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20년의 프로젝트를 기획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느린 청춘들의 보고서라고 할 법한 <슬래커>로 놀라운 데뷔를 한 이래, 여러 작품들을 통해 시간의 실험을 펼쳐온 그. <보이후드>와 <비포> 시리즈를 아울러 새로 돌입하게 될 <메릴리 위 롤 어롱>에 대한 이야기를 '시간'의 테마로 엮어봤다.
165분 동안 펼쳐진 12년의 마법, <보이후드>
2011년, 1천여 채 주택이 다 타버린 텍사스의 대형 산불 사고가 있던 날.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집도 피해를 면치 못했다. 근 9년을 진행시켜온 <보이후드> 프로젝트의 작업물(시나리오와 제작노트)이 순식간에 한 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어쩌면 그에겐 일생일대의 과업이었을 <보이후드>에 적신호가 켜졌지만, 그는 자신의 영화들이 취해온 태도처럼 의연하게 답했다. 이런 게 인생이지 않느냐고.
그러나 <보이후드>를 마주한 관객은 기대하던 것 이상으로 놀랐다. 만점에 가까운 전문가들의 찬사가 줄을 이었고, 각종 시상식에서 <보이후드>를 호명했다. 다수의 수상 소식이야 객관적 지표로 삼아볼 순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의 영화로부터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선물 받은 듯한 관객들의 표정이야말로 링클레이터 감독이 받은 답신이었다. 그다지 극적인 장치는 없음에도 어느 가정에나 있을 법한 사소하고 대단한 사건들, 이를테면 만남과 헤어짐의 순간들이나 좌절하고도 나아가야 하는 우리들이 화면에 펼쳐졌다. 관객을 울려보겠다는 노골적인 대사 하나 없이 많은 관객들은 저마다의 인생을 마주한 듯 눈시울을 붉혔다.
18년 사랑의 세 가지 국면, <비포> 시리즈
감독은 자신이 필라델피아에서 겪었던 낭만적인 경험을 모티브로 <비포 선라이즈>를 구상했다. 극중 배경은 비엔나로 바뀌었고, 여행객 제시(에단 호크)와 할머니 댁을 방문한 셀린(줄리 델피)이 우연히 같은 기차에서 만나 대화를 나눈다. 제시는 이 반짝이는 설렘이 아쉬워 셀린에게 하루 동안의 여행에 동참해줄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경계 없는 수다로 서로의 가치관을 나누게 된 하루의 시간이 <비포 선라이즈>의 100분에 차곡차곡 담겼다.
그로부터 다시 9년이 흐른 <비포 미드나잇>은 어느덧 중년 부부가 된 커플을 비춘다. 전편들에서 보여준 설렘보다 현실적인 면에 집중하고 있지만, 낭만의 지점마저 놓치지 않는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보이후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시에 8편의 다른 영화를 찍었다. <비포> 시리즈도 그 지점에 걸쳐있다. 배역과 함께 나이를 먹어간 배우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링클레이터와 함께 각본 작업에 나선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링클레이터 감독이 그린 사랑의 세 국면에 두 배우들이 당시에 품던 생각들까지 담겨있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다시 20년의 시간을 꿈꾸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시간을 영화에 녹이는 링클레이터 감독의 새로운 실험이 시작됐다. <보이후드>의 12년을 훌쩍 넘어선 20년의 대장정 프로젝트다. 미국 뮤지컬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스티븐 손드하임의 <메릴리 위 롤 어롱>(Merrily We Roll Along)을 원작으로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어쌔신>, <스위니 토드>, <숲속으로> 등의 걸출한 뮤지컬 작품을 만든 손드하임은 파격적인 형식과 빈틈없이 완벽한 음악으로 정평이 난 대가다.
<메릴리 위 롤 어롱>은 링클레이터가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한 뮤지컬이다. 재능 있는 브로드웨이 작곡가 프랭클린이 극장의 동료들을 뒤로하고 LA에서 영화를 만들게 되는데, 자신의 잘못된 선택과 실수로 소중한 주변인을 모두 잃게 된다는 내용. 그러나 이 줄거리가 따분하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뮤지컬이 역순의 시간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메릴리 위 롤 어롱>을 영화화하기로 결심한 링클레이터는 20년이라는 대담한 제작 기간을 선언했다. <피치 퍼펙트>의 벤 플랫이 주인공 프랭클린을, <레이디 버드>의 비니 펠드스타인이 그의 절친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알려졌다. <보이후드>를 찍을 당시, 감독은 주연 배우 에단 호크에게 농담 반 진담 반 "내가 죽으면 당신이 영화를 완성시켜 줄 것"을 당부했다. 60년생의 적지 않은 나이인 링클레이터가 <메릴리 위 롤 어롱>을 완성한다면 그야말로 그의 역작이 되지 않을까. 짧다면 짧을 영화 속에 기다란 인생을 담는 링클레이터의 꾸준한 작업이, 익숙함보다 흥미를 불러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귀한 능력에 경외가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