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극장가 여름영화 대전의 서막이 올랐다. 7월 17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라이온 킹>이 개봉한 데 이어 7월 24일 <나랏말싸미>, 7월 31일 <사자>와 <엑시트>, 8월 7일 <봉오동 전투>가 차례로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이 지면에서는 지난 7월 15일 언론에 첫 공개된 올해 여름영화 대전의 첫 번째 한국영화 주자 <나랏말싸미>에 대한 소식을 전한다. <황산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평양성> <사도> 등 이준익 감독 영화의 기획, 제작, 각본가로 잘 알려진 조철현 감독의 장편 연출 데뷔작인 <나랏말싸미>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 영화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탄생한 한글 창제 과정에 스님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이 영화의 가설은 생경하면서도 흥미롭다. 화려하고 현란한 여름 대작의 향연 가운데 담백하고 진중한 필치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나랏말싸미>는 무엇보다 영화에 참여한 제작진의 진정성이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다. 주요 키 스탭, 영화사 두둥의 오승현 대표와 류성희 미술감독, 김태경 촬영감독, 심현섭 의상실장으로부터 영화의 제작 과정에 대한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세종대왕, 스님과 손잡고 한글을 만들다
“왜 문자를 만들려 하십니까?” “망하지 않으려고.” 영화 <나랏말싸미> 속 신미 스님(박해일)과 세종대왕(송강호)의 대화다. 세종대왕에게 새로운 문자란 권력층의 독점을 타파할 수 있는 무기이자, 모두가 평등하게 정보를 공유하는 멋진 신세계로 가기 위한 열쇠였다. <나랏말싸미>는 세종대왕의 수많은 업적 중 한글 창제에 얽힌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영화다. 소리문자를 채집하고 분류하며 압축해 마침내 새로운 언어를 탄생시키는 장인으로서의 세종대왕과 신미 스님의 여정을 진중한 필치로 다루고 있다는 데 이 영화의 대담함이 있다. “이 땅 오천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취는 팔만대장경과 훈민정음”이라고 생각했다는 조철현 감독은 15년 전부터 한민족의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영화로 구현할 방법을 찾아왔다. “한글연구회, 누리글연구원 등 한글을 연구하는 다양한 단체들을 찾아다녔다. 없는 살림에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바탕으로 한 역사소설 <초정리 편지>의 판권을 구입하기도 했다.” 영화 <아나키스트>의 기획자와 연출부로 만나 20여년간 조철현 감독과 인연을 이어온 영화사 두둥의 오승현 대표의 소회다. 한글 창제 기록의 행간에서 드라마를 찾아헤매던 조철현 감독을 사로잡은 건 조선시대에 실존했다는 신미 스님의 존재였다. 숭유억불 정책을 가장 강하게 펼쳤던 세종대왕은 죽기 전 유언으로 신미 스님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나라를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한, 지혜를 깨우쳐 반열에 오른 분)이란 법호를 내렸다. 또 조선시대의 문신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훈민정음과 산스크리트어(불경을 기록한 문자)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으로부터 조철현 감독은 유교국가 조선의 왕 세종대왕이 스님과 손을 잡고 한글을 만들었다는 상상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유교 vs 불교, 세종대왕 vs 신미 스님
<나랏말싸미>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 건국으로부터 50여년이 지난 시기다. 고려는 멸망했으나 아직까지 조선 특유의 문화가 완전히 정착되지는 못한, 혼란의 시대다. 이러한 시대상은 극중 인물이 입는 옷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심현섭 의상실장은 “왕이나 대신들의 옷은 명나라의 영향을 받아 조선 초기식 의상으로 표현했고, 다른 등장인물들의 옷은 고려 말 조선 초의 특성이 혼용된 느낌을 주려 했다”고 말한다. 극중 조선의 유교 문화와 고려의 영향을 받은 불교 문화는 각각 세종대왕과 신미 스님의 공간을 통해 대비적으로 표현된다. 김태경 촬영감독은 “유교를 대표하는 왕의 공간은 대부분 세트였고, 불교를 대변하는 신미 스님의 공간은 거의 로케이션”이었기에 두 인물이 머무는 공간의 결을 다르게 담아내려 노력했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공간은 소박하면서도 중후하고 품격 있는 느낌으로 완성됐다. “역사적 자료를 보니 세종대왕과 그의 두 아들 안평대군, 수양대군이 향유했던 문화의 수준이 굉장히 높았다. 그래서 튀지 않으면서도 최고의 심미안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강녕전(왕의 침전)에 놓인 도자기의 제작을 장인에게 맡기고 현대 동양화 작가들에게 <일월오봉도> 작업을 의뢰했으며 가구를 만들 때에도 기하학적 특성을 살렸다”고 류성희 미술감독은 말한다. 로케이션 촬영이 많았던 신미 스님의 공간은 왕의 공간과 대조적으로 열려 있고 꾸밈없는 느낌으로 표현했다.
