

애정은 원인과 결과가 역전된 감정이다. 이유가 있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마음이 먼저 생긴 후 그 당혹스러운 감정을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 이유를 찾아나서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건 감정과 인지 과정 사이 약간의 시간차가 끼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됐건 ‘반한다’는 사건이 발생하기 위해선 계기와 이유가 필요하다. 다만 그 이유란 것들이 때론 언어로 옮겨지지 않는, 찰나의 감각에 머물 때가 있다. 나는 <토이 스토리4>를 보자마자 반한 쪽 사람이다. 정확히 오프닝 시퀀스 중 빗속에서 보핍을 떠나보내는 우디의 모습을 보고 경탄했다. 우디는 새로운 주인에게 떠나게 된 보핍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넨다. 비를 막아주는 자동차 밑에서 보핍은 우디에게 지금 박스 안으로 몰래 들어오면 함께 떠날 수 있다고 권유한다. 하지만 자신을 찾는 앤디의 목소리에 우디는 동행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머문다. 사람들에게 들키기 전 다시 인형으로 돌아가는 우디의 모습으로 마무리되는가 싶더니, 다시금 눈동자가 아련하게 되살아나 보핍이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이 장면은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는 애니메이션의 어원을 문자 그대로 스크린 위에 안착시키는 결정적 순간이다. 약간 과장을 보태 <토이 스토리> 시리즈가 1995년 1편부터 2010년 3편까지 5년 동안 이뤄왔던 걸 2분 남짓한 장면에 압축시켰다고 해도 좋겠다.

보핍과의 이별을 결심한 짧은 순간, 우디는 세 가지 다른 층위의 연기를 한다. 첫째, 살아 움직이는 장난감으로서의 우디가 있다. 다음으로 살아 있지만 움직일 수 없는 인형을 연기하는 우디가 있다. 마지막으로 헝겊과 천과 플라스틱으로 이뤄진 무생물 인형 우디가 있다. 2, 3초에 불과한 시간 동안 우디는 애잔한 눈빛으로 이별을 맞이하는 연인부터 빗물에 약간 숨이 죽은 인형까지 넓은 스펙트럼의 표현을 넘나든다. 무기질 인형의 가슴이 부풀어 오르며 숨이 들어가는 순간 생명의 부피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다시 순식간에 딱딱해졌다가 이내 축 처지는 일련의 연결은 마법과도 같다. 그 어떤 길고 자세한 설명보다 인형이 살아 있다는 걸 확실하게 증명할 눈 앞의 근거. <토이 스토리> 1편에서 77분 동안 관객을 설득했던 작업을 9년이 지난 지금, 단 몇초 만에 완료하는 것이다.

포토그래픽 시네마는 그래픽 시네마의 정밀함을 진즉에 뛰어넘었다. <토이 스토리> 1편이 나올 때만 해도 표현의 한계 때문에 일부러 틴 토이 장난감을 소재로 선택했지만 <토이 스토리4>에서는 인형, 솜, 도자기 같은 질감을 선택해 ‘연기’한다. <토이 스토리4>의 오프닝을 굳이 세찬 비 내리는 밤에 하는 이유는 컴퓨터그래픽(CG)으로 여기까지 구현 가능하다는 일종의 과시다. 이후 골동품점의 ‘드래곤’으로 불리는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인형 세계에 떨어진 포토 리얼리틱한 존재들, 존 파브로 감독의 <정글북>이 이미 증명했고, 곧 공개될 <라이온 킹>이 예고하듯 이제 CG는 사진의 질감을 얼마든지 재현할 수 있다. 표현의 범주 차원에서 놓고 보자면 사진적 리얼리즘은 선택 사항 중 하나일 뿐이다. 우디가 때때로 인형을 연기하듯 CG애니메이션은 필요할 때 사진을 흉내낸다. 초창기 사진을 기반으로 한 포토그래픽 시네마가 확보했던 리얼함과 경이로움의 진정한 계승자는 현 시점에선 실사영화가 아니라 CG애니메이션이다.

