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자럴 제롬이 리미티드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지난 주말 미국 방송계의 왕좌를 가리는 에미상 시상식이 열렸다. 이미 몇 시즌 동안 많은 사랑을 받아온 작품들이 있는 반면, 새롭게 떠올라 세대교체를 이룬 작품들도 있었다. 주요 부문에서 수상의 쾌거를 이룬 드라마들 중 한국 관객들의 흥미를 돋울만한 드라마 몇 편을 소개한다.
빌리 포터
포즈 Pose
<포즈>는 1980년대 후반 뉴욕을 배경으로 볼 문화(Ball Culture)의 화려함을 비춘다. 볼 문화는 LGBTQ 커뮤니티에 뿌리를 둔 문화로 댄스와 패션 등을 겨루는 파티라고 볼 수 있다. 80년대 미국은 에이즈에 대한 공포,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던 시대다. 편견의 대상이던 그들이 유일하게 당당할 수 있었던 도피처인 하우스에서는 눈을 뗄 수 없이 화려하고 과감한 쇼가 펼쳐진다. 트랜스젠더 배우들을 대거 기용하면서부터 화제가 된 <포즈>는 소수자의 삶을 비단 핍박의 대상으로만 조명하지 않으면서, 외려 주도적인 그들의 문화를 아낌없이 드러내 보인다. 배우 빌리 포터는 <포즈>로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최초의 흑인 동성애자라는 타이틀의 주인공이 됐다.
조디 코머
킬링 이브 Killing Eve
올해 초 치러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킬링 이브>의 산드라 오가 TV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하반기에 치러진 에미상 시상식에서는 <킬링 이브>의 조디 코머에게 여우주연상의 영광이 돌아갔다. 현재 두 시즌을 발표하고 시즌 3 제작에 돌입한 <킬링 이브>는 두 여성을 주축으로 한 사이코패스 첩보 드라마다. 사이코패스 킬러 빌라넬(조디 코머)을 쫓는 일 중독자 MI6 요원 이브(산드라 오)의 추적이 계속된다. 그런데 이 <킬링 이브>를 독특하게 만드는 지점은 바로 쫓고 쫓기는 관계의 두 여성이 서로에게 강렬한 끌림, 성적 긴장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점. 선인인지 악인인지 속을 알 수 없는 정보국의 수장 캐롤린과, 사이코패스지만 살인 후엔 복잡한 표정을 보이는 빌라넬 등 <킬링 이브>는 구석구석 미묘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빌 헤이더
배리 Barry
미국 <SNL>의 스타로 익숙한 빌 헤이더는 <배리>에서 각본과 연기는 물론 첫 화 연출까지 해냈다. <배리>로 그는 지난해에 이어 2회 연속 에미상 코미디 부문 남우주연상을 꿰찼다. 해병대 제대 후 우울증에 빠져 무료하게 지내던 배리(빌 헤이더)가 '잘하는 걸 해 보라'는 삼촌의 조언에 따라 살인청부업을 시작한다. 그는 그 일을 꽤나 잘해 내지만 익숙지 않은 밤일에 다시 우울에 빠진다. 어느 날 타겟을 찾아간 건물에서 연기 지망생과 지도 선생님의 치열한 수업 현장을 본 배리는 넋이 나가고 만다. 얼결에 대타 역할까지 연기해 보게 된 배리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이 '연기'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진다. 이들과 친분을 쌓게 되면서 살인청부라는 본업에 차질을 빚게 되는 배리. 특유의 풍부한 표정으로 유머와 진지함 사이를 오가는 빌 헤이더의 연기력은 블랙코미디 <배리>를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피비 월러브리지
플리백 Fleabag
<킬링 이브>의 각본가로도 유명한 피비 월러브리지가 각본, 연출, 주연까지 맡은 드라마. <플리백>은 이번 에미상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까지 싹쓸이하며 코미디 부문의 승자가 됐다. 더러운 몰골(을 한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플리백(fleabag)은 바로 주인공의 모습을 의미한다. 진심 담긴 섹스보다 철저히 자기중심의 쾌락을 선호하고, 자신이 운영하는 폐업 직전의 카페에서는 터무니없는 가격의 음식을 내놓는 주인공. 모든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류의 인물은 아니지만 <플리백>은 복잡다단하고 개성적인 반영웅 캐릭터를 대담히 펼쳐 보인다. 도저히 애정을 주기 힘든 주인공의 자기파괴적 면모와 함께, 그의 내면에 자리 잡은 과거로 스토리가 뒤집히기도 하면서 시청자는 울지도 웃지도 못할 감정에 이른다. 피비 월러브리지에 따르면 <플리백>은 처음에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세울 1인극"에 불과했다. 남성에 굴복당하지도, 남성을 처단하지도 않는 이 여성 이야기는 지지부진한 개인 서사의 중심에 여성도 존재할 수 있다는 발견으로서도 흥미롭다.