조선에서 숭유억불 정책을 가장 강하게 펼쳤던 세종대왕과 그 정책으로 인해 역적의 자식이 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신미 스님은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문화를 향유하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설전은 <나랏말싸미>의 핵심적인 묘미다. 배우 송강호가 표현하는 왕의 관록과 박해일이 구현한 스님의 절도는 영화의 드라마를 한층 풍성하게 만든다. “세종대왕 영화를 만들면서 송강호 선배님에게 시나리오를 드리지 않는 제작자가 있을까 싶다. 당신은 앞서 <사도>의 영조를 연기한 적이 있기에 또 다른 왕의 모습을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이 깊으셨던 듯하다. 그럼에도 ‘한글 창제에 대한 영화는 쉽게 생각해서 찍을 작품은 아니지만, 그 예술적 가치는 오래 남을 것’이라며 ‘신중을 기해 한번 만들어보자’고 답변을 주셨다. 영화 속 선배님의 연기를 보면 ’최고의 배우’라는 수식어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박해일씨는 배우로서 연기력의 폭이나 진중함을 떠올렸을 때 신미 스님에 적역이라고 생각했다. 본인도 언젠가 한번 제대로 스님을 연기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읽고 흔쾌히 응해줬다.”(오승현 대표)
한지, 제1의 영화적 공간
“훈민정음이 위대한 글자라는 건 누구나 알지만, 디자인적 측면에서 이 언어가 얼마나 훌륭한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류성희 미술감독은 말한다. 이에 따라 <나랏말싸미>의 미술팀은 ‘한지’를 제1의 영화적 공간으로 정하고,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 종이 600여장에 훈민정음의 모티브가 되었을 글자를 채워나갔다. “기하학, 천문학, 불교, 유교 철학의 기본 원리를 반영한 도안을 만들었다. 영화를 보면 역사적으로 저런 자료가 남아있었나 싶을 테지만 대부분 상상의 결과물이다.” 미술팀이 설계한 도안은 <취화선>에 참여했던 서예가 이주영 선생이 다섯명으로 팀을 꾸려 밤낮으로 썼는데, 특히 미술팀은 도안을 창조하는 것뿐만 아니라 분류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훈민정음을 만들기 위해 한글, 한자만 본 것이 아니라 산스크리트어, 티베트, 파스파, 알파벳까지 살펴봤을 거라고 상상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세종대왕이 오늘날의 빅데이터 전문가와도 같은 인물이 아닌가 생각했다. 수많은 데이터를 모은 다음, 원칙을 분류하는 최고의 방법을 찾아낸 거다. 어느 날 갑자기 일필휘지로 글자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하니 숙연해졌다.” 류성희 미술감독은 이에 덧붙여 극중 인물들이 훈민정음의 모티브를 얻었을 법한 기하학적, 천문학적, 철학적, 시각적 느낌을 공간에도 반영하려 노력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궁의 창문이나 창살 하나에도 미술팀이 설계한 기하학적 패턴이 담겨 있다고.
계절감을 담은 의상
<나랏말싸미>는 사계절의 흐름을 모두 담은 영화다. 심현섭 의상실장은 이번 작품을 통해 “한국 사극영화에서 그동안 잘 표현되지 않았던 의상의 계절감을 구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계절감이 두드러지는 건 겨울 의상이다. “당시에 옷 만드는 소재가 다양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여름옷에 얇은 실크를 사용했다면 겨울옷에는 실크 안에 솜을 넣어 누비는 등 질감의 차이를 많이 두려고 했다.” 사극영화에서 으레 보는 레드, 블루 계열의 관복도 다채로운 색감을 자랑한다.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관리들이 본인의 집에서 관복을 지어 입었기 때문이라고 심현섭 의상실장은 설명한다. “돈이 좀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붉고 푸른 색감의 범위 내에서 더 화려하게 입었고, 청렴결백한 사람들은 소박하게 입었다. 레드, 블루에서 파생된 색만 30~40가지가 된다.” 또 주요 인물인 세종대왕의 의상은 소박하면서도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질감의 표현에 더욱 집중했으며, 신미 스님의 옷은 숭유억불 시대의 승려라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 회색보다 더 짙은 먹색의 승복으로 제작했다.
