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뉴스]
걸작이냐 문제작이냐, 호불호 엇갈린 2019 개봉 영화 4편
2019-10-16
글 : 심미성 (온라인뉴스2팀 기자)

어쩌면 지금 가장 첨예한 논쟁의 영화는 <조커>다. DC 코믹스의 오랜 역사를 누구보다 큰 존재감으로 지켜왔던 슈퍼 빌런 조커. 그의 내면에 악이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내밀한 탐구가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에 담겼다. 그러나 평단과 관객의 반응은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다. <조커>보다 더 먼저 개봉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와 더불어 올해 극장을 방문한 <서스페리아>, <미드소마>에 쏟아진 엇갈린 반응들을 살펴봤다. 해외 영화 사이트 로튼토마토의 평을 참고했다.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하는 <조커>

역대 가장 음울한 조커 영화가 탄생했다. 토드 필립스의 연출과, 호아킨 피닉스의 명연을 입은 <조커>는 끝내 사회에 포섭되지 못한 외톨이가 어긋난 방향으로 자기 존재감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다뤘다. 2019년 베니스국제영화제의 최고상을 수상한 이례적인 기록은 영화에 커다란 호기심을 불러왔고, 개봉 직후 쏟아진 반응들은 둘로 나뉘었다. 조커를 연기하기로 지명됐다면, 전 세계인 앞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과 같은 부담을 수반한다. 그 면에서 호아킨 피닉스는 만점 짜리 성적표를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외 평단은 “그의 모든 행동을 옳다고 느낄 정도로 똑똑한 연기였다” “조커라는 캐릭터가 받을 평생의 질의에 완벽하게 답한 피닉스” “그저 오락과 도발의 상징이었던 코믹스의 악당에게, 피닉스는 끔찍하도록 인간적인 얼굴을 가져다주었다” 등 연기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마도 이건 <조커>를 좋아하지 않는 관객이라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더불어 마지막 평가가 언급한 대로, <조커>는 기존 오락영화의 틀을 과감히 벗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 평론가는 “토드 필립스와 호아킨 피닉스는 코믹스 영화를 재창조한 공로를 인정받아 마땅하다. 단독 영화로서, 이 장르가 할 수 없던 다른 곳으로 데려간 훌륭한 영화”라고 평했다.

<조커>는 유해한 영화인가?

그렇다면 다른 반응이 나온 건 어째서일까. <조커>는 크게 세 가지 면에서 저평가되고 있다. 하나는 토드 필립스가 <조커>의 레퍼런스로 삼았던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 <코미디의 왕>으로부터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영화들의 파생에 불과하면서, 결코 그 영화보다 낫지 않다는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기존의 코믹스 무비가 유지한 미덕을 잃었다는 평가다. 토드 필립스의 방향 선회는 수용자에 따라 양날의 검이 된다. 누구에게는 신선한 돌파구일 테고, 누구에게는 정통성을 잃은 영화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커의 살인이 친절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정당한 복수처럼 비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 이것은 다시, <조커>가 다루고 있는 광기의 서사가 세상의 외로운 이들을 자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실제로 호아킨 피닉스는 기자들로부터 “영화를 관람한 인셀(incel, 비자발적 순결주의자)들의 모방 범죄로 이어진다면”이라는 식의 질문을 받고 당황해 잠시 자리를 떠난 적도 있다. 영화가 담고 있는 잔혹함의 수위는 물론 10대 관객들에게 정서적 영향을 미칠 충분한 여지가 있어, 특히 15세 관람가로 개봉한 한국 내부에서도 우려가 나오고 있다.

타란티노의 사적인 연애편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쿠엔틴 타란티노의 9번째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이하 <할리우드>)는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타란티노 감독이 10편의 영화를 만든 뒤 은퇴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이후 큰 관심 속에 제작됐다. 이제 단 한 편의 영화만을 남겨둔 이때, 한 평론가는 “<할리우드>라는 걸작을 만들고도 하나의 아이디어가 더 남았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북미 선공개 후, 이소룡을 필요 이상으로 희화화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됐고 유족의 소송까지 이어지는 혼돈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의 지지는 단단했다. 영화는 LA 할리우드의 화려한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했던 온갖 사건들을 엮어, 1969년이라는 시대를 그리는 직물을 짜고 있다. 많은 이들이 감동한 부분은 타란티노가 잘 하는 것, 각종 재료를 혼합해 그의 시선대로 조합하는 완벽한 난장판이다. 해외 평단은 “타란티노는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자신을 확실하게 매료시키는 세상을 유쾌하게 펼친다” “완전히 터무니없고, 방향 감각도 없으며, 무책임하고, 훌륭하다” 등의 평을 보냈다.

<할리우드>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그간 타란티노의 영화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정서가 녹아있다는 점에서다. <할리우드>에 지지를 보낸 이들은 “9번째 영화의 특징은, 아마도 지금까지 가장 사려 깊고 개인적인 타란티노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타란티노의 작품 중 가장 성숙하다”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고 극도로 우울한 오락영화. 모든 예술이 결국 어떻게 사라지게 됐나를 돌아보는, 지난 시대에 부치는 헌사”라는 평가를 내놨다.

왜 타란티노는 1969년이어야 했을까?

한결 성숙함이 엿보인다고는 하지만, 타란티노의 영화가 어디 성숙하기만 하겠는가. 그의 영화가 입에 맞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평단은 “허구와 역사를 교묘히, 자신 있게 섞어 놓기는 했다. 하지만 그 혼합으로 무엇을 원했는지 의문이다” “관객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라 주장하는 이 영화는 사실상 관객의 멱살을 잡고 있다”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뻔뻔스럽도록 역사를 조작하고, 잘 닦인 장르의 탈을 씌우는 자가 타란티노다. 그렇게 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은 요만큼의 풍자와, 요만큼의 힘찬 포옹, 요만큼의 가짜 브로맨스뿐이다” 등의 불호 의견도 존재한다.

