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한국영화 기획개발지원사업의 도약을 내걸었다. 올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 ‘S#1’(씬 원) 기획개발전문역량강화지원센터는 단순히 지원금만 제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작업공간 및 네트워킹, 다양한 서비스를 추가 지원한다는 점에서 유기적이고 전문적인 관리 시스템을 지향한다.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과 함께 신인작가 20명을 선정하여 6개월간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시나리오 아카데미’, 극영화 15편, 다큐멘터리 7편을 선정해 4박5일 랩을 진행하는 ‘씬 원 랩’, 공모전에 선발된 작가들과 3일간 워크숍을 진행하는 ‘시나리오 공모전 작가 대상 멘토링 워크숍’, 기타 창작부가서비스(모니터링, 전문가 인터뷰, 법률서비스) 등 그 세부도 알차다. 이렇게 씬 원을 거쳐가는 작품들은 ‘씬 원 에이전시’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돼 제작·배급사 등과 비즈매칭의 기회도 얻는다. 그중 씬 원 시나리오 아카데미는 작법 교육과 산업 특강, 강사진과 함께 시나리오 한편을 완성하는 워크숍으로 구성된 씬 원의 중추 프로그램이다. 황조윤 작가(<광해, 왕이 된 남자> <살인자의 기억법>), 유영아 작가(<7번방의 선물> <형>), 그리고 김용균 감독(<더 웹툰: 예고살인> <불꽃처럼 나비처럼>), 한준희 감독(<차이나타운> <뺑반>)이 1기 강사진으로 참여한다. 한 사람당 5명의 교육생을 전담해 내년이면 총 20편의 새로운 시나리오를 세상에 내놓을 선배들은 지금 어떤 기대로 부풀어 있을까. 아카데미의 든든한 파수꾼이 될 두 사람, 황조윤·유영아 작가를 만나 씬 원의 첫 신에 대해 물었다 .
-황조윤 작가는 <창궐>(2018), 유영아 작가는 <82년생 김지영>(제작 중) 이후 어떻게 지내나.
=황조윤_ 잠시 쉬고 있다. 앞으로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짚고 넘어가려 한다. 최근 시장 상황을 보면 트렌드 분석을 통해서 기획된 ‘요 정도면 먹힐 거야’ 싶은 영화들의 성적이 좋지 않다. 2007년 무렵 한국영화의 거품이 꺼져갈 때의 느낌과 비슷하달까. 고민없이 막연하게 글만 쓸 게 아니라 질문이 필요한 때라고 느낀다. 시나리오 아카데미에서 만나는 후배들과도 이런 고민을 나누게 될 것 같다.
=유영아_ 모녀 이야기를 쓴 영화 <휴가>는 캐스팅 단계이고 지금은 새 드라마의 기초 작업을 하고 있다. ‘여자 버전의 <건축학개론>’이라고 할 수 있는 첫사랑 스토리다. <건축학개론>이나 <너의 결혼식>은 남자주인공의 시선이 중심이라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운 점들이 있었다. 2000년대 초반 대학 시절 여자주인공을 위주로 한번 써보려고 한다.
황조윤_ 갑자기 궁금한 게 있는데, 유 작가는 드라마와 영화를 병행하지 않나. 앞으로도 계속 지금의 시스템으로 갈 예정인가. 영화판이 전반적으로 루즈해진 위기 상황인데, 혼자 드라마쪽으로 도망가기 있나.(웃음)
유영아_ 아니, 처음부터 너무! (웃음) 사실은 영화계 상황이 좋지 않은데 드라마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해 질문을 굉장히 많이 받는다. 그렇지만 둘 중 무언가 하나를 선택하거나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아직 해본 적이 없다. 이야기의 호흡에 따라 드라마로 쓰고 싶은 게 있고 영화로 쓰고 싶은 게 있을 뿐이다. 영화의 경우 회사의 후배들이 잘 쓸 수 있게 프로그램을 구축하고 여러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싶다.