한국영화 최초로 담아낸 천년사찰의 고고한 아름다움
“시공을 초월한 역사의 공간을 담고 싶었다.”(오승현 대표) 험난한 로케이션 헌팅 과정을 감수하면서까지 <나랏말싸미> 제작진이 천년사찰에서 촬영을 진행하려 했던 이유다. 그중에서도 한국의 3대 사찰이자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극중 신미 스님이 머물던 곳이라는 설정으로, 이 작품을 통해 한국영화 최초로 공개된다. “표음문자의 비밀과 부처의 진리가 팔만대장경에 담겨 있다. 그런 이야기를 담는 영화의 공간이 가짜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오승현 대표는 말한다. 하지만 6개월 이상 문화재청과 조계종, 해인사에 로케이션 촬영을 요청했음에도 촬영 전날까지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지 않아 애간장이 탔고, 결국 제작사에서 모든 불상사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서약서를 쓰고서야 장경판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오직 촬영감독과 한명의 촬영팀원, 두명의 배우, 조감독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장경판전에서의 촬영은 “어떤 조명기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어 태양광만을 이용해”(김태경 촬영감독) 진행됐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빛의 방향성과 카메라 앵글, 구조물을 잘 담을 수 있는 카메라 세팅”을 고심한 촬영팀의 사투는 세월의 고고한 아름다움을 담은 영상으로 보상받은 듯하다. 더불어 촬영 허가가 쉽게 나지 않는 경복궁 근정전 신은 부안 세트장에서 촬영한 후 실제 근정전을 찍은 사진을 합성한 것이다, 촬영감독에 따르면 한국 사극영화에서 처음으로 시도해본 앵글이라고. 소헌왕후와 노승이 처음으로 만나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서의 장면도 “공간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에 압도되는 느낌이 있었다”고 김태경 촬영감독은 말했다. 그 밖에 안동 봉정사(극중 신미 스님이 훈민정음의 ‘모음’ 문자를 고심하던 장소다)와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천도재가 열리는 곡성 태안사 봉서암, 춘천 송광사 등의 사찰이 <나랏말싸미>의 주요 촬영지다.
소헌왕후와 고 전미선 배우의 품격
“진짜 대장부는 중전이시군요. 졸장부 둘을 다시 붙여놓고 가셨으니 말입니다.” 신미 스님이 세종대왕에게 건네는 말이다. 극중 자주 대립하며 멀어지는 두 남자를 돌려세우는 건 역적의 딸이자 왕비로서의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진 소헌왕후의 역할이다. 고 전미선 배우가 연기하는 소헌왕후는 “두 왕과 신미 스님을 가르치고 깨우치며, 궁의 여성들이 한글을 배우게 함으로써 궁중 여성들의 왕으로 바로 서는”(심현섭 의상실장), <나랏말싸미>의 중심축과도 같은 역할이었다고 다수의 제작진은 말한다. “단정하고 부드러운 소헌왕후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파스텔 계열의 색감을 많이 사용했다. 그럼에도 궁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장면에서는 왕으로서의 느낌을 주기 위해 콘트라스트를 줬다. 중전의 옷에도 흉배가 있는데, 역적의 딸로 부모를 비극적으로 잃고 구중궁궐에 머물고 있는 소헌왕후의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꽃과 외로운 새의 모습을 수놓았다”고 심현섭 의상실장은 말한다. 영화 후반부의 클라이맥스 장면으로, 소헌왕후를 제외한 대다수의 중심인물들이 참석한 천도재는 <나랏말싸미>의 제작진이 고 전미선 배우에게 바치는 경건한 제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주목! 뉴 페이스
<나랏말싸미>는 아직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나름의 개성을 지닌 매력적인 배우들을 다수 발견할 수 있는 영화다. “송강호, 박해일, 전미선 배우가 영화의 중심에서 든든하게 삼각축을 형성하고 계시니, 다른 배역으로는 이미 연기력은 갖춰졌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 그 시대에서 정말로 튀어나온 것 같은 인물을 캐스팅해보자는 생각이 주요했다”고 오승현 대표는 말한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배우는 신미 스님의 제자 학조 스님으로 등장하는 탕준상이다. 영화 초반부, 현란한 산스크리트어 능엄주로 팔만대장경을 달라며 찾아와 시위하는 일본 스님들의 기를 꺾는 학조의 모습은 많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법하다. “순수함과 장난기, 진지함을 두루 갖췄”(오승현 대표)기에 캐스팅된 탕준상 배우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주연배우답게 정확하면서도 리듬감 있는 발성으로 표음문자인 한글의 매력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또 학조와 함께 세종대왕 곁에서 훈민정음 창제를 돕는 중궁전 나인 진아 역의 금새록, 세종대왕의 걸출한 두 아들이자 신미 스님의 제자가 되는 수양대군, 안평대군 역의 차래형과 윤정일, 뛰어난 서예 실력을 갖췄으며 묵언 수행 중인 스님 학열로 등장해 웃음을 주는 임성재 배우가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