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유열의 음악앨범> 정지우 감독, "각자의 문제로 관계가 흔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2019-08-29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오계옥

정지우 감독은 유독 ‘기분’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극중 인물이 그려내는 마음의 풍경에 주목하는 감독다운 습관이다. 그의 영화는 대상과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인물의 감정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중요한 건 이들의 가장 큰 걸림돌이 일상에 균열을 내는 타인이나 환경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라는 점이다. 1994년부터 2005년까지 10여년에 걸친 동갑내기 두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을 조명한 <유열의 음악앨범> 또한 이러한 ‘정지우 월드’의 궤적을 따른다. 라디오에서 자신의 사연이 소개되고, 사연에서 언급된 대상이 그 방송을 들을 확률만큼이나 희박한 ‘기적’이 두 사람의 사랑을 돕지만 서로의 마음속 그늘이 자꾸만 그들을 갈라서게 한다. 두 남녀가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속 이야기는 핑클, 루시드폴, 토이, 신승훈 등 90년대를 풍미한 대중가요 가사를 통해 전달된다. 그러니까 이건 유행가를 닮은 사랑 이야기다. 어디에나 있을 법하지만 누구와도 같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해피엔드>(1999), <사랑니>(2005), <은교>(2012)의 금기를 넘나드는 열정에서 벗어나 현실에 발붙인 보통 사람들의 로맨스에 주목한 <유열의 음악앨범>은 대중과의 보다 폭넓은 소통에 대한 정지우 감독의 의지를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동명 라디오방송에 대해 사적인 추억이 있는지 궁금하다.

=방송을 들은 적은 있지만 적극적인 청취자는 아니었다. 나는 <별이 빛나는 밤에> 세대고, <유열의 음악앨범>을 열심히 듣던 청취자들은 그보다 연령대가 낮았으니까.

-라디오 매체에 어떤 매력을 느끼나.

=음악하고 말을 같이 들을 수 있는 매체가 생각해보면 많지 않다. 그런 점에 라디오의 고유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또 <유열의 음악앨범> 마지막 방송 즈음에 유열님이 “라디오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매체”라는 표현을 했는데 내게는 이 말이 매우 울림 있게 다가왔다. 수많은 사연 중에서 누군가의 사연이 선택되고, 사연에서 언급된 당사자가 우연히 방송을 듣게 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확률과 확률의 만남이잖나. 그런 인연이 맞닿는다는 게 정말 특별한 것 같다.

-이 작품은 영화 전체가 라디오 프로그램의 사연과 거기에 따르는 신청곡을 틀어주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형식을 선택한 이유는.

=모든 라디오방송은 이야기(사연)와 음악(신청곡)이 묶여 있다. 그러한 라디오방송 특유의 구조를 반영하고 싶었다. 예를 들어 한 라디오방송 청취자가 군대 간 오빠를 그리며 <입영열차 안에서>를 신청했을 때, 음악은 신청자의 상황과 사연을 대변한다. 이처럼 영화에서도 음악이 일종의 내레이션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영화는 1994년부터 2005년에 이르기까지 1975년생 두 남녀의 되풀이되는 만남과 헤어짐을 보여준다. 시간적 배경과 중심이 되는 세대를 결정하는 데 어떤 고민이 있었나.

=우선 휴대폰이 없던 시절의 멜로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서로의 존재가 확인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 않았던 시대야 말로 진정한 멜로드라마의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마음 졸이며 서로에 대한 소식을 궁금해하고 상대방을 기다려주던 때가 좋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고, 그런 시대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또 1975년생은 1997년, 98년 한국이 IMF 구제금융을 겪을 때 대학 졸업을 맞닥뜨린 세대다. 앞으로도 잘살 수 있을 거라는 낙관이 존재하던, 반짝거리는 청소년기를 보내다가 평생 듣도보도 못한 상황을 갑자기 맞게 된 거다. 정말 당황스러운 방식으로 어른의 세계에 진입했고, 그러면서 마음 한쪽에 불안과 두려움을 계속 품고 있었다. 시대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세대라고 생각했다.