-영진위의 기획개발전문역량강화지원센터 씬 원 사업에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이 함께한다. 두분은 씬 원 내 시나리오 아카데미의 전임강사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새로 구축된 기획개발 지원 프로그램을 보면서 느낀 점은.
황조윤_ 기존에도 사설 학원은 꽤 있었고 수강생으로 강사로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나름의 좋은 기능이 있었다. 반면에 공식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는 대학에서는 시나리오학과가 빠르게 없어지는 추세다. 사설 교육기관을 찾아다니며 돈주고 배울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분들, 본격적으로 이 일에 자신의 인생을 던지려는 분들을 위한 공적 지원이 부재하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씬 원은 오로지 시나리오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작가들을 지원해주기 때문에 그간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또 산업적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다각도로 제작사와의 연결 등을 도울 것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다.
유영아_ 일단 부럽다. 아직 선발 과정 중이라 누가 될진 모르지만. 옛날에 혼자 작법서 끌어안고 직장 다니면서 사설 교육기관을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내 돈 내고 너무 힘들었는데, 이젠 영진위 차원에서 좋은 프로그램을 디자인해서 작가들에게 제공해주는 것 아닌가. 나는 그동안 내가 해온 실패에 대해 선배로서 경험을 공유하려 한다. 간절함과 유연함을 갖고 오면 멘토와 멘티로서 서로 시너지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좋은 프로그램이다.
-강의 커리큘럼은 강사 각자의 재량인가. 매주 특강 및 이론 강의와 실기 워크숍을 분할해 운영한다.
황조윤_ 씬 원 매니저인 백승재 작가님이 커리큘럼 초안을 만들었다. 4인 강사가 완전체로 만난 건 얼마 전인데, 일단 가안을 꾸려봤다. 이 일은 굳이 따지면 이론과 실기 중 실기가 월등하게 중요한 분야다. 물론 이론이 필요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고 당연히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야 최종 목적지까지 잘 도달할 수 있겠지. 6개월 동안 참가자마다 반드시 시나리오 한편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강점이기 때문에 비즈니스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작품 한편을, 즉 시작점을 만드는 데 목표를 두려고 한다.
유영아_ 황 작가님 말씀에 공감한다. 결국은 적용의 문제다. 이론은 알지만 그게 왜 내 시나리오에서는 잘 안 나오나, 하는 고민을 많이들 한다. 사실 나도 작법서를 많이 읽진 않았다. 로버트 맥기의 <스토리>처럼 누구나 읽는 책은 한번 읽어보기도 하고, 그때그때 탄성을 지르며 끄덕일 때도 있었지만, 지금의 내게 그 내용들이 중요하게 남아 있진않다. 어떤 후배가 작법서를 필사하고 있다기에 말린 적도 있다. 작법을 너무 잘 알면 지나치게 체계적이고 로지컬한 시나리오가 나와 재미가 반감되기도 한다. 최근 서점에도 스토리에 관한 좋은 이론서들이 많던데, 내 강의에 그 내용들을 직접적으로 가져오기보다는 용어를 점검하는 정도로 참고만 하려고 한다. 지금 내가 학생들에게 하려는 말이 정말 맞는 걸까 확인하는 차원에서.
-결국 글쓰기 이론을 가르친다기보다 선배로서 먼저 겪은 체험을 후배와 나눈다는 의미가 큰 자리인 것 같다.
황조윤_ 이를테면 누구나 가르치는 시나리오의 3막 구조 같은 것은 어쩌면 나보다 강의 들으러 오는 작가님들이 더 많이 알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체계가 내 글에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 체험한 경력은 내가 그들보다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 역할은 그걸 나눠주는 게 아닐까.