체르노빌 Chernobyl
올해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은 미드는 단연 <체르노빌>이다. 공개 후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 시청률 52%를 기록하며 <왕좌의 게임>의 아성을 넘었다. 2019 에미상에선 19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작품상, 각본상, 연출상 수상으로 명성을 입증했다. 제목에서 짐작 가능하듯 잘 알려진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를 소재로 하는데, 연출 방식은 흡사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질 만큼 사실적이고 건조하다. 인류의 기록적 재난이라는 실화의 무게감은 고도의 집중으로 시청자를 이끈다. <워킹 데드>와 <브레이킹 배드>를 연출한 바 있는 감독 요한 렌크는 "이번만큼은 영화적 경험보다 '진실'에 집착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각본을 쓴 크레이그 메이진은 <행오버> 시리즈의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다. 누구도 편안하게 볼 수 없는 드라마가 되길 원했던 크레이크 메이진은 "원자력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것이 요점이 아니"라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치명적인 비용을 수반하며, 우리는 또 그것을 얼마나 반복할 수 있는지"를 묻고 싶었다고 말했다.
레이첼 브로스나한
마블러스 미세스 메이즐 Marvelous Mrs. Maisel
<마블러스 미세스 메이즐>은 코미디 부문 남녀 조연상과 특별출연상을 모두 가져갔다. 쟁쟁한 작품들 사이에서 주요 부문 수상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지난해 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작품이기도 했다.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마블러스 미세스 메이즐>은 부자 남편을 만나 풍요롭게 살아가는 주부 밋지 메이즐(레이첼 브로스나한)을 주인공으로 한다. 편안하기 짝이 없던 그녀의 삶에 두 가지 시련이 닥쳐 온다. 하나는 남편의 불륜이며, 다른 하나는 그 남편이 돌연 코미디언의 꿈을 이루겠다며 그녀를 떠난 것. 밋지는 술에 잔뜩 취해 무대로 뛰어들어가 관객들에게 푸념을 늘어놓는데, 이때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한 매니저와 함께 두 사람은 스탠딩 코미디로의 새로운 도전을 해 나간다. 속사포 대사로 정평 난 <길모어 걸스> 원작자 에이미 셔먼 팔라디노의 드라마답게 쏟아지는 대사들이 시종 유쾌하다. 50년대 부유층의 클래식하고 화려한 의상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는 작품.
자럴 제롬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When They See Us
데뷔 4년 차, 올해로 21세인 자럴 제롬의 남우주연상 수상은 올해 에미상이 보여준 놀라운 선택이었다. 쟁쟁한 후보 배우들을 제친 자럴 제롬은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를 통해 1980년대 미국의 통탄할만한 실제 사건의 주인공이 됐다. 일명 '센트럴 파크 사건'이라 불린 실화는 뉴욕의 할렘가에서 벌어진 백인 소녀 강간 사건에 경찰이 유색 인종 청소년 다섯을 용의자로 지목하면서 시작된다. 진범은 따로 있었지만, 6년에서 많게는 16년의 형을 살고 나온 이른바 '센트럴 파이브'의 비극은 당시 유색인종을 대하는 백인 집단의 폭력성을 무섭도록 압축하던 사건이었다. 다섯 중 넷은 소년원에 수감됐으나, 그해 16살이 된 코리(자럴 제롬)는 거친 수감자들로 가득한 어른들의 감옥에 갇힌다. 영화 <셀마>를 만든 감독 에바 두버네이가 연출했다. <문라이트>의 케빈 역으로도 눈에 띄었던 자럴 제롬은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의 단 세 편의 에피소드 출연으로도 진한 여운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