-보통의 연애 이야기를 한다는 게 정지우 월드에서는 좀 낯설다. <해피엔드> <사랑니> <은교> 등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당신의 전작에서, 인물들은 금기를 넘나들며 상대방을 욕망하는 존재였다.

=이번 영화에서는 금지된 것에 대한 긴장감에서 오는 자극은 없다. <유열의 음악앨범>을 통해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이 차이, 신분 차이, 직업 차이로 생기는 두려움, 긴장감이 전혀 없는 상태의 동년배 남녀가 우연히 만나서 사랑을 시작한다. 이들은 서로를 분명히 좋아하는데도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렵다. 상대방이 못됐거나 실망스러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 때문에 먼저 실망하고 움츠러드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각자가 안고 있는 문제로 관계가 흔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각색 과정에서도 이 부분만큼은 그대로 가져가고자 했다.

-멜로드라마 서사에서 다른 방향성을 시도해본 건데, 개인적으로 어떤 변화를 느꼈는지 궁금하다.

=내 영화에 행복한 뉘앙스가 조금 더 생겨도 괜찮지 않을까 싶더라. 예전에는 소재가 그렇다 보니 영화에 행복한 뉘앙스가 생기면 지적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김고은과는 <은교> 이후 6년 만의 협업이다. 은교가 누군가의 시선과 판타지 속에서 존재하는 인물이었다면, <유열의 음악앨범>의 미수는 현실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있는 인물이다.

=김고은의 현재 나이가 미수와 거의 비슷하다. 본인이 겪고 있는 인생의 여러 순간에 대한 기억들, 느낌들을 나누며 미수라는 캐릭터에 대한 더 정확한 그림이 정돈됐던 듯하다. 특히 ‘내가 선택한 것인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라는 기분은 지금의 20대가 라이브로 경험하고 있는 감정 같다.

-안정에 대한 미수의 열망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대학교수가 추천해준 정규직 편집자와 방송국 아르바이트 중 미수는 정규직 편집자를 택한다. 하지만 정작 원하는 일을 택한 미수는 불안해하고, 방송국 아르바이트를 택했던 친구가 PD가 돼 더 매력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나. 내가 더 나은 선택을 한 것 같은데 정작 나는 흔들흔들하고, 다른 선택을 한 친구는 재밌게 사는 것 같은 기분. 어느 나이가 되면 뭐가 좋은지 진짜 모르겠는 순간이 오는 것 같다. 눈앞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세월의 흐름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현우는 과거의 그늘을 안고 사는 인물이다. 정해인과 어떤 면에서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나.

=나는 정해인 배우가 정말로 정직한 사람인 것 같다. 능수능란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꾸미는 게 잘 안 되는 사람이더라. 극중에서 과거의 현우를 엄마도, 고모도, 할머니도, 친구도,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그 상태를 몸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된 배우라고 느꼈다. 현우의 대사 중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정말로 중요한 거 한두 가지만 있으면 된다”고. 시나리오에 있는 대사였지만, 그 대사를 믿을 수 있게 만들어준 건 정해인이라는 자연인 덕분이었다고 느낀다.

-<4등>(2014)에 이어 다시 한번 학교폭력이 영화의 소재로 들어왔다. 실제로 현우가 그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영화는 확답하지 않는 듯하다.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의도는 가해자, 피해자로 등장인물들을 구분 짓는 형태의 이야기를 만들자는 게 아니었다. 이를테면 사고가 일어난 바로 그 순간 우연히 건너편 건물에서 현우를 목격한 아이가 잘못된 증언을 함으로써 현우의 세상이 뒤틀려버린 건데, 현우 입장에서 보면 그에 대한 두려움과 억울함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이야기가 학교폭력이라는 단어와 연관 짓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고 본다. 가해자의 이야기로 보기에도.

-연인으로 함께하는 동안 현우는 미수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랜 시간 동안 과연 미수가 현우의 과거를 알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현우가 ‘나는 (나쁜 짓을)하지 않았다’고 정확하게 얘기했기 때문에, 미수도 상대방이 원치 않는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으려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우가 미수의 마음속 불안까지 이해하진 못했다고 본다.