유영아_ 비슷하다. 가끔 후배 작가들의 시나리오 모니터링을 해주다보면 본능적으로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캐릭터에 어떤 관성이 생기겠구나 싶은 게 눈에 보인다. 내가 더 현명하고 더 많이 알아서가 아니라, 그동안 작업을 더 많이 해봤기 때문에 그렇다. 쓰는 사람은 원래 이야기에 갇혀서 잘 알 수가 없다. 모든 작가는 자기 글에 주관적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영진위 위촉 심사위원들이 1차로 심사하면 전임 강사진이 직접 20명을 선발한다. 최종심에서 작품을 선발할 때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둘 것 같나.
황조윤_ 사실 글을 다듬고 완성하는 과정은 시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선은 아이템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2차 심사까지 올라온 분들은 글쓰는 역량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나무를 잘 키우려면 씨가 어떤지 잘 봐야 하듯이, 발상에 초점을 두고 선발할 예정이다. 영화 투자사에 무수히 쏟아져 들어오는 시나리오들은 대체로 필력은 좋은데 발상이 아쉬운 경우가 많다.
유영아_ 나 역시 핸드폰에 메모해둔 여러 아이템이 있는데 그게 다 시나리오가 되지는 않더라. 1~2년 후에 다시 꺼내 보고는 물을 줘도 자랄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구나, 스스로 깨닫고 삭제하는 것도 많다. 면접이나 인터뷰에선 시나리오를 힘 있게 끌고 갈 수 있을지 밀도의 관점에서 작가들을 바라보려 한다. 투자사에서 반가워할 아이템은 분명 존재하지만 정작 시나리오가 개발되는 과정에서 밀도가 떨어져서 작품이 다른 종착역에 가 있는 경우들을 종종 본다. 그러나 코어가 있는 작가들은 견뎌낸다. 작품이 잘 안 풀려서 삶이 힘들고 우울해질 때도 그걸 견뎌내는 사람들이 있다. 짧은 인터뷰로 알아보긴 쉽지 않겠지만.
황조윤_ 그렇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주체는 작가 본인뿐이다. 아무래도 회사는 쉽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초반의 아이템이 좋았다 하더라도 계속 안 풀리는 것 같으면 ‘아, 이 이야긴 잘 안 되는구나’ 하고 놓아버린다. 작품의 초심을 흘려보내는 거지. 신인들은 아무래도 이런 외부의 흐름에 쉽게 휩쓸릴 수 있다. 그런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잘 잡아주는 게 선배들이 할 수 있는 역할 같다. 본인 혼자서만 이 과정을 견디는 건 시간도 많이 소요되고 어려운 작업이다.
-작가는 고독한 상태로 가난과 싸워야 하는 직업이다. 특히 시나리오작가들의 처우나 크레딧 표기 등 개선해야 할 고질적인 문제들도 많다. 커리어를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황조윤_ 성공하는 작가는 통계적으로 100명 중 1명이라고 한다. 유명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한마디로 바람이 확률을 넘어서는 그런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마냥 용기만을 주기는 어렵다. 그래서 내가 항상 얘기하는 게 있는데, 이 일이 정말 재밌는지 계속 질문을 해보라는 거다. 글쓰기는 사실 무척 고통스럽다. 사람들 사이에서 받는 상처도 크다. 정반합의 개념처럼 고통까지 포함해서 모두 다 재밌고 자신에게 자극이 된다고 느낄 수 있는지 계속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유영아_ 나는 이제 마흔 중반인데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여기저기 아프다. 작가는 혼자 일해야 하고 그 외로움과 늘 싸워야 한다. 장시간 앉아 있어야 하고, 글을 구상하는 머릿속 폴더가 항상 열려 있어야 하기 때문에 늘 예민한 주파수로 살아간다. 그래서 다들 힘들어하는 것일 터다. 아까 언급한 여성 시점의 첫사랑 이야기를 최근에 후배들과 산중 펜션에 들어가서 집중적으로 썼는데, 며칠 동안 새벽까지 잠도 안 자고 써서 러프한 신리스트를 뽑아내고 나니 기분이 정말 좋더라. 아직도 몸은 피곤하다. 그런데 다음 작품 쓸 생각하면 또 기분이 좋아진다.
