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유열의 음악앨범>이 사랑을 기억하는 법
2019-09-18
글 : 박지훈 (영화평론가)
드라마와 리얼리즘 사이에

모든 존재가 궁극적으로 슬픈 이유는 시간 때문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하고 소멸하게 한다. 사랑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랑도 낡게 되고, 진부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이 영원할 거라 믿고 싶어 한다. 그런 믿음이 없다면 사랑을 시작하기는 힘들 것이다. 언젠가 사랑이 모두 끝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는 것. 이 모순적인 믿음이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 삶이라는 것도 언젠가는 모두 끝나버릴 허무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유열의 음악앨범>에는 이런 모순과 불화가 있다. 말하자면 리얼리즘과 백일몽의 불화다. 영화는 개연성을 설명해야 하는 자리에 구멍을 내고 그곳을 드라마의 클리셰로 채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것이 다분히 의도적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관객에게 이유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감정을 전달하는 데 더 중점을 두는 것이다. 마치 “왜 나를 사랑해?”라는 질문에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해”라고 답변하는 것처럼, 동문서답인 동시에 한편으론 가장 진솔한 답처럼 느껴진다.

우연을 믿는다는 것

리얼리즘과 드라마의 충돌은 전체적으로는 인물들 사이에서, 그리고 인물의 내부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드라마의 세계에서 온 인물이 현우(정해인)라면, 리얼리즘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는 인물은 미수(김고은)다. 미수의 세계에서 돈은 등록금, 연봉과 같은 구체적인 삶의 조건으로서 의미를 가지지만, 현우의 세계에서는 돈이 언급되지 않는다. 현우는 월세나 생활비에 대한 걱정이 없고,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보이지 않는다. 현우에게 중요한 것은 꿈이며, 그 꿈은 1994년의 미수제과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영화는 현우의 비현실성에 대해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도드라지게 한다. 현우에 대한 “너무 잘생겼다” 혹은 “잘생겨서 너만 용서받는 것 같다”라는 말은 극의 몰입을 방해하는 대사들이며, 현우를 타자화하는 말인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현우를 리얼리즘의 세계에 귀속시키는 말들이다. 현우에게 현실은 생경하고 낯설며 끝없이 현우를 타자로 만들고 있기에, 현우는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고향 같은 곳을 꿈꾸게 된다. 현우에게 미수제과점은 타자가 아니라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고향 같은 곳이었다. 친척들도 믿어주지 않던 그를 믿어준 두 사람, 은자(김국희)와 미수가 있는 미수제과점은 돌아가야만 하는 곳이며, 돌아갈 수밖에 없는 곳이다. 미수는 그런 현우를 이해한다. 미수를 향해 달려오는 현우에게 미수는 “뛰지 마, 다쳐”라고 말한다. 현우가 자신을 향해 달릴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미수가 현우를 이해하는 이유는 미수 또한 현우처럼 세상에 내던져진 고아이며, 어딘가에 존재할지 모르는 상실한 고향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랑한다는 현우의 말은 미수의 마음에 닿지 못한다.

현우와 미수는 서로 사랑하며 기다리지만, 만남의 순간은 우연으로 이루어진다. 영화는 재회의 필연적인 장치를 설정할 수 있었음에도 우연에 의존한다. 영화는 반복되는 우연을 믿을 것이냐고 질문하는 듯하다. 확실한 것들은 믿음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믿는다는 것은 우연한 것들, 불확실한 것들 혹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연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사랑을 믿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사랑은 언제나 우연적이며, 사랑의 대상은 언제나 불확실한 존재다. 영화는 불확실한 현우를 사랑했던 미수처럼 사랑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미수와 현우의 말들은 서로에게 닿지 못한다. 미수는 현우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주기 위해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지만, 현우는 듣지 못한다. 라디오가 일방적인 매체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라디오를 같이 듣는 일은 우연적인 일이다. 그리고 말도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닿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방적이다. 나아가 사랑도, 알려지지 않은 주파수의 라디오를 동시에 듣는 일처럼 일방적이며 우연적인 일이다.

현실도 백일몽 아래 놓인다면

이 영화는 모두 과거의 이야기다. 2019년에 그들은 어떤 모습일지 우리는 알 수 없기에 이 영화의 결말에는 슬픔이 묻어 있다. ‘이들은 지금도 계속 사랑하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떨치기 어려운 탓이다. 하지만 만약에 이들이 지금은 사랑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에게는 사랑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이 기억들을 간직하는 한 이들의 현실은 그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현실은 그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우리의 기억과 관계 맺으며 구성된다. 미수의 현우에 대한 감정은 엄마에 대한 기억과 관계가 있다. 미수는 김밥을 먹여주는 현우에게 “엄마 같네”라고 말한다. 엄마가 죽고 제과점에 등장한 현우에게서 미수는 엄마를 보고 있는 것이다. 보이는 것들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뒤섞여 있다. 다시 말해 현실에는 백일몽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백일몽은 힘이 있다. 어떤 견디기 힘든 현실도, 백일몽 아래에 놓을 수 있다면 그 현실은 견딜 만한 것이 된다. 현실을 부정하거나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포괄하는 힘이다. 어떤 기억도, 환상도 없는 현실은 인쇄소의 기계들처럼 무의미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미수가 자신을 ‘후지다’라고 말한 이유는 꿈꾸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부에서 미수는 모니터 옆에 보이지 않는 현우를 그려넣는다.

미수가 현우에게 닿을 수 없는 편지를 쓴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미수에게는 현우를 떠올리는 일이 미수 자신을 현실에서 구원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현우가 자신의 삶을 구원하는 방법은 사진이었다.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시간으로부터 저항하기 위해 미수는 글을 썼고 현우는 사진을 찍었다. 사랑이 위대한 것은 시간과 투쟁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찬란하다.

영화도 결국은 짧은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현실을 담으려 노력한다 해도 카메라에 담겨 다른 곳, 다른 때에 상영되는 순간 그것은 현실이 아니게 된다. 언젠가는 깨어야만 하는 꿈이다. 그러나 이 짧은 꿈에서 깨고 난 뒤에 우리는 그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되기도 한다.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구성하게 하는 백일몽이다. 이 점에서 영화와 기억, 그리고 사랑은 서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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