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 같은 한국 멜로에 내린 비랄까.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며 국내 멜로영화의 수가 점점 줄고 있는 가운데, 정지우 감독의 신작 <유열의 음악앨범>이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코미디를 덜어내고 드라마에 집중해 정통 멜로의 결을 유지한 영화다. 부족한 개연성, 진부한 전개 등으로 적잖은 혹평도 받고 있지만 오래간만에 등장한 한국 정통 멜로인 만큼 반가운 마음은 숨길 수 없다.
이런 국내 멜로영화가 전성기를 맞이했던 시기가 있으니,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2000년대다. <엽기적인 그녀>, <동갑내기 과외하기> 같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도 성행했지만 담담하거나 묵직하게 눈물샘을 자극하는 작품들도 줄줄이 등장했다. 그중 상당수가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의 ‘인생영화’로 손꼽히는 명작들. <유열의 음악앨범> 개봉과 함께 2000년대를 주름잡던 한국 멜로 영화 10편을 돌아봤다.
<8월의 크리스마스>
2000년대를 이야기하기 전, 1990년대 후반을 장식한 멜로영화들이 있다. 그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은 역시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진사 정원(한석규)과 구청 직원 다림(심은하)의 사랑을 담은 영화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명작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진부해질 수 있는 소재를 매우 담담하게 그렸기 때문. 허진호 감독 특유의 색을 확실하게 드러내며 크래딧이 올라간 뒤 더욱 강한 여운을 남겼다. 이외에도 1990년대 후반 탄생한 한국 멜로 명작들에는 <접속> <편지> <약속> <미술관 옆 동물원> 등이 있다.
<동감>
2000년대 한국 멜로영화 붐의 첫 주자는 김하늘, 유지태 주연의 <동감>이다. 1979년과 2000년,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두 남녀가 무전기를 통해 소통하게 되는 이야기다. 지금은 진부해졌을 수 있지만 타임워프와 멜로의 결합은 당시 관객들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게다가 <동감>은 단순한 두 주인공의 사랑이 아닌, 보다 복잡한 인물 관계 설정으로 독특한 전개를 자랑했다.(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신선함을 무기로 한 <동감>은 21세기 한국 멜로 부흥의 신호탄을 쐈다.
<시월애>
<시월애>는 <동감>과 함께 한국 판타지 멜로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 잡게 된 작품이다. <동감>과 마찬가지로 다른 두 시간대를 살고 있는 남녀가 주인공이며 개봉까지 2000년으로 같다. 그러나 <시월애>는 보다 이미지와 분위기에 집중했다. 스토리는 단순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낡은 우편함, 갯벌 사이의 외딴 집 등의 사물로 판타지 감성을 살렸다. 거기에 이와이 슌지 감독을 떠올리게 하는 눈부신 색감까지 더해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때문에 <시월애>의 개봉 후, 영화의 촬영지가 관광명소로 자리 잡기도 했다.
<번지점프를 하다>
2000년대 한국 멜로 중 가장 진보적인 작품이 아닐까. <번지점프를 하다>는 환생을 소재로 동성애 코드를 섞은 멜로영화다. 과거의 기억이 나열되는 전반부는 일반적인 멜로처럼 보이지만, 주인공 인우(이병헌)가 금기시되는 사랑을 느끼는 후반부는 뇌리에 박히는 강렬한 이야기를 선사했다. 사회적인 통념을 꼬집으며 이를 애틋함으로 풀어낸 사례. <번지점프를 하다>는 어쩌면 모든 멜로영화가 담아내려 한 ‘사랑에 대한 본질’을 통해 시대를 앞서간 메시지를 담았다.
