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형윤 감독은 2002년 단편애니메이션 <어쩌면 나는 장님인지도 모른다>로 데뷔한 이래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이자 대안으로 주목받아왔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독특한 상상력으로 작업을 이어가는 그의 활약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 시장에서 실낱같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 후로 벌써 17년, 두 번째 장편애니메이션 <마왕의 딸 이리샤>를 들고 돌아온 장형윤 감독의 얼굴은 마냥 밝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걸 해왔던 장형윤 감독은 지금까지 작업해온 결과물 중 가장 판타지스러운 작품을 완성한 뒤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2013) 이후 6년 만에 장편애니메이션으로 돌아왔다.
=애니메이션 제작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더 오래 걸렸다. 원래 2016년에 시작해 2년 안에 마무리하는 프로젝트로 계획했다. 2018년에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정식 개봉을 앞두고 계속 수정 중인데 희한하게 계속 수정할 게 나온다. 빨리 털고 싶은데 이리샤가 날 놓아주지 않는다. (웃음) 개봉하면서 제일 좋은 건 이 작업을 드디어 끝낼 수 있다는 거다. 프리 프로덕션까지 하면 대략 4년 걸렸고,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 두편을 하고 나니 어느새 10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마왕의 딸 이리샤>는 본격적인 판타지 동화다. 전작 <무림일검의 사생활>(2007)이나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도 판타지적인 설정을 깔고 있었지만 어디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 공간을 무대로 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100% 판타지 동화를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만 해도 한국적인 공간과 색깔이 강하다. 그런 부분을 배제하고 여기가 아닌 어딘가, 완전히 새롭고 낯선 곳으로 인물들을 데려가고자 했다. 판타지 세계관은 일단 할 수 있는 게 많고 애니메이션에 더 어울리는 무대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에 허용된 매력을 한껏 펼쳐보면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한편으론 좀더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이야기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전형적이라는 말이 와닿는다. 좋은 의미에서 <마왕의 딸 이리샤>는 ‘소녀가 다른 세계로 떠나는’ 수많은 이야기들의 흔적이 묻어난다.
=개인적으로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2006) 같은 영화를 연상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은 현실세계의 여학생이 친구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요정세계로 떠나는 이야기다. 그런데 두 세계는 연결되어 있어 요정세계에서 한 일이 현실에 다시 영향을 미친다.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가 정치역사적인 맥락까지 겹쳐 있는 반면 <마왕의 딸 이리샤>는 개인적인 성장담에 국한시키고자 했다. 전형적이라는건 이야기를 끌고 사는 힘이 강하고 공감의 폭이 넓다는 말이기도 하다. 기왕 전형적인 것을 할 거면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전작들이 한국적인 정서 위에 독특한 상상력으로 표현된 요소들이 강했다면 이번에는 보편성에 코드를 맞춘 것처럼 보인다.
=모험 성장물의 전형적인 패턴을 따라가고자 했다.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의 주인공은 어떻게 보면 하고 싶은 게 없는 수동적인 캐릭터다. 이번에는 모험극에 맞게 인물의 욕망도 부각하고 적극성도 부여했다.
-여기가 아닌 곳, 이국적인 느낌을 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일단 주인공 이름부터가 이리샤니까. (웃음) 한국 이름인데 외국 이름처럼 보이는 여러 후보 중에 골랐다. 요정세계도 처음엔 중세 판타지 느낌을 내고 싶었는데 점점 다듬어져서 최종적으로는 바로크 시대보다는 근대 유럽 정도에 초점을 맞췄다. 마왕의 디자인도 뿔이난 악마 같은 빤한 모습 대신 근대의 신사 또는 자본가의 느낌에 가깝게 그렸다. 풍자적인 건 아니었고 마네의 그림 등 근대 회화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그 와중에 장형윤 감독 특유의 색깔은 살아 있다. 예를 들면 이리샤를 요정세계로 안내하는 개구리는 전형적인 동화 속 개구리 왕자님인데 그걸 스스로 풍자하기도 한다.
