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의 그럴싸함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미국 코믹북 슈퍼히어로들이 대부분 그렇듯, 스파이더맨은 그럴싸함과 거리가 먼 존재이다. 방사능에 감염된 거미에 물린 뒤 거미의 능력을 물려받아 벽과 천장을 곤충처럼 붙어 돌아다닌다. 초등학생 수준의 과학지식만 있어도 이게 인간 크기의 동물에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 것이다. 직접 만든 유니폼을 입고 있다면 더욱더 그렇다. 수명이 긴 프랜차이즈가 대부분 그렇듯, 여기에도 그럴싸한 설명을 다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그래도 말이 안 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이더맨에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판타지와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그럴싸함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웹 스윙잉이다. 슈퍼맨은 그냥 하늘을 난다. 어떻게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난다. 퇴근 시간 지하철 안에 갇혀 있을 때는 부럽기 짝이 없는 능력이지만 전혀 감이 안 온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의 웹 스윙잉은 감이 온다. 스파이더맨은 정체불명의 능력으로 나는 게 아니다. 중력을 받아 떨어지면서 비상한다. 한마디로 날기 위해 중력이 필요한 영웅이다. 물론 여기서도 따지면 말이 안 되는 것투성이지만 그래도 이 개념엔 현실 물리학의 기반이 있다.
물리학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현실적인
그럴싸한 현실성은 스파이더맨이라는 슈퍼히어로의 개성에서 빠질 수 없는 기반이다. 물리학만 그런 게 아니다. 사회적 배경도 그렇다. 피터 파커는 어처구니없는 능력에도 불구하고 초능력이 없는 영웅인 브루스 웨인보다 훨씬 독자에게 가깝게 느껴지는 인물이다. 돈도, 사회적 안정망도 없다. 능력있는 과학자이고 똑똑한 젊은이지만 운이 좋은 편은 아니다. 피터는 대체로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고 종종 우리보다 힘든 난관에 빠지며 늘 불만에 차 있다. 유니폼을 입고 슈퍼히어로 액션을 할 때는 우리의 소망성취를 그럴싸하게 만족시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한 삶에 친근감이 느껴지는 남자이고 그게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매력이다.
세상에 원래 모습을 그대로 수호해야 하는 것은 없다. 세월이 흐르면 익숙한 캐릭터의 매력에 질리기도 하고 다른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다.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수정도 해야 한다. 요새 25편을 찍고 있는 제임스 본드만 해도 반세기 넘는 동안 캐릭터가 많이 바뀌었다. 궁금하면 숀 코너리가 나왔던 옛날 영화들을 보시라. 21세기에 그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멀쩡한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단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스파이더맨/피터 파커가 그 예에 들어가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나온 두 편의 MCU <스파이더맨> 영화가 재미가 없었다는 건 아니다. 이들 영화들은 아무리 심각하게 추락해도 고만고만한 선에서 멈추게 막아주는 하한선이 있다. 캐스팅도 좋은 편이고 새 캐릭터의 매력도 있다. 그리고 이번에도 벤 아저씨의 죽음으로 시작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이 논리적인 답변에도 불구하고 MCU의 <스파이더맨>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물론 MCU 자체다. 코믹북의 <스파이더맨>도 아주 독립적인 존재는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마블 유니버스의 다른 슈퍼히어로와 어울릴 수밖에 없고 심지어 어떤 때는 회사의 장벽을 넘어 DC 슈퍼히어로와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코믹북 유니버스는 MCU와는 달리 개별 슈퍼히어로에게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있는 공간을 준다. 여전히 스파이더맨이 지구 유일의 슈퍼히어로일 때가 가장 그럴싸하고 캐릭터와 이야기에 더 잘 맞겠지만 그와 비슷한 환경은 조성되는 것이다. MCU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아니, 가능하긴 하다. 최근작 <블랙팬서>와 <캡틴 마블>은 혼자만의 이야기를 확보했었다. 하지만 이들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MCU의 큰 흐름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MCU의 피터 파커에겐 그런 사치를 누릴 여유가 없다. 처음부터 토니 스타크의 스토리에 묻혀 시작했고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지구 생물의 절반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어처구니없는 대사건을 겪었다. 이 상황에서 <스파이더맨> 이야기가 성장물에 어울리는 무게를 확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지금 하는 이야기가 스파이더맨의 이야기이긴 한가? 이번 영화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의 악당인 미스테리오는 무척 스파이더맨스러운 악당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토니 스타크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토니 스타크가 만든 악당이고 이 영화의 설정만 본다면 <아이언맨4> 같은 영화에 더 잘 어울린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와 소재를 보자. 미디어 조작, 가짜 뉴스, 인공지능, 첨단기술의 위험성. 이들은 모두 중요한 주제이고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들은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에서도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들은 모두 토니 스타크와 연결되어 있다. 모두 토니 스타크가 만들었거나 강탈한 기술이다. 여기서 아무리 날고 뛰어도 스파이더맨은 조연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아이언맨>의 이야기이고, 굳이 하고 싶다면 <아이언하트>에서 할 이야기다.
이것은 단순히 <스파이더맨>의 이야기가 <아이언맨>에 먹혔다는 문제 이상이다. 이는 스파이더맨/피터 파커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을 깨트린다. 영웅이 되자마자 토니 스타크의 부름을 받고 스타크사에서 만든 최첨단 슈트(들)를 입고 있고 토니 스타크가 만든 최첨단 시스템을 운용할 열쇠를 쥐고 있고 틈만 나면 쉴드의 부름을 받는 피터 파커가 과연 피터 파커로 성장할 수 있을까? 만약 이전 <스파이더맨>의 설정을 그대로 취했다면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끝에 나오는 쿠키 1번은 대재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서 뭐?”란 생각밖에 안 든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스파이더맨의 정체를 알고 있고 굳이 정체를 숨길 필요도 없는 거 같고 숨겨야 한다면 얼마든지 주변 어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MCU의 상황에서 뭐 어쩌라는 건가?
‘막대한 유산’이라는 딜레마
지금 상황에서 가장 끔찍한 미래는 스파이더맨이 스타크사라는 대기업의 구사대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게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오싹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지금의 스파이더맨이 원작의 원류로 돌아간다면 그 역시 비현실적인 일이 된다. 어마어마한 유산을 포기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사치스러운 행위이다. MCU 피터 파커는 괴상할 정도로 운이 좋은 아이이고 당연히 고민은 얇고 가볍다. 심지어 이제는 비상하기 위해 중력이 필요치 않아 보인다. 하긴 아이언맨 테크놀로지로 슈트를 만들 수 있는데 굳이 비능률적인 웹 스윙잉을 할 필요는 없으리라.
이에 대한 가장 논리적인 답은 마블 우주에서 스파이더맨이 아무리 인기 있고 비중이 큰 주인공이라고 해도 굳이 MCU에서도 그럴 필요가 없으며, 이 큰 스토리에서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노동자계급 슈퍼히어로 대신 죽은 조만장자의 유산을 물려받은 운좋은 철부지 아이가 더 어울린다면 어쩔 수 없이 그걸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겐 이게 썩 그럴싸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걸 좋아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이게 아이언하트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를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