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데드 돈 다이>, 짐 자무시가 무릅쓰고 만든 정치영화
2019-08-14
글 : 이용철 (영화평론가)
전에 없던 일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근래 보리스나 (짐 자무시가 속한 그룹) 스퀴럴 같은 뮤지션의 아방가르드하고 실험적인 음악을 영화에 사용하던 짐 자무시는 신작에서 스퀴럴의 음악 사이로 스터질 심슨의 주제가를 여러 차례 삽입했다. 난데없을 까닭은 없다. 과거 사용했던 스크리밍 제이 호킨스와 톰 웨이츠 등의 노래와 컨트리음악은 같은 뿌리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만 심슨의 경력이 특이하다. 그는 가족, 종교, 국가관 면에서 보수적인 컨트리음악의 권력과 싸우는 인물이다. 컨트리뮤직 어워드 행사장 바깥에서 “(컨트리뮤직의 본산인) 내슈빌에 파시즘이 판친다”고 시위하는가 하면 ‘게이와 흑인의 인권과 생존 문제’를 거론한다. 현재 대통령을 두고 ‘파시스트 돼지 새끼’라고 서슴없이 욕하는 그는 <All Around You>의 뮤직비디오에서 분열과 무기의 왕인 트럼프에 맞서는 어린 슈퍼히어로를 등장시킨다. 삶의 태도만 그런 게 아니라 뮤지션으로서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노선을 취한다. 블루스 음악에 적극적이고 1980년대의 낭만적인 뉴웨이브 음악인 <The Promise>와 1990년대를 대표하는 너바나의 <In Bloom>을 뜻밖의 스타일로 부른다. 두 번째 앨범에 《Metamodern Sounds In Country Music》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자격이 충분한 가수다. 자무시는 이번에 가수들을 출연시킨 전력을 살려 심슨에게 ‘기타 좀비’라는 역할을 맡겼다. 그뿐 아니다, 젤다(틸다 스윈턴)가 우주선에 오르는 <데드 돈 다이>의 클라이맥스는 <Brace for Impact>의 뮤직비디오에서 그대로 따왔다. 이 노래가 수록된 심슨의 세 번째 앨범 《A Sailor’s Guide to Earth》는 길이라는 여정에 종종 항해의 이미지를 입혔던 자무시의 작업과 겹친다. 앨범의 재킷을 보노라면 자무시가 <리미츠 오브 컨트롤>(2009)에서 인용한 랭보의 <취한 배>가 저절로 연상될 판이다. 이번 작품에 출연한 톰 웨이츠나 이기팝처럼 자무시의 영화와 깊은 유대를 맺은 뮤지션은 여럿 있었지만, 이 정도면 좀 과하다 싶다. 자무시와 심슨은 각기 영화와 음악의 영지 입구에서 서성이는 인물이다. <데드 돈 다이>를 두 번째 본 날, 나는 그들의 교류를 내 마음대로 상상했다.

또 한편의 호러영화가 <데드 돈 다이>와 같은 날에 개봉했다. <사자>(2019)는 현대의 풍경으로 넘친다. 신의 사자는 세련된 옷에 오토바이와 고급 차를 몰고 초현대식 빌딩에 거주한다. 서울 강남의 화려한 클럽을 운영하는 악마의 후계자는 네온으로 장식된 복도를 지나 현대미술 같은 공간에서 악마를 숭배한다. 그러나 영화가 전개되는 방식이나 주제는 고전적인 호러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았다. 엄연한 신에게 의지한 주인공은 악과 싸워 물리치고, 하마터면 악에 덮일 뻔했던 세상은 굳건한 질서를 회복한다. <데드 돈 다이>는 완전한 몰락의 지점에서 끝난다. 좀비영화 특유의 집단 히스테리 같은 격렬한 감정적 반응도 없다. 느릿느릿한 속도의 자무시식 호러인 것이다. 처음 접했을 때는 <리미츠 오브 컨트롤>처럼 반복되는 농담의 거대한 집합체로 보였다. 그간 쌓아온 영화와 배우의 이력을 이번 작품의 재료로 삼은 듯했다. 전에 없던 일이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그냥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하이오주 북쪽 애크런에서 태어난 자무시는 10대 후반에 뉴욕으로 왔다. 영화에서 그는 애크런보다 조금 북쪽에 위치한 클리블랜드로 돌아가곤 했다. <천국보다 낯선>(1984)에서 뉴욕의 두 남자는 클리블랜드에 머무는 한 여자를 찾아간다. 바람이 심한 겨울, 그들 앞에 놓인 이리호는 형체가 너무 커서 어림잡을 수조차 없다. 눈에 덮여 하얗게 막막한 공간이 호수라 짐작할 뿐이다. 우울한 그들은 극중 천국으로 명명된 플로리다로 떠난다. 하지만 천국은 없고 그들은 각자 이방인으로 남는다. <데드 맨>(1995)의 남자는 클리블랜드의 이리호를 떠나 꿈을 좇아 서부의 세계로 향한다. 앙리 미쇼의 시구(죽은 이와는 여행하지 않는 것이 낫다)대로 그는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다. 호수에서 온 그는 ‘보트에 올랐던 때를 떠올리며’ 죽음의 바다를 항해한다. <데드 돈 다이>의 경관은 마을을 경유하는 세 청년이 클리블랜드에서 왔을 거라고 짐작한다. 이제 그들에게 천국이나 꿈, 이상은 없다. 헝가리 출신의 여자와 두 남자(<천국보다 낯선>(1984))가 멕시코계 여자와 백인 남자, 흑인 남자로 바뀌었을 뿐인데, 운명은 그들에게 가혹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은 새뮤얼 풀러의 묘지에서 튀어나온 좀비에게 물려 죽는 것으로 모자라, 경관에게 목이 잘리는 수모를 겪는다. 언제나 이동하는 존재인 자무시의 인물 가운데 클리블랜드 사람들은 점점 더 끔찍한 일을 당한다. 차라리 바람 부는 이리호 곁에 머물렀어야 하는 걸까.

