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M. 나이트 샤말란 / 출연 브루스 윌리스, 할리 조엘 오스먼트 / 제작연도 1999년
나에겐 너무 어려운 요청이다. ‘내 인생의 영화’라니?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한 내 성격에 그동안 봐왔던 수많은 영화 중에서 한편을 콕 집어내라니? <매트릭스>를 선택하면 <쇼생크 탈출>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쇼생크 탈출>을 고르면 <유주얼 서스펙트>로부터 날아오는 그 경멸의 눈초리를 어떻게 피하란 말인가? 게다가 그 영화와 관련된 사연이나 에피소드가 있는지도 써달라니?! 한편의 영화와 개인적인 사연이 드라마처럼 엮이는 교집합점이 생각해보고 생각해봐도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생각하면 할수록 ‘내 인생은 뭐 이렇게 물을 탄 술처럼 밍밍하고 맛없는 자질구레한 기억들로만 가득 차 있지?’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다. 방법이 없다. 그래서 ‘내 인생의 영화’라고 쓰고 ‘내 기억 속의 영화’로 읽기로 했다.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영화사에 신입사원 입사를 얼마 앞둔 때였다. 평소에도 유명 최신작 정도는 당연하게 꿰차고 있다는 ‘준비된 인재’같은 인상을 풍기기 위해 개봉일에 맞추어 부랴부랴 서울극장으로 달려가 본 영화는 <식스 센스>였다.
기억이 난다. 낮 12시가 되기도 전에 극장 앞에 도착했는데도 이미 마지막 회차를 빼고는 전부 매진이 되어 있었다. 그때 낮고 근엄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극장 앞 노점에서 맥반석 오징어와 쥐포를 팔며, 동시에 두배에 가까운 웃돈을 붙여 나에게 암표를 팔던 아줌마의 얼굴이, ‘젊은이, 난 자네가 원하는 걸 가지고 있어. 같이 온 여자친구를 저녁 8시40분 마지막 회차까지 무책임하게 기다리게 할 건가?’라고 귓가에 속삭이듯 던지던 아줌마의 은은한 눈빛이 기억난다. 싸늘하다. 나도 눈빛을 날린다. ‘당장 주세요. 그리고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 암표래봤자 극장 매표소 몇 발자국 앞에서 공공연하게 거래하던 당시인데도 괜히 몇 발자국 더 떨어진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꺼내어, 마치 마약이라도 건네듯 비밀스럽게 내 손에 넘겨주던 두장의 표가 기억난다. 상영관에 들어가고 영화는 시작된다. 브루스 윌리스가 나온다고 하여 액션을 기대했는데 부부 관계에 위기를 맞은 심리학 박사와 대인기피 과대망상증 소년과의 버디무비라니? 이런 영화인 줄 알았으면 다른 영화를 봤어야 했다고 잠시 후회했던 내 모습이 기억이 난다. 후회는 잠시였다. 속된 말로 감독은 나를, 서울극장 2관에 빼곡하게 앉아 있는 1200명의 관객을 가지고 놀았다. 조용하지만 놀라운 구조와 이야기에 나와 관객은 영화 보는 내내 긴장과 충격의 파도에 휩쓸려가고 있었다. 마지막에 이르러 주인공 소년의 저 유명한 대사 “I see dead people”이 흘러나오며 브루스 윌리스도 오래전 자신이 상담했던 정신질환자에게 살해당한 억울한 유령임을 알았을 때, ‘악!’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반쯤 벌떡 일어났던 내 모습이 기억이 난다.
영화를 다 보고 극장 문을 막 나서는데, 같이 영화를 본 한 관객이 갑자기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다!!”를 큰소리로 외쳤다. 정적이 흘렀다. 이제 막 영화를 보기 위해 광장에 모여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행동을 멈추고 그 남자를 바라보던 분노의 눈길들이 기억이 난다. 지금까지 내 인생의 모든 영화를 보던 중에 만난 최강최악의 스포일러, 그 남자의 얼굴이 아직도 똑똑하게 기억이 난다.
●김동현. 시네마서비스 제작, 투자팀을 거쳐 현재 투자·배급사 메리크리스마스 본부장으로 있다. <내안의 그놈>에 이어 <양자물리학>을 개봉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