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엑시트>, 뛰어난 유머와 긴장으로 현재를 담았다
2019-08-21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평범한 것들의 비범한 연결

“평범한 코미디언은 재미있는 것을 연기하지만 훌륭한 코미디언은 평범한 것을 재미있게 만든다.” 버스터 키튼의 말이다. 키튼의 후예임이 분명한 이상근 감독이 우선해서 꾸린 것은 2019년에 즈음한 한국 사회의 풍경이다. 청년 백수 용남(조정석)은 딸 셋 있는 집 아들이다. 1970~80년대에 지어졌을 단독주택에서 부모와 함께 산다. 연회장 부점장 의주(윤아)에겐 감정노동이 만만치 않다. 건물주 아들인 점장이 치근댄다. 3대가 모여 트로트 가요를 부르는 칠순 잔치. 유럽 고성을 모방한 ‘구름정원 컨벤션홀’ 외벽에는 어김없이 사자상이 포효하고 있다. 고대 지중해 연안 제국과 중세 유럽 대륙의 건축양식이 마구 뒤섞여 있다. 내부에 라일락룸과 페퍼민트홀을 갖췄음은 물론이다. 주변 상가 건물들엔 오색찬란한 네온사인 간판이며 현수막이 난립해 있다. 미세먼지 수치가 ‘나쁨’을 가리킨 날, 가스 테러가 발생한다.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건 구급차가 아니라 사설 견인차다. 유독가스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가고 인물들은 위험 지역에서 탈출해야 한다. <엑시트>는 평범한 상황과 지형지물들로 화면을 밀도 높게 채운 다음 이를 유머와 긴장으로 바꾼다. 인지심리학자 로버트 W. 와이스버그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창의란, 평범한 것들의 비범한 연결이다.”

‘지금 저기’를 본다는 것

여기까지는 표면적인 얘기다. <엑시트>의 내면에선 ‘보는 행위’에 대해 자못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재난을 ‘본다’. 용남이 건물을 뛰어넘을 때부터 가족들은 그를 본다. 시야에서 벗어나도 부모는 화상통화를 연결해 아들을 본다. 구조 헬기 탑승인원 제한으로 생이별했어도 드론 카메라와 무선 통신이 주인공들을 방송한다. 아버지(박인환)가 드론 촬영팀을 만나 목놓아 애원하는 건 아들의 모습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인류가 본격적으로 먼 곳의 재난을 보기 시작하기는 1990년 걸프전부터였을 것이다. 미군과 군수산업체들은 첨단 미사일의 정밀 타격 영상을 언론에 제공했다. <CNN>은 일약 국제적인 스타 방송사로 떠올랐다. 이후 우리는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에 돌진한 항공기를 봤고, 보스턴마라톤대회 도중 터진 폭탄을 봤다. 그런데 정확히 보자. 우리가 본 건 방송사 취재진이 출동해 촬영한 ‘사건 이후’의 영상이 아니다. 재난의 현재가 담긴 ‘지금 저기’의 실황이다. 이걸 가능케 한 건 이 시대의 평범한 풍경으로 자리잡은 테크놀로지다. 우리는 사람보다 카메라가 많은 시대에 산다. 국내 등록된 스마트폰 5천만대. 요즘 스마트폰엔 눈(렌즈)이 대여섯개씩 달려 있다. 차량마다 장착된 수백만대의 블랙박스는 도로를 달리는 눈이다. 드론은 하늘을 나는 눈이다. 여기에 전국 곳곳을 들여다보고 있는 CCTV와 IP카메라까지. 렌즈들은 5G시대 연결망에 의해 실시간 영상을 전세계와 공유한다.