현대 호러의 시작이라 할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이 여러 차례 인용되며 영화 속 영화로 기능한다. “8시인데 아직 밝잖아”는 조지 로메로 영화의 두 번째 대사이고, 위의 세 청년은 로메로 영화의 도입부에 나온 바로 그 차를 타고 이동 중이다. 오마주가 아니라면 성조기가 꽂힌 풍경은 자무시가 절대 찍지 않을 장면이다. 신과 구원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자무시는 로메로가 가족 시스템에 가했던 비판에서 더 멀리 간다. <데드 돈 다이>는 가족과 연인 같은 친밀한 관계의 끈을 완전히 제거한다. 유일하게 가족과 연결된 여자 경찰은 그 이유로 죽임을 당한다. 로드무비가 아니라 한 마을이 유일한 배경인 영화에서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홀로 존재하는 인물들은 그 모습 그대로 죽음과 대면해야 한다. 배경이 된 마을의 이름은 ‘센터빌’이지만, 마을은 이름과 달리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돼 있으며 어떤 공적 기관도 이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는다. 영화는 일부러 바깥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데, 기실 뉴욕의 변경에서 촬영한 센터빌은 미국 자체다. <천국보다 낯선>에서 ‘신세계’로 불렸던 뉴욕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미국의 중심으로 화한다. 자무시는 데뷔작 <영원한 휴가>(1980)에서 일찌감치 떠도는 자로 나섰다. 떠도는 자에게 떠날 곳이 없다면 그게 지옥이다. <데드 돈 다이>는 <다운 바이 로>(1986)의 정반대 지점에 놓인 영화다. 삶은 우화가 아니고 세계엔 더이상 길이 없으며 여하한 삶의 긍정도 없다. <데드 맨>의 영혼의 안식처는 언감생심이다. 자무시는 뱀파이어영화인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3)가 로맨스여야 하는 것처럼 좀비영화인 <데드 돈 다이>는 사회적 텍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뱀파이어가 내뱉은 대사 (“세상은 지금도 개판이야. 인간 좀비들이 세상을 망치는 게 싫어”) 는 예고였다. 내가 사랑하는 미국 감독들 스티븐 소더버그,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근작은 이전과 다른 어둠과 슬픔으로 채색되어 있다. 링클레이터의 <라스트 플래그 플라잉>(2017)은 할 애시비의 <마지막 지령>(1973)과 기묘하게 닮았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은 청년들이 분노하고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등장한 시기의 영화다. 그 50주년을 기념해 만든 듯한 <데드 돈 다이>는 농담이 아니라 혹시 분노가 아닐까. 로메로의 대사 “뇌를 죽여, 악귀를 죽여”를 굳이 “대가리(대통령)를 죽여”로 바꾼 이유가 무엇이겠나. 자무시는 한번도 메시지를 전하려고 영화를 만든적 없다. 그런 그가 미국이 죽지 않는 죽은 자로 가득 찬 나라가 되었다고 개탄한다. 그에 더해 <시체들의 새벽>(1978)이 가했던 소비적 자본주의 비판을 직접 대사로 전하는 촌스러움조차 무릅쓴다. 지금은 수많은 인간이 형언 못할 고통을 겪고, 음유시인과 순수한 아이만 살아남는 시간이다. 1968년이라는 시대, 자무시가 오하이오에서 뉴욕으로 건너올 때의 정신으로 돌아가 변화를 갈망하는 마음이 필연으로 작용한다. 자무시의 유일한 장르영화는 그의 유일한 정치영화로 남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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