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벌새> 속 편복도형 아파트 내 공간의 위계
2019-10-02
글 : 윤웅원 (건축가)
과거가 기억되는 방식

<벌새>는 아파트 현관문을 두드리는 여학생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집 안에 있을 엄마를 부르며 문이 열리기를 기대하지만 어떤 응답도 없다. 애타는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던 여학생은 마침내, 자신이 집을 잘못 찾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진짜 집으로 돌아간다. 아파트들은 모두 똑같은 문을 갖고 있다. 사회주의를 경험하지 않는 국가인데도, 우리나라의 아파트들은 성냥갑처럼 똑같은 건물들이 남쪽을 향해 서 있는 형태로 건설되었다. 평수의 크기로 이름 붙여진, 같은 평면의 아파트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서 있다. 우리나라의 아파트가 갖고 있는 여러 특징 중 하나는 공간의 위계가 적은 건물이라는 점이다. 같은 평면의 집들이 ‘평등하게’ 존재하고 있다.

복도에 면한 방들

지금은 더이상 사용되지 않지만, 편복도형 아파트는 우리나라 초기 아파트 형식으로 흔하게 발견된다.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적게 설치하려는 경제적 의도와 도로에 면한 집들에 대한 향수와 프라이버시에 대한 시대의 무관심이 겹쳐져 만들어진 집합주거 형식으로 보인다. 편복도형 아파트는 지금의 눈으로 보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주거방식이다. 어떻게 복도에 면한 방들의 프라이버시를 완전히 무시하고 계획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보통 복도형 아파트를 계획할 때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점은, 복도 때문에 발생하는 각 집의 프라이버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흔한 해결책은 창문이 필요 없는 화장실, 창고, 주방 등은 복도쪽으로 설치하고, 방들과 거실은 채광이 가능한 반대편에 계획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법은 건물의 폭이 지나치게 얇아지는 문제가 생기는데, 편복도보다 중간에 복도를 설치해서 계획하는 이유다. 다만 중복도 방식은 절반의 집은 남향으로 배치할 수 없는 단점을 갖는다. 어쩌면 모든 집을 남향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편복도 아파트가 복도에 면한 방들의 문제를 무시하게 했던 것 같다.

어떤 목적 때문에 무언가나 희생되거나 무시되는 방식은 우리 모두가 관통해온 지난 시대의 특징 중 하나이다. <벌새>에서 학기 초에 선생님이 공개적으로 누가 ‘날라리’인지 이름을 적어내길 요구하는 장면이나, 딸들의 희생 위에 아들이 공부했다고 하는 대사들이 이 특징에 해당한다. 공간적 위계가 없는, 모든 집이 공평하게 남쪽을 바라보는 편복도식 아파트에도 여전히 사회적 계층은 존재한다. 외형적인 평등함은, 당연한 결과겠지만, 의사 집 아들과 떡집 딸이 동등하게 취급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당연하게 편복도형 아파트의 각 가정은 공간의 위계를 갖고 있다. 남쪽에 면한 공간과 복도에 면한 공간은 어쩔 수 없이 차이를 갖는다. <벌새>에서는 남쪽으로 향한 안방을 부모가 사용하고, 복도쪽에 붙은 방 두개 중 한방을 공부 잘하는 아들이, 딸 두명이 다른 방 하나를 같이 사용하는 것으로 나온다. 은희(박지후)는 중학교를 다니는 소녀다. 상가건물에서 떡집을 하고 있는 부모(정인기, 이승연), 오빠 대훈(손상연), 언니 수희(박수연)와 함께 아파트에 살고 있다. 부모의 기대를 독차지하고 있는 아들이나, 남자친구를 몰래 집으로 끌어들이는 언니와 달리 은희는 지금으로 보면 특별하지 않은 여중생의 삶을 살고 있는 아이다. 만화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남자친구를 만나고, 작은 혹 때문에 수술을 하고, 친구의 배신으로 상처를 받는다. 하지만 1994년의 은희는 노래방에 가고 남자친구를 사귄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날라리로 지명되고,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존재감 없는 학생이 된다.

은희의 일상을 계속해서 보여주던 <벌새>는 영화의 후반부 성수대교 붕괴를 통해 개인의 일상이 어떻게 사회적 사건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실재하는 사회적 사건과 개인의 삶을 영화에서 관계시키는 흔한 방식은, 그 사회적 사건에 직접 참여하는 개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서사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벌새>는 이런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벌새>에서 성수대교 붕괴 사건과 중학생 은희의 세상이 연결되는 방식은 단순하고 특별하다. 사회적 사건도 여중생 은희가 일상에서 겪는 사건의 하나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벌새>의 연기, 미장센, 카메라워크의 뛰어남에 비하면 이야기의 기본 구조는 의외로 단순하다. 여중생 은희가 겪는 일들을 차례로 나열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구조는 이야기를 인과관계 대신 개별적인 사건으로 독립시키는 힘을 갖는다. 그리고 그 덕분에,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사건이 되는, 성수대교 붕괴 같은 실제 사건도 여중생 은희의 일상과 대등한 구조가 되고 있다. 단순화해서 비유하면, 도시에서 공공건물과 개인건물이, 크기와 역할이 다를 뿐 도시의 조직을 만드는 기본 요소로서는 같은 기능을 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94년 이야기는 현재에서 본다면 기억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할 수 없음으로, 지나간 기억이란 파편화된 사건들의 연속이다. 사람조차 그 당시의 상황 혹은 감정으로 기억된다. 과거가 기억되는 방식은 이야기가 아니라 사건으로 보인다. 아니, 삶은 인과관계가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의 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감정으로 기억되었다

나는 <벌새>를 보는 동안 자주 눈물이 나왔다. 내가 여학생의 삶을 살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영화를 보는 것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것은 아마도, 다른 방식이겠지만, 은희가 느꼈던 불합리한 순간들을 나 역시 관통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벌새>는 이야기가 아니라 감정으로 기억되었다. 그것은 <벌새>가 서사보다 어떤 상황이나 감정 안으로 나를 데려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본 건물의 기억은 항상 단편적이다. 코팅 아래 보이는 마루의 진한 무늬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천장에서 쏟아지는 햇빛이나, 벽을 타고 내리는 녹 자국 같은 것들이다. 전체 구조를 보는 데 익숙한 직업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말 느끼는 것은 나를 둘러싸고 존재하는 각 순간들의 ‘현재’다.

그림으로 그린 <벌새>의 영화 포스터 배경에는 붕괴된 성수대교가 보인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그림은 1994년의 성수대교가 아닌, 현재 새로 지어진 성수대교를 바탕으로 그려져있다. 콘크리트 교각의 형태를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새 성수대교는 구조의 측면에서 보면 다소 과하게 디자인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리의 상판이 무너지는 사건을 경험한 후에 새로 건설된 다리의 운명일 것이다. 포스터 속, 상판이 잘린 새 성수대교의 이미지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무너져 버릴지 모를 어떤 세상에 살고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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