그렇다면 포토그래픽 시네마와 그래픽 시네마를 구분 짓는 것은 무엇인가. 요컨대 <어벤져스>의 CG와 <정글북>의 CG, <토이 스토리4>의 CG는 무엇이 다르기에 우리는 이 세 가지를 구별하는가. 이건 표현의 차이라기보다는 지향의 차이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의 차이. 사진도, CG도 기술 탄생의 초창기에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기술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 가능성이 아니라 방향과 의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언젠가 그래픽 시네마가 포토그래픽 시네마를 대체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럴 수 없다’고 믿는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포토그래픽 시네마, 그러니까 실사영화의 미학은 관습과 축적에서 비롯된다. 영화가 100년의 역사 동안 쌓아온 지표들이 있는 한 클래식 시네마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다. 애니메이션 역시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특정한 양식으로 학습되어왔다. 세세한 결을 따지자면 무수히 많은 갈래가 있겠지만 무기물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이야말로 애니메이션의 지향이다. 요컨대 그림이, 동물이, 사진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 또는 살아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 그게 애니메이션의 본령이다.

<어벤져스>는 CG의 힘을 빌린 실사영화다. 거의 90% 이상이 CG라고 해도 그 목적지는 사진의 리얼함에 있다. <정글북>(곧 개봉할 <라이온 킹> 역시)은 실사를 모방한 애니메이션이다. 사진보다 더 사진 같은 리얼함을 선사한다고 해도 동물이 입을 떼고 의인화된 순간부터 그것의 방향은 애니메이션을 향한다. <토이 스토리4>는 두말할 것 없이 애니메이션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인형이 살아 있다는 상상’을 공감시키기 위해 긴 스토리텔링이 필요했던 과거에 비해 훨씬 압축적이고 감각적으로, 애니메이션의 본질에 근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형으로서의 우디와 인형을 연기하는 우디가 구분되는 순간, 살아 있는 존재로서 우디의 눈동자에 감도는 생기(生氣)는 압도적인 설득력을 얻는다. 물론 여기엔 디즈니의 물량공세, 그러니까 디테일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확대해야 겨우 보이는 보핍의 치마 보푸라기까지도 일일이 구현해 낸 이미지는 사실적인 질감의 근거가 된다. 다만 리얼리티를 향한 디즈니의 집착은 과거의 그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초창기 CG가 어떻게든 사진을 닮아야 한다는 강박에 묶여 있었다면 이제는 그 사슬에서 벗어나 무엇을 닮아야 할 것인지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마치 ‘아이들의 인형’에서 ‘살아 있는 생명체’로의 삶을 선택한 우디처럼 말이다.

훼손이냐, 확장이냐. 이제 디즈니의 적은 디즈니다

<토이 스토리3>가 특별했던 건 세계관의 마침표를 찍었기 때문이다. 1편이 ‘아이들은 늘 장난감을 잃어버린다’는 것에서 상상을 출발시켰다면, 2편은 그걸 엔터테인먼트적으로 무한히 확장했고, 3편에 이르러 ‘장난감들의 세상’이 어떤 식으로 이뤄져 있는지 답을 내렸다. 3편의 오프닝에서 우디와 친구들이 선보이는 기차 강탈 시퀀스는 서부극에서부터 <스타워즈>까지 여러 영화에 헌사를 바치는 멋진 장면이다. 엔딩에 이르면 엄마가 찍어준 캠코더 영상을 통해 그 즐거웠던 놀이가 실은 앤디가 방에서 혼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순간이었다는 걸 알려준다. 장난감이 살아 움직이는 건 어디까지나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 이뤄진 일이었다고 선을 긋는 것이다. 그 순간 우디의 모험은 곧 앤디의 성장을 비춘 거울 또는 상징이 되고 덕분에 관객 모두가 지나온 각자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며 보편타당하게 스며든다. 실로 정답 같은 동화적 상상력이다.

좋은 작품일수록 시작과 끝은 항상 연결되어 있다. 방향을 제시하고, 정체성을 세우고, 질문을 수거하는 것. 이게 간단해 보이지만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토이 스토리> 시리즈는 3편에서 진짜 엔딩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한, 어떤 것이 덧붙여져도 사족이나 후일담에 불과하다. 때문에 <토이 스토리4>는 전작들이 쌓아온 대전제에서 탈주한다. 장난감을 상상의 산물로 남겨두는 대신 진짜 살아 움직이는 대상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이건 어떤 측면에서는 장난감의 존재 의의를 뒤집는, 관점의 전환이다. 그동안 <토이 스토리>는 장난감과 아이의 ‘관계’ 속에서 유지되었다. 아이들에게 장난감은, 장난감에게 아이들은 어떤 의미인지, 그리하여 ‘장난감’으로 상징되는 어린 시절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이야말로 <토이 스토리>의 심장이었다. 그런데 <토이 스토리4>는 장난감 대신 ‘생명’에 방점을 찍고 달려나간다. 같은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전작의 서사를 이어받았다 해도 이미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다. 영화의 호불호도 이걸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로 갈린다.