어떤 평단은 그의 오락영화에서 엽기적인 맨슨 살인 사건을 재료로 소비하고 있다는 점에 불쾌를 드러내기도 했다. “맨슨 살인 사건을 시트콤 패러디로 비웃으려는 시도는 물론, 모든 경험이 당황스럽다”는 평을 밝혔다. 또 다른 불만 하나는 타란티노의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유쾌하게 읽힐 수 있다. “타란티노가 1969년 이야기를 하려고 결정한 이유의 일부는 클래식 카, 레트로 의상, 빛나는 맨발의 히피걸들, 마약 등의 액세서리가 너무 멋있기 때문이라고 의심하게 된다”고 말한 평단도 있었다. 타란티노가 매력을 느끼는 지점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는 질문이다.

전후 독일에 관한 어두운 동화, <서스페리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서스페리아> 리메이크 도전이 기대를 불러 모았다. 전작 <아이 엠 러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등의 작품으로, 그의 장중한 욕망의 세계관을 탐닉하는 팬이 크게 늘었다. 게다가 라디오 헤드의 보컬 톰 요크의 음악감독 참여도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기대치를 고조했다. 그러나 공개된 이후 평가는 엇갈렸다. 그의 팬들마저 이 영화를 보고 당황하곤 했으니까. 우선, 그의 영화 중 가장 난해하다는 <서스페리아>임에도 찬사를 보낸 평들을 보자. 지지를 보낸 평단은 “독일의 전후 현실에 바탕을 둔 아름답고 깊은 울림의 페미니스트 동화”라면서 역사와 공포를 엮은 ‘바디 호러’에 매혹됐다.

또,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지 궁금해하며 비틀거린 채 극장을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일부 사람들을 소외시킬 수밖에 없는 영화다. 그러나 심리 공포의 새 물결을 가져왔고, 컬트 영화에 대한 존경이 있는 사람들은 마지막 춤에 매료될 것이다”고 하면서,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분명한 매력이 있는 작품임을 시사했다.

<서스페리아>는 원작을 훼손했나?

2시간 3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서스페리아>는 공포영화의 관객을 익숙한 공포로 몰아넣지는 못한다. 도리어 두드러지는 것은 선정성이라고 비난하는 평단도 있었다. “심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대신, 관객들에게 충격과 대담성을 보여주는 데 더 큰 관심을 보인다”는 평에서 엿보인다.

또, 유명 원작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원작을 숨 막힐 정도로 경건하게 대하는 바람에, 원작 속에 있는 모든 멜로와 순수한 공포를 잃어버렸다”거나, “원작에 야심찬 경의를 표했지만, 공포의 스릴은 고갈됐다. 지적인 시선 그 이상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반응도 나왔다. 이 같은 반응은 원작을 알면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원작 <서스페리아>(1977)는 이탈리아 지알로 호러의 대명사다. 지알로는 시각적으로 화려함을 추구하는 대신 서사의 개연성이나 무게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개성을 가진 장르이기 때문에, 구아다니노의 지적인 접근이 무리라는 말이 된다. 실제로 원작의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는 구아다니노의 리메이크작을 보고 “쓰레기”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한여름 백야의 악몽, <미드소마>

전작 <유전>에 쏟아진 평단의 찬사로, 아리 애스터 감독은 공포영화계의 신성으로 지목됐다. 그러나 야심 차게 발표한 그의 차기작 <미드소마>는 결코 일반 대중을 겨냥한 공포영화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유전>에 열광했던 팬들의 난감함과, <미드소마>로 한 발짝 더 나아간 아리 애스터의 지지로 반응은 엇갈렸다. 이 영화가 무대로 삼고 있는 공포의 공간은 목가적인 풍경의 스웨덴 마을이다. 한 평론가는 “이 악몽이 더 불안한 이유는 밝은 태양 아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두움이라는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피해, 아리 애스터는 한층 어지럽고 몽환적인 호러를 탄생시켰다. “몽환적인 색에 흠뻑 젖은 미적 감각과, 공포, 유머가 어우러져 불협화음을 낸다” “아리 애스터의 통제력은 놀랍다. 극악무도한 은유와 암시로 그는 주인공들 사이의 틈새를 넓힌다”는 찬사도 이어졌다.

<미드소마>는 공포인가, 고어인가

그러나 <미드소마>를 채 다 보기도 전에 극장 문을 빠져나간 관객 또한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단순히 평범한 공포영화를 기대한 관객들이 낯선 영화에 당황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잔혹하고 기괴한 장면이 적나라한 몇몇 지점에서 현기증을 느낀 관객도 상당수일 테다. 영화 속에서 기묘한 종교 공동체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의식들을 거행한다. 일부만 거론하자면 이들 집단은 순환의 논리에 따라 아흔의 나이가 되면 자살식을 거행하는데, 자살이 실패했을 경우 타인이 직접 돕기까지 하는 장면도 나온다.

<미드소마>를 지지하지 않는 평단은 “자살, 은혜로운 살인, 광기, 나체, 종교적 히스테리,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향연이다. 그러나 충격을 준다는 것 이외에 다른 존재 이유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잔인함과 냉혹함뿐, 괄목할만한 호러의 방식은 갖추고 있지 않다” “아리 애스터는 깜짝 놀라게 하는 대신, 혐오스러운 광경으로 충격을 주려 한다”는 등 영화의 잔인한 자극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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