이제 <엑시트> 속 평범한 테크놀로지의 풍경이 어떤 비범함으로 연결되는지 짚을 순서다. 탈출해야 하는 이들 중에는 학생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밤늦도록 ‘1등 보습학원’에 남아 있었다. 탈출구는 어른들의 편의에 의해 잠겼다. 학생들이 창문 저편에서 울부짖는다. 한국 사회의 보편적인 풍경이 특수한 집단기억과 만나는 순간이다.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이를 지켜보는 두 주인공은, 다시 말해 선의를 가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갈 수 없다. 이를 보이는 카메라 역시 건물 저쪽으로 건너가지 않는다. 볼 수 있지만 가닿을 수 없는 고문 같은 상황. 이를 연출한 감독의 뜻은 이 영화의 오락성 못지않게 비범하다. 구조 기회를 아이들에게 양보한 용남과 의주가 뛰고 매달리는 사이 방송사 보도국장은 영상을 입수하기 위해 사설 드론 촬영팀을 매수한다. 보도국장은 지금 저기, 강 건너 불을 구경시켜줌으로써 <CNN>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다. 시민들은 이걸 ‘지금 여기’의 일로 만든다. 팔짱 끼고 구경만 하고 앉아 있지 않았다. 저마다 장비를 동원해 응원을 넘어 구조의 손길을 이었다. 강 건너 불을 불구경으로 만들지 않는 시민들 사이의 비범한 연결. 재난 실황이 생중계되는 시대에 선량한 어른의 어떤 기억은, 영화에서나마 이렇게 승화했다. <엑시트>의 진짜 힘은 ‘본다’는 행위와 이 시대 기술을 한국인의 집단기억과 만나게 한 다음 따뜻한 오락영화로 거듭나게 한 데 있다.

재난영화에서 여성의 자리

재난영화로서 <엑시트>가 여성을 담은 방식 역시 충분한 평가가 필요해 보인다. 의주는 잘 달린다. 한국영화 스크린 속에서 가장 잘 뛴 여성 중 한명일 것이다. 거의 모든 운동의 기본은 어깨에서 힘 빼기다. 전력달리기의 기본은 앞쪽 무릎을 최대한 높이고 뒤쪽 무릎은 충분히 뒤로 뻗는 것이다. 이로써 윤아는 영화의 속도에 걸맞은 인물의 속력을 확보한다. 그녀의 달리기 자세는 <엑시트>의 제작 태도이기도 하다. 어깨에 힘 빼고 기본에 충실하기. 한국 상업영화에서 여성이 피보호자나 요(要)구조자의 위치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은 이제 새삼스럽지 않지만, 충무로 재난 소재 영화에서라면 얘기가 다르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남성의 손길에 매달려야 하는 처지에 머물기 일쑤였다. 도입부에서 의주의 암벽등반 실력이 용남보다 한수 위였음을 일러둔 <엑시트>는, 그녀에게 재난 대피와 구조신호 송출에 지휘자 역할을 맡긴다. 그러고는 달리고 매달리고 기어오르는 액션을 용남과 동등하게 치르도록 한다. 사태 해결 뒤 키스나 포옹 장면을 넣지 않은 선택은 말할 것도 없다.

헬기 탑승 제한 상황에서 폼나게 양보하기. 이때 상대방에게 눈물일랑 보이지 않기. 그러다 들통나기. 이로써 관객에게 웃음 주기. 이를테면 한국 관객은 조진웅이나 조정석 같은 배우에게서 이런 연기를 기대한다. 감정을 들켜 웃음을 전하는 역할을 여성에게 맡기는 경우는 대개 그녀가 조연일 때다. 이를테면 한국 관객은 김지영(용남의 큰누나 정현 역) 같은 배우에게서 이런 연기를 기대한다. 이같은 유머 코드는 그간 숱한 코미디에서 응용문제 풀듯 활용해온 설정이지만, 대개 남성 캐릭터가 전유해왔다는 점을 환기시켜주는 인물이 의주다. <엑시트>는 위기 극복의 주체로서뿐 아니라 부재와 결핍의 유머 영역까지 여성 주연이 설 자리를 넓혔다.

2019년 8월 한국영화 시장은 이례적이다. 여름 대목을 한편의 승자가 독식하지 않고 1, 2위 작품이 매일 박빙의 승부를 펼치는 경우도 드문데, 이들 두편의 세계관이 적잖이 다르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얼핏 <봉오동 전투>의 이분법적 서사가 지금의 정세와 맞물리는 듯 보이지만, 정치나 언론 영역보다 몇수 앞서가며 불매운동을 진화시켜나가는 시민들의 자발적 움직임은 <엑시트>의 그것과 닮아 있다. 물론 이들의 흥행 승부 결과보다 더 궁금한 건 이상근 감독의 다음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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