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의 경험과 10%의 상상이 담겨 있다. (웃음)” 한가람 감독은 <아워 바디>의 자영(최희서)처럼 시험을 오래 준비했고, 친구에게 소개받은 리서치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 있다. 동영상을 보며 동작을 익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달리기를 한 것도 모두 실제 그가 겪은 일이다. <아워 바디>가 한국영화아카데미(이하 영화아카데미) 장편과정의 디벨롭을 거치며 용감한 선택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이 소재가 온전히 ‘자기 것’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지난 1여년간 토론토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등 각종 영화제에서 다양한 관객 반응을 마주하며 “애초 생각한 것과 달리 한 가지 방향으로만 이해되는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는 한가람 감독을 만났다.
-영화아카데미 교수·동기들과 함께 의견을 교류하며 시나리오를 발전시켰다.
=트리트먼트 심사를 받을 때 한 감독님이 “운동하는 사람들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들었냐”고 질문했다. 즉각적으로 “연민을 느꼈다”고 답했는데 이게 영화를 만들 때 중요한 열쇠가 됐다. 원래는 훨씬 밝은 이야기였는데 실제 시나리오는 훨씬 더 무거워졌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식의 방향을 제시하는 영화가 될 수 없다는 결론도 내렸다.
-8년차 행정고시 장수생 자영의 눈앞에 달리기를 하는 현주(안지혜)가 나타난다. 그가 현주의 달리는 모습에 매혹된 것처럼, <아워 바디>의 카메라 역시 여성의 아름다운 몸에 감탄한다.
=사실 영화제에서 카메라의 시선이 불편했다고 지적하는 분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2년 전의 내가 참 용감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서로를 관찰하고 있다. 누군가 운동을 해서 몸이 달라지면 “너 살빠졌다”고 얘기하며 부러워한다. <아워 바디>는 그런 시선을 모아 채워넣은 영화다. 이성은 촬영감독과 함께 “자칫하면 사람들이 불편하게 느낄 텐데 어떻게 찍어야 할까”라는 얘기도 많이 나눴다. 우리의 고민은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면 안 된다, 섹슈얼하게 보이면 안 된다’는 것에 있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의도한 바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가 관건이었다. 촬영감독이 나보다 더 섬세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 그의 생각이 많이 녹아들어갔다. 전체적인 컨셉은 자영의 몸이 하나의 우주처럼 보이는 거였다. 그래서 근육 하나하나, 솜털까지 보일 정도로 생생하게 찍으려고 했다.
-어떤 영화제에서는 <아워 바디>를 LGBT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의도한 결과인가.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편집할 때까지 한번도 ‘동성애다, 아니다’를 선 긋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영화아카데미에서 교수님이나 동기들과 의견을 나눌 때도 그건 관심사가 아니었다. 현주가 죽고 난 후 자영이 꾸는 꿈은 그의 혼란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어떤 계산도 하지 않았다. 건강한 몸에 매료되어 그를 닮고 싶었던 자영의 감정을 따라갔을 뿐이다.
-몇번의 섹스 신이 있는데 모두 다르게 찍었다.
=<아워 바디>는 자영이 달리기를 하면서 몸이 바뀌는 이야기다.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당연히 에로스적인 측면이 들어가야 할 것이고, 섹스는 자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여줄 수 있다. 극 초반 몸을 방치하며 살던 자영에게 남자친구와의 섹스가 즐겁지 않은 것은 삶에 의욕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달리기 클럽의 민호(최준영)와의 베드신은 현주의 대사, “어린 남자애들은 자기 몸을 보여주고 싶어만 한다”는 것과 관련 있고, 정 부장(장준휘)과의 섹스는 자영의 태도가 처음과 달라진 것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호텔에서 자위를 하는 장면이 있었던 건 아니다. 한창 오디션을 볼 때 어떤 배우가 “자영이 자신의 몸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됐으니 그의 삶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다”라는 얘기를 했는데, 이 말을 듣는 순간 자영이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실현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나도 배우도 촬영감독도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용감하게 찍었다. 우리가 의도했던 바를 다 보여주지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공을 많이 들였다.