-두 인물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은자 언니’의 존재도 강렬하다.

=유사 가족으로 묶인 세 사람(은자, 미수, 현우)의 보호자 역할을 해주는 사람인데, 미수와 현우에게는 이런 존재가 참 그립고 소중했을 것 같다. 지적질하지도 않고, 나무라지도 않고, 찾아가면 다 들어주는. 김국희 배우가 이 역할을 너무 잘 표현해주었다.

-음악은 제작 과정의 어느 시점부터 작업했나.

=편집을 시작하면서부터 음악 작업을 했다. 영화를 만들 때 음악에 맞춰서 편집을 한다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방식을 선택해 작업했다. 이야기와 음악이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했기 때문에, 음악을 바꾸면 편집까지 바꿨다. 연결감이 좋은 음악은 한번 자리를 잡으면 그 자리에 눌러앉더라.

-음악을 선곡할 때 1994년부터 2005년까지의 가요, 팝송 등 300곡 정도의 플레이리스트를 놓고 스탭, 배우 등이 반복적으로 들으며 마음 가는 음악을 골랐다고 들었다. 그중 반드시 포함되었으면 하는 곡이 있었나.

=콜드플레이의 <Fix You>를 정말 쓰고 싶었다. 보컬 크리스 마틴이 이 곡의 간주가 시작되면 늘 무대에서 뛰는데 그때마다 심장이 쿵쿵거린다. 극중 인물이 달리는 기분에 이 곡이 붙으면 너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여러 사람이 했다. 그리고 핑클의 <영원한 사랑>이 있다. 영화의 성격과 맞을지 우려하는 분도 있었지만 두 주인공이 마침내 다시 만나는 장면의 유쾌함을 감당하기에 이보다 더 나은 곡은 없더라.

-감정적으로 가장 격렬한 장면에 루시드폴의 <오, 사랑>이 흐른다는 점은 의외였다.

=현우의 감정적인 어려움을 어떻게 음악으로 안아줄까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 장면에서는 음악이 앞으로 튀어나오면 현우가 덜 보인다고 생각했고, 그 균형감 때문에 결국 자리 잡은 음악인 것 같다. 이 장면을 찍을 때 정해인 배우가 정말로 고생이 많았다. 보통 영화에서 뛰는 장면을 촬영하면 장비가 가속할 수 있는 정도로만 뛴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만큼은 배우가 뛸 수 있는 전속력을 요구했다. 낙타 봉우리처럼 생긴 두개의 언덕을 넘어야 하는데, 스탭들이 한번 뛰고 나서 다리가 풀려 비틀거리는 걸 보고 그냥 찍으면 안 되는 문제구나싶어 스포츠 마사지팀까지 섭외했다. 정해인 배우가 많이 힘들었을 텐데 끝까지 힘을 빼지 않고 뛰었다. 한편으로는 미안하고 정말 고마웠다.

-유독 이 영화에는 힘을 다해 뛰는 장면이 많다.

=그런 장면을 늘 찍고 싶었다. 배우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보고 싶은 사람이 보고 싶어 온 힘을 다해 뛴다는 행위에 대한 순정이 얼마나 마음을 다한 것일까 싶은 기분이 든다. 뛰는 장면은 찍기는 정말 힘들지만 보기에는 너무 좋은 것 같다.

-영화를 보니 대중과의 소통을 넓히기 위해 고민한 지점이 느껴진다.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인생의 여러 국면이 있지만 미묘함과 모호함 가운데 관객으로서 크게 상처받거나 소외되지 않는 상태로 영화를 보고 나서 ‘기분이 좋네. 한번 더 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평소 관객의 입장에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다른 지점을 알게 해주는 영화들이 좀더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 역시 가지고 있었다. <유열의 음악앨범>이 그런 점에 있어 작은 영향을 주고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진짜 좋을 것 같다. 보고나서 ‘기분’이 남는 영화를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어려운 영역이지만 그런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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