-두분은 각자 언제 본인이 이 일을 재밌어한다고 확신을 가지게 됐나.
황조윤_ 딱 서른 무렵에. 상계동 교육원 다닐 시절이었는데 차비가 없어서 걸어다녔다. 햄버거를 씹으면서 인생에 대해 고민했다. 앞으로도 계속 떨어지면 정말 안 될 것 같은 시점이었다. 그때 생각하기를 이 일을 재밌어하는 건 확실한데 이 일 때문에 포기하는 일들이 많아지니까 그게 정말 괜찮을까 싶었다. 스스로에게 ‘정말 결혼 안 해도 돼? 회사 다닐래, 글 쓸래?’ 이런 질문을 했고, 계속 쓰자는 결론이 나왔다.
유영아_ 세상에 많은 호칭이 있고 많은 직업이 있는데, 나는 작가라는 호칭이 너무너무 좋다. 누가 나를 유영아 작가라고 불러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어려서부터 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장난감 같은 것도 별로 없었지만, 노트 하나만 있으면 내가 원하는 글을 쓰고 작가를 꿈꿀 수 있었다. 딸과 함께 먹고는 살아야 하니 직장 생활을 병행할 때도, 언제나 내가 듣고 싶었던 호칭은 작가다. 그래서 이 일을 하는 것 같다. 내가 지금도 여전히 작가로 불리고 있다는 게, 재밌고 기쁘다.
황조윤_ 맞다. 나도 그런 것 같다.
● 태은정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사업운영본부 지원사업운영팀 팀장 인터뷰
-기획개발전문역량강화지원센터라는 공식적인 명칭 대신 S#1(씬 원)이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는.
=창작자들이 모이는 공간인 만큼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딱딱한 분위기가 아니라 창의적이고 트렌디한 느낌을 주었으면 했다. 영화가 첫 번째 신에서 시작하듯이, 한국영화 창작이 이 공간에서 시작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올해 씬 원을 론칭하기까지 한국영화 기획개발에 관한 어떤 문제의식이 있었나.
=최근 한국영화계는 시나리오의 참신성과 다양성 부족, 특정 장르와 블록버스터 쏠림현상, 그리고 열악한 처우로 창작 인력들이 타 업계로 유출되는 현상 등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기획개발 단계에 대한 민간 투자가 위축되면서 공적인 지원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여기에 기존 영화진흥위원회가 운영했던 온라인 유통 플랫폼 한국영화 시나리오마켓은 운영 과정에서 표절과 도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계약 단계에서 신인작가들에 대한 직접적인 컨설팅과 케어가 어렵다는 한계도 있었고. 또 시나리오작가와 제작사, 감독의 적극적인 매칭을 지원하는 한편, 계약 단계에 대한 컨설팅 및 부가서비스 지원 등을 요구하는 의견도 수렴했다. 2017년부터 ‘한국영화 기획개발 활성화 기반 구축방안 연구’를 실시했고, 지난해에는 ‘시나리오 창작 TF’를 구성해 영화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했다. 올해는 부족한 부분을 개선해 씬 원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해 노력할 예정이다.
-성동구의 공유오피스에 자리잡은 씬 원의 공간이 앞으로 신진작가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할 듯하다.
=씬 원은 시나리오 아카데미가 운영되는 공간, 작가들이 와서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작업공간, 감독과 제작자를 포함한 다양한 영화인들이 와서 교류하고 소통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 강의와 회의를 위해 필요한 세미나실 1개(32인 수용), 회의실(2인용 1개, 4인용 4개, 6인용 3개), 행정실 및 창고, 그리고 나머지 공간은 카페처럼 쓸 수 있는 오픈 라운지 공간으로 구성했다. 우리가 임대한 공간 외에 공용 라운지와 더불어 층별로 마련되어 있는 라운지, 공용 회의실들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이 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