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철도 곧 막바지에 이르렀다. 어떤 영화들은 특정 도시를 아주 매력적으로 담아내면서 공간이 주는 개성을 적극 활용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이 나라로, 이 도시로 당장 떠나고 싶어질 것이다. 늦은 휴가라도 떠나볼 생각이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이 영화들이 힌트가 돼 줄지도 모른다.
우디 앨런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스페인 / 바르셀로나
영화 속 자극적인 한 부분만을 떼어내 만든 한국판 제목이 우스꽝스럽지만, 원제는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다. 서로 다른 사랑의 태도를 가진 비키(레베카 홀)와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는 친구 사이다. 이 두 사람이 생경한 도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여행을 가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았다. 뉴요커 우디 앨런은 뉴욕에 관한 영화 말고는 만들 생각이 없어 보였으나, 이 즈음부터는 유럽으로 눈길을 돌려 색다른 도시의 매력을 한껏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작열하는 태양과 가우디의 건축물이 눈길을 사로잡는 도시 바르셀로나. 우디 앨런은 "이렇게 파격적이고 로맨틱한 로맨스는 바르셀로나처럼 아름다운 도시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며 바르셀로나를 향한 애정을 고백했다. 구엘 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등 각종 관광명소를 아울러 벌어지는 좌충우돌 로맨스가 미국인 관광객의 이야기로 그려진다. 특히 '내 남자의 아내'에 해당하는 캐릭터로 등장한 페넬로페 크루즈의 냉온탕을 오가는 연기는 제81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안겼다.
우디 앨런 <미드나잇 인 파리>
프랑스 / 파리
우디 앨런은 가끔 자신의 로맨스 영화에 비현실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재치를 뽐낸다. 파리의 명소를 아낌없이 담아낸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는 과거로의 여행을 하는 마차가 활약한다. 아름다운 여행지 파리에서조차 지루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소설가 길(오웬 윌슨) 앞에 마차가 등장하고, 그에게 최고의 시공간인 1920년대의 파리로 데려다 놓는다. 위대한 예술가들이 도처에 존재하는 이곳에서 그는 피카소의 뮤즈 아드리아나(마리옹 꼬띠아르)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아드리아나는 낭만의 시대인 벨 에포크를 동경하고, 그 시대를 여행하게 된 두 사람 앞에 등장한 폴 고갱은 르네상스가 최고의 시대라 말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대까지 자유자재로 오가며 언제나 사람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매력적인 과거에 빠진다는 간명한 진리를 이야기한다. 도달할 수 없기에 아름다운 과거, 매혹적인 도시 파리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비포 선라이즈>
오스트리아 / 비엔나
링클레이터의 '비포 3부작' 역시 매력적인 유럽의 세 도시를 경유한다. 그 첫 번째 이야기인 <비포 선라이즈>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러브 스토리다. 프랑스 여자 셀린(줄리 델피)이 비엔나에서 파리로 향하는 유럽 횡단 기차에서 미국 남자 제시(에단 호크)를 만난다. 부부 싸움으로 소란한 부부를 피해 카페 칸으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의 대화는 미묘한 설렘으로 가득하다. 먼저 기차에서 내린 제시의 제안으로 둘은 비엔나에서 하루 동안의 여행을 한다. 뚜렷한 목적지 없이 낡은 레코드 가게, 프라우터 공원, 다뉴브강의 레스토랑을 경유하며 가치관을 나눈다. 예기치 않은 인연의 순간을 포착한 영화는 닿을 듯 말 듯한 남녀의 풋풋함으로 관객들을 설렘으로 이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비포 선셋>
프랑스 / 파리
다시 파리다. 제시와 셀린은 비엔나에서의 여행을 마무리하며 6개월 뒤의 만남을 약속했다. 그러나 실제 재회는 9년 뒤 파리에서 이루어졌다. 둘 모두에게 낯선 공간이었던 비엔나가 아닌, 셀린의 공간인 파리. 둘의 이야기를 써서 소설가가 된 제시가 낭독회 때문에 파리에 왔다가 우연히 셀린과 만난 것이다.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시간까지 남은 85분의 시간 동안 제시는 셀린의 공간에서 셀린을 향한 구애의 대화를 건넨다. 영화 속에 흐르는 시간과 러닝타임이 거의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관객들이 체감하는 긴장감도 배가 된다. <비포 선셋>은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파리를 담는다. 화려한 야경과 에펠탑으로 대표되는 도시의 이미지를 비틀어 일상적인 배경으로서의 파리를 찍었다. 영화 속에 등장한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과 프롬나드 플랑테 산책로는 비포 시리즈를 사랑하는 팬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비포 미드나잇>
그리스 / 카르다밀리
그로부터 다시 9년 뒤. 시리즈의 마지막 단락인 <비포 미드나잇>은 셀린-제시 부부의 중년기를 조명한다. 배경은 이국적인 휴양지로 향했다. 그리스의 작은 해변 마을 카르다밀리로 여름휴가를 떠난 부부에게는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면서 많은 관계들이 따라붙었다. 따라서 비포 시리즈의 핵심인 둘의 대화로 가기까지 각종 에피소드의 산을 넘어야 한다. 이런 디테일마저 영화에 현실적인 면을 더한다. 신들의 나라 그리스에서 고대 유적지를 유랑하며 대화를 나누는 이들에게선 과거의 낭만만이 점유하고 있지 않다. 격정으로 치닫는 싸움은 이미 9년간 반복해 온 지난한 과정일 것이며, 금방이라도 타올라 꺼져버릴 듯한 둘의 다툼은 이내 부부라는 단단한 이름으로 제자리를 찾는다. 결코 이를 두고 낭만적이지 못하다고 할 이유도 없다.
장률 <경주>
한국 / 경주
너무 유럽 이야기만 떠들다 보니 바쁜 일상에 해외여행은 사치인 수많은 관객을 위해 장률의 영화를 소개해야겠다. 연변 출신의 한국계 중국인인 감독 장률에게 한국이라는 공간은 특별하다. 자신이 속한 공간이면서, 생경한 공간이기도 하다는 점. 그 때문인지 장률은 한국의 특정 도시를 염두에 둔 영화를 여러 편 만들었다. 그중 <경주>는 제목 그대로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만난 두 남녀의 이야기다. 우디 앨런이나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영화들처럼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는 아닐지언정, 경주라는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색다르다. 유독 능이 많은 경주의 풍경은 삶과 죽음의 정서가 혼재한 공간이다. 곳곳에 존재하는 무덤과 무덤 사이에서 동네 주민들은 무덤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장례식 참석 차 한국에 들른 북경대 교수 최현(박해일)이 충동적으로 경주로 떠났다. 경주의 한 찻집 아리솔에서 만난 주인 공윤희(신민아)와의 기묘한 인연을 지나, 보문 호수와 고분능 등 경주의 명소를 경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