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미드소마> 매혹적인 공포에 대해서
2019-07-25
글 : 박지훈 (영화평론가)
기이함과 으스스함의 정체

* 영화의 일부 장면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는 글입니다.

으스스함이란 무엇인가? 으스스함의 작동 원리는 서스펜스의 작동 원리와는 반대된다. 서스펜스는 히치콕의 말처럼 폭탄이 터질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의자 밑 시한폭탄의 초침을 보여줄 때 발생한다. 즉 서스펜스는 관객에게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발생한다. 그러나 으스스함은 관객에게 정보를 제한함으로써 발생한다. 예컨대 <팔로우>(2014)에서 느껴지는 으스스함은 관객도 주인공을 따라다니는 존재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데서 발생한다. 만약 이 미지의 존재가 낱낱이 밝혀진다면, 더이상 으스스함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단지 해결해야 할 문제만이 남을 뿐이다.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의 저자 마크 피셔는 으스스함은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질문과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없어야 하는 때에 있는 무엇, 있어야 하는 때에 없는 무엇, 돌연한 나타남 혹은 사라짐과 같은 것들이 으스스한 것들이다. 아이라 레빈의 소설을 영화화한 <스텝포드 와이브스>(1975)를 예로 들어보자. <스텝포드 와이브스>는 스텝포드 마을로 이사 온 주인공이 주변의 여자들이 하나둘씩 이상하게 변하는 데 의문을 품게 되고, 남편들이 자신의 아내를 기계로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다. 이 영화는 처음에는 기계처럼 변한 여자들에게서 으스스함이 발견된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은 아닌 것 같은 불쾌함(uncanny)이 주는 으스스함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내를 기계로 바꾸는 남자들에게서 으스스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 남자들 또한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무엇이 부재한다는 점에서 기계와 다르지 않다(<스텝포드 와이브스>를 <겟 아웃>(2017)으로 바꿔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런 구조는 아이라 레빈의 대표작이며 1968년에 영화로 제작된 <악마의 씨>에서도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도 악마라는 미지의 존재(없어야 하는 때에 있는 무엇)가 으스스함을 자아내는 한편 여성을 악마의 제물로 바치려는 남편 또한 악마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으스스함을 자아낸다. 아이라 레빈의 으스스함은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가져야 할 특성이 결여(있어야 하는 때에 없는 무엇)되어 있는 존재들이 주는 느낌이다. <미드소마>의 초반부 으스스함도 호르가 마을 사람들에게 부재하는 무엇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나 <미드소마>는 으스스함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미드소마>는 으스스함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에 가깝다. 즉 <미드소마>는 공포영화가 아니라 공포에 대한 영화다. <미드소마>는 현대인의 공포를 이해하기 위해 양립할 수 없는 두 세계를 접촉시킨다. 하나의 세계는 도시라는 밤의 세계이며, 또 다른 세계는 스웨덴 어느 시골에 위치한 낮의 세계다. 밤의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크리스티안이며, 낮의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펠레다. 대니가 으스스함을 느끼는 세계는 죽은 부모와 동생이 있는 밤의 세계다. 대니가 절벽에서 공포에 질린 이유는 죽은 부모와 동생을, 즉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대니가 의지하는 크리스티안은 대니의 고통과 상실감을 보지 못한다. 대니의 불안과 공포는 대니의 고통과 상실감을 보지 못하는 크리스티안으로 인해 증폭된다. 크리스티안은 <스텝포드 와이브스> 혹은 <악마의 씨>에서 주인공의 공포와 불안을 무시하는 남편과 유사하다. 대니를 공포로 몰아가는 존재는 호르가 마을 사람이 아니라 크리스티안이며, 이렇게 볼 때 이 영화는 반전된 <악마의 씨>라고 볼 수 있다. 무서운 존재들, 즉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는 자들은 호르가 마을 사람들이 아니라 현대인이며, 그렇기에 이들은 서로를 무서워하는 자들이기도 하다.

보라, 고통을 수반하는 이 즐거움을

사실 <미드소마>는 으스스하기보다는 기이하다. 그렇다면 기이함이란 무엇인가? 기이한 것은 어울리지 않는 존재, 과도한 존재로 특징지어진다고 마크 피셔는 말한다. “너무 이상해서 여기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게” 하는 존재들이다. <미드소마>의 기이함을 설명하기 위해 절벽 신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두명의 노인이 절벽에서 자살한 뒤에 경악하는 주인공 일행에게 호르가 마을 주민은 생애 주기 끝에 다다른 사람이 맞이하는 공동체의 의식이라고 설명해준다. 단지 의식이 자살에 그친다면 이 의식은 비윤리적인, 하지만 이해가 가능한 영역에 있는 의식일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노인의 얼굴을 미리 준비해둔 나무망치로 으깨는 것은 이런 설명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과도한 것이다. 그리고 으깨지는 얼굴을 관객에게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 자체가 과도하며 기이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외에도 어울리지 않는 음악들, 과도한 침묵 혹은 절규는 모두 기이한 것들이다. 그러나 마크 피셔에 따르면 “기이한 것은 우리의 이해가 불충분했을 뿐”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호르가 마을 사람들을 이해하게 될 때 기이함은 어느 정도 사라지게 된다.

호르가 마을 사람들은 오직 자신밖에 보지 못하는 현대인과는 달리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호르가 마을 사람들의 신념과 연관 지어 노인의 얼굴을 망치로 내려친 행위의 의미를 추측해볼 수도 있다. 추측건대, 이 의식은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얼굴이라는 표상을 지워서 영혼을 공동체의 일부로 귀속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르가 마을 사람들의 신념을 이해한다고 해도 영화의 기이함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대니는 호르가 마을에 들어가기도 전에 자신의 몸이 수풀의 일부가 되는 환상을 보게 되고, 배우지도 않은 스웨덴어로 호르가 사람들과 소통하게 된다. 이처럼 영화는 초자연적인 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호르가 마을 사람들의 공감도 초자연적인 힘처럼 느껴진다. 호르가 마을의 여성들이 대니와 같이 슬퍼하며 오열할 때 이들은 대니의 아픔을 실제로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호르가 마을 사람들이 영화의 마지막 희생제의에서 희생자들처럼 울부짖는 것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제의가 축제의 일부라는 점에서 이 희생제의는 결국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고통을 수반하는 즐거움(주이상스)인 것이다. 그리고 이 즐거움은 <미드소마>를 보는 관객이 누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숨겨진 기이함이 여기에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마치 호르가 마을 사람들처럼 자신의 존재는 잠시 잊은 채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을 느끼고 같이 아파한다. 자신의 눈을 찌르는 오이디푸스왕을 보기 위해 극장에 갔을 수천년 전 사람들처럼 같이 아파하기 위해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미드소마>는 영화가 가진 기이한 매혹에 대한 비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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