=원래 짧게 치고 빠지는 유머를 좋아한다. 좋아하고 잘하는 건 의식하지 않아도 반영되는 것 같다. 전설의 기타 요정 로비처럼 정신차려보면 사물을 의인화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웃음) 음악을 중요 모티브로 사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인공들은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에 위로받는다. 다만 음악 사용이 많진 않아서 살짝 뮤지컬 느낌만 내는 것처럼 애매하게 되어버려 아쉽다. 기왕 하려면 <알라딘>처럼 해야 하는데. (웃음) 뮤지컬을 만들려면 곡에 대한 투자가 있어야 하고 스펙터클한 화면도 필요해서 현실적으론 어렵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인디음악을 사용했다. 무도회장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킹스턴 루디스카의 <My Cotton Candy>고, 이리샤가 부르는 메인 테마는 남녀혼성밴드 굿나잇스탠드가 직접 작사, 작곡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지원을 받아 6억5천만원가량의 제작비로 제작됐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최저 제작비를 생각하면 빠듯하다.
=솔직히 말해 극장 장편애니메이션은 현재 시장이 없어서 투자가 어렵다. 대개 그럴 경우 예산에 맞춰 작품을 기획하기 마련인데 나는 이제껏 예산에 맞지 않아도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왔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정도 이야기, 게다가 3D를 이 예산에 제작한다는 건 무모하다. 어차피 원하는 제작비를 모두 갖춰 할 순 없으니 할 수 있을 때 그냥 하자는 심정으로 시작했다. 회사 이름도 ‘지금이 아니면안돼’니까. (웃음) 다만 그런 도전은 이번이 마지막일 듯싶다.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의 어려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번 작품을 끝으로 장편애니메이션은 하지 않겠다는 건가.
=시장이 없으니 하고 싶은 사람이 직접 회사를 만들고 제작까지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자기 돈으로 투자해서 작업하다 망하는 거다.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한다는 점에서 도박이랑 다를 게 없다. 나는 애초에 돈이 없어서 내 돈을 투자하지도 못했을 뿐이다. 게다가 제작자를 겸할 경우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감독이 최종 결정자가 되어버리니 프로듀서나 제작자처럼 제어할 사람이 없는 것도 문제다. 내 생각에 2003년 <원더풀 데이즈>가 한국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시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 같이 작업한 사람들 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되나. 그때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는데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니 ‘지금은 안 될거 같다’. 무엇보다 현실적인 예산 문제로 장면의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돌아오는 건 한국 애니메이션의 수준에 대한 비판이 다수라 맥이 빠지고 상처받는 게 사실이다.
-아쉽지만 <마왕의 딸 이리샤> 역시 하고 싶은 건 많아 보이는데 제작비가 충분치 못해 제대로 하지 못한 흔적들이 적지 않다.
=하려고 했지만 결국 다 채우지 못하고 환경이 허락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내가 제일 아쉽지만 관객의 지적도 충분히 이해한다. 수백억원의 예산이 들어간 작품과 제작비가 10억원이 안 되는 작품을 같은 비용을 내고 봐야 한다면 당연히 같은 눈높이에서 비교할 수밖에 없다. 마음 같아서는 내 영화는 절반 가격만 받고 싶다. 내 마음대로 그렇게 할 수 없으니 기회가 주어질 때까지 이제 당분간은 다른 작업을 하겠다는 거다. 저예산으로 한다면 차라리 <바시르와 왈츠를>(2008)처럼 컨셉이 분명한 예술에 가까운 애니메이션을 하려 한다. 아니면 귀여운 동물들이 나오는 짧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용 콘텐츠를 만들 수도 있다. 지난해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에 연출전공으로 입학해 실사영화도 찍고 있다. 많이 배워 앞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더 넓혀서 돌아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