-토론토국제영화제나 오사카아시안필름페스티벌에서는 베드신 관련해 질문이 나오지 않았는데, 국내 영화제에서는 많이들 궁금해했다고. 특히 정 부장과의 섹스에 대해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들었다. 현실에서 나이 많은 남자와 젊은 여자 사이에 성립하는 권력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것이 온전히 자영의 성욕에서에 비롯된 것이라고 묘사하는 건 위험할 수 있다.
=이렇게까지 말이 나올 정도면 영화아카데미에서 1년간 <아워 바디>를 만드는 동안 누군가가 귀띔을 해줘야 하지 않았나, 왜 아무도 이걸 지적하지 않았냐는 하소연을 농담처럼 하고 있다. (웃음) 현주가 죽기 전까지는 자영의 감정을 모두 따라가며 시나리오를 썼다면, 현주의 죽음 이후에는 자영의 혼란스러움을 담았다. 그러니 초반부터 자영의 감정을 따라간 관객이라면 더욱 브레이크가 걸릴 수 있다. <아워 바디>는 운동을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거나 이렇게 살면 된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영이 진짜 부딪치고 방황하는 건 오히려 현주의 죽음 이후다. 왜 자영이 정 부장과 섹스를 했는지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현주가 나이 많은 남자랑 자는 게 성적 판타지라고 했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자영 본인에게도 분명 욕망이 있었다. 예전의 자영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해보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현주보다 더 대담하고 용감한 부분이었다.
-<박열>(2017)로 그해 영화제에서 각종 신인상을 휩쓴 최희서 배우는 영화의 아슬아슬한 지점을 잘 잡아주는 탁월한 연기를 해냈다.
=최희서 배우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내기보다 질문을 많이 하는 배우다. 촬영 시작 후에는 실제 어머니와 관계가 어떤지 등등 개인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내가 처음에 시나리오에 어떻게 썼든 자영은 최희서 배우에게 맞는 자영이가 됐으면 했다. 그게 이 영화의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길이다.
-<우리집> <벌새> <메기> 등 여성감독이 연출한 독립영화가 연이어 개봉하고 있다. <아워 바디>가 동시대 여성 관객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으면 좋겠나.
=처음에는 큰 포부가 있었지만, 영화제에서 다양한 반응을 접한 후 소박해졌다. 영화를 어떻게 봐줬으면 하는 마음보다는 일단 영화를 보시고 받아들여지는 대로 느끼셨으면 한다. 자영처럼 밖에 나가서 혼자 뛰어본 적 있는 분이라면 이 영화를 꼭 봐주셨으면 한다.
-영화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에는 방송국에서 일했다고.
=청소년 영화제도 나가고 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했지만, 집안 반대도 심했고 영화과를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회학과에 들어간 내가 영화과에서 영화를 배운 친구들이 찍는 극영화를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대신 카메라 한대만 있으면 찍을 수 있고 극영화와 다른 매력이 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다. 방송국 정규직 시험을 봤지만 면접에서 계속 떨어졌고 비정규직으로 4년 정도 일했다. 같이 언론 고시를 준비한 친구들이 글을 쓰면 잘 쓸 것 같다고 권해서 취미로 시나리오를 쓰다가 운 좋게 단편영화를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때 함께한 스탭들이 영화아카데미를 소개해준 거다. 이미 서른이 넘었던 나로서는 정규직 PD로 입사할 수 있다는 희망도 없었고 더 잃을 것도 없다는 생각에 지원했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
=좀 줏대가 없는 말일 수도 있는데, 그저 많은 것을 해보고 싶을 뿐 뭔가를 하고 싶다고 고집하는 건 없다. 요즘 수영을 배우고 있는데 반농담처럼 수영영화를 찍고 싶다는 말을 한다. 그러면 주변에서 미래를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 철인 3종 경기처럼 나중에 자전거 타는 영화가 나오는 게 아니냐고들 놀린다. (웃음) 영화아카데미 졸업 후 시간이 나서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 요즈음의 삶이 오히려 더 <아워 바디>에 가까워서, 지금 다시 영화를 만들라고 하면 더 풍족하게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운동하는 여성의 몸은 충분히 영화로 더 다뤄볼 만한 소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