<파이란>
최민식 주연의 <파이란>은 달달함과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 두 주인공은 극 중에서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다. 삼류 건달과 취업을 위해 그와 위장결혼한 중국 여인. 교차되며 진행되는 그들의 이야기는 멜로보다는 두 사람의 인생 드라마에 가까웠다. 굳이 첫눈에 반하게 되는 사랑이 아니더라도 <파이란>은 위로와 후회 등이 뒤섞인 캐릭터의 감정에 집중해 먹먹함을 남겼다.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부둣가 장면은 최민식이 감정을 잡는데만 꼬박 하루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봄날은 간다>
한국 멜로에서 허진호 감독의 입지는 독보적이다. <8월에 크리스마스>에 이어 그 입지를 굳혀준 작품이 <봄날은 간다>. 내용은 간단하다.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이별하는 이야기. 정말로 이게 전부다. 그러나 허진호 감독은 시소를 타듯 서로에 대한 마음이 오가는 지점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공감점을 끌어올렸다. “라면 먹을래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등의 주옥같은 대사들도 그 일부. 사랑에 대한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내며 시큰한 감성을 자극한 영화다.
<연애소설>
삼각관계 역시 멜로에서 등장하는 단골 소재다. 이를 치정이 아닌 첫사랑의 풋풋함으로 소화한 영화가 <연애소설>. 이미 스타덤에 오른 차태현, 이은주와 당시 신인이었던 손예진이 주연을 맡았다. 절친한 친구지만 동시에 지환(차태현)을 좋아하는 수인(손예진)과 경희(이은주). 그러나 지환은 수인을 좋아하는 상황. 쉽지 않은 관계 속에서 각자의 욕심보다는 망설임이 앞서며 벌어지는 미숙한 청춘들의 연애담을 풀어냈다.
<클래식>
촌스러움과 클래식은 한 끗 차이다. 그런 의미에서 <클래식>은 후자로 남았다. <엽기적인 그녀>의 곽재용 감독이 웃음기를 빼 연출한 <클래식>은 지금 보면 다소 오글거리는 대목들도 종종 등장했지만 탄탄한 스토리와 배우들의 호연으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우연과 필연의 상관관계를 촘촘하게 엮어내며 세대를 넘어가는 멜로를 보여줬다. 영화는 보지 못했어도 안다는 조인성과 손예진의 비 피하는 장면, O.S.T.로 활용된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등 설렘 포인트를 확실하게 잡기도 했다. 손예진을 멜로퀸 자리에 올려준 1등 공신 영화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손예진의 3연타다. 정우성과 함께한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는 한국 멜로의 단골 소재인 불치병이 등장했다. 다만 두 사람을 갈라놓는 것은 죽음이 아닌 기억. 치매를 앓게 되는 수진(손예진)과 그런 그녀의 곁을 지키는 철수(정우성)의 이야기다. 명대사인 “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등 달콤한 멜로와 이어졌지만, 병이 시작되는 후반부부터는 짠내의 끝을 달렸다. 두 배우의 극강 비주얼로 담아낸 애틋함은 250만 명이 넘는 관객들을 극장으로 향하게 했다.
<너는 내 운명>
<접속> <약속> <내 마음의 풍금> 등으로 1990년대 후반 멜로의 주축이 됐던 전도연. 그녀는 2005년 황정민과 함께 <너는 내 운명>으로 다시금 놀라운 연기를 선보였다. 2002년 발생했던 여수 에이즈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너는 내 운명>은 순수한 시골 남녀가 겪는 절절한 사랑을 그렸다. 거기에 주연배우들의 찰떡같은 생활 연기가 더해져 예상 가능하지만, 눈물을 참을 수 없는 멜로가 완성됐다. 덕분에 약 3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제치는 흥행에 성공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1년 뒤, 한국 멜로 흥행이 다시 한 번 갱신됐으니 강동원, 이나영 주연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으로다. <파이란>의 송해성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공지영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과거의 상처를 간직한 채 꾸역꾸역 살아가는 유정(이나영)과 사형수 정윤수(강동원)의 만남을 담았다. 달콤한 로맨스보다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는 과정에 집중, 우울한 분위기로 여러 사회문제를 꼬집었지만 그 속의 따듯함을 녹여냈다. 덤덤한 톤이 주가 되지만 마지막 '한 방'을 놓치지 않는 송해성 감독의 연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