만약 <토이 스토리4> 오프닝에서 우디에게 숨결이 들어가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면 나 역시 고개를 갸우뚱거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한 장면만으로도 나는 우디가 살있다고 느꼈고, 그것이야말로 현 시점에 애니메이션이 당도한 장소라고 생각한다. 사진을 뛰어넘은 CG애니메이션의 기술력은 본래 의도와는 무관하게 애니메이션이 오래전부터 간직했던 힘을 회복시켰다. 서사에 기대지 않고도 직관적으로 생명을 부여하는 힘. 덕분에 <토이 스토리> 시리즈 내내 찜찜했던 구석에 대한 질문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토이 스토리>의 장난감들은 아이와 함께 노는 것이 존재의 의의다. 그것이 불가능해졌을 때 장난감에 주어지는 길은 두 가지뿐이다. 벽장 안에서 조용히 잊히든지, 아이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삐뚤어지든지. 관점에 따라 종속된 관계라고 할 수도 있다. 보핍이 발견하고 우디가 선택한 길은 그 사슬을 끊고, 누군가의 장난감에서 살아 있는 주체로 거듭나는 삶이다. ‘삶’이라는 문자 그대로, 살아가는 시간 그 자체라고 해도 좋겠다. 화면 위에 머무는 생명. 애니메이션의 꿈이자 본질.

한편 <토이 스토리4>가 디즈니의 전형적인 의인화 방식을 채택했다는 것도 반드시 거론되어야 할 지점이다. 디즈니는 복잡한 상징을 깔아놓거나 사물의 속성을 연구하는 일을 하는데 서툴다. 픽사가 ‘아이들이 장난감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에서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경험했을 상상의 틈새를 발견한다면, 디즈니는 대상에 인간의 속성을 1차원적으로 투사해서 인간처럼 보이도록 만들어버리는 데 익숙하다. <토이 스토리3>로부터 9년이 흐르는 동안 이제 픽사와 디즈니는 완전히 하나가 된 것 같다. 굳이 말하자면 디즈니를 베이스로 픽사의 장점들이 완전히 소화되었다. 몇몇 발상이나 디테일에 픽사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토이 스토리4>는 90년대 중반 극장 장편애니메이션을 왕성하게 제작하던 디즈니가 선보일 법한 결과물에 가깝다. 그것은 관계와 서사에서 파생되는 상징성보다는 보이는 그대로인 직관의 세계다.

<토이 스토리4>를 보며 문득 1994년 <라이온 킹>이 떠올랐다. 심바가 삼촌이자 악역인 스카와 대립하는 건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심바가 속한 프라이드 록과 본질적으로 충돌하는 것은 실은 티몬과 품바의 하쿠나 마타타다. 프라이드 록이 수직과 지배의 세계라면 하쿠나 마타타는 수평과 무소유의 세계다. <라이온 킹>은 프라이드 록에 속했던 심바가 잠시 하쿠나 마타타로 도피했다가 다시 귀환하는 이야기다. 이걸 고스란히 <토이 스토리4>에 적용해보면 우디와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건 개비개비이고 대립하는 건 보핍이다. 본래라면 우디는 잠시 보핍의 세계에 머물 수 있어도 어떻게든 개비개비의 세계, 그러니까 아이들의 사랑을 갈구하는 자리로 되돌아가야 마땅하다. 하지만 <토이 스토리4>는 우디를 보핍의 세계로 보내준다. 비유하자면 심바가 하쿠나 마타타의 세계를 선택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현재 디즈니가 자기 자신을 갱신하는 방식이다.

선의가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 것처럼 의도와 무관하게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디즈니 왕국은 자신들이 쌓아 놓은 왕국의 재료 안에서 필요한 것을 선별하고 재조합한 뒤 시대가 요구하는 (관객이 선호할 만한) 방향으로 수정하는 데는 철두철미하다. 그 전체를 긍정하는 건 아니다. 다만 포토그래픽과 그래픽의 경계가 무너지고 이미지에 직접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기술력이 확보된 지금, 디즈니식의 의인화는 ‘움직이는 그림’(moving picture)이라는 오래된 미래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안티(Anti) 디즈니였던 드림웍스가 사라지고 비욘드(Beyond) 디즈니라 불리던 픽사를 흡수한 뒤 결국 다시 디즈니만 남았다. 이제 자신의 과거와 싸울 수밖에 없는 디즈니는 기본으로 돌아가 오래된 미래들을 하나씩 현재로 불러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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