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메기>, 자유로운 목소리와 속박된 몸
2019-10-16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구덩이의 비유

<메기>를 수식하는 대표적인 단어는 ‘재기발랄한 상상력’, ‘새로움’ 같은 것들이다. 평가의 주된 이유는 영화가 보여주는 유희적인 코드 때문이다. 유희의 감각은 전혀 다른 것들이 유사성의 목록 속에 배치되면서 두드러진다. 교회의 붉은 십자가와 병원의 녹색 십자가. 비슷한 색깔과 두께의 손반지와 발반지. 엑스레이와 우주선. 한국어, 영어, 한자어로 표현된 사직서. 그럴듯한 동시에 황당무계한 유사성과 차이가 웃음을 유발한다. 그런데 이러한 유희성의 형식들은 과연 생각만큼 새로운 걸까. 윤성호와 곡사를 들어 ‘유희적 모더니즘 세대’라고 통칭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문관규, ‘한국 독립영화에 나타난 자기반영적 미학과 희극 전략 연구’, 2012), 이들의 영화는 2000년대 작품들이다. 유희성을 분석할 때 활용된 자기반영성의 코드는 그보다 오래되었다. 우리는 마치 돌림노래 같은 유희성의 환영에 현혹되는 것은 아닌가. 유희성이 정말로 새로운 것이라면 우리는 유희의 변화상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이옥섭 감독이 <메기>에 유희성을 기입하는 방식은 윤성호의 방식과 유사하다. 동어반복적 코드, 감독의 출연, ‘다양한 갈래의 이야기가 뒤섞이면서 통합되어 한편의 텍스트를 만드는’ 것 등이 두 감독의 영화 세계가 공유한 지점이다. 다만 <메기>는 윤성호처럼 순수한 유희성을 지향하는 대신, 유희성의 코드와 현실의 지표를 나름의 방식으로 충돌시키려 한다. 여기에서 <메기>의 개성이 나온다.

진리는 고정되지 않고

가령 이런 것이다. 병원을 발칵 뒤집어놓은 일명 ‘섹스레이’(SEX-ray) 사건은 그 노골적인 모양으로 인해 웃음을 유발하지만, 이후에 사건을 푸는 방식에 있어서 현실적인 발언이 첨가된다. 그러면서도 유희성을 끝내 잃지 않는다. 엑스레이를 찍은 사람 대신, 찍힌 사람이 누구인지를 더 궁금해하는 양상은 익명의 피해자에게 더 관심을 두는 현실 세태를 반영한다. 그러나 단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제3의 항으로서 기입된 관객의 위치 때문이다. <메기>는 처음부터 찍힌 사람을 명확히 보여주지만, 누가 찍었는가는 전혀 보여주지 않기에 관객의 입장에서 궁금해지는 쪽은 찍은 자이다. 찍힌 자를 궁금해하는 태도가 비윤리적이라면, 찍은 자를 궁금해하는 태도는 윤리적일까. 사건 바깥의 우리는 단지 숨겨진 어떤 것을 알고자 하는 욕망에 좌우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영화는 관객을 고민하게 만드는 대신 윤리적인 자리에 붙박아둔다. 우리는 그 사진이 자신의 것이라고 오해하는 한 커플을 따라가게 된다. 그들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진이 정말 그들의 것인지 아닌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다. 윤리적인 자리는 유희할 수 있는 자리와 다르지 않다. 관객의 자리는 근심하는 커플이 아니라 어떤 목소리와 대등한 위치에 놓인다. 우리는 외화면에서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약간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면서 “그건(그 사진은) 너희들 것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의 심리와 상황을 정확히 꿰뚫는 논평을 내놓는 이 이상한 내레이터가 누군지는 나중에야 드러난다. 카메라의 시선이 병실 한쪽에 놓인 각진 어항 속 메기에 머무는 순간, 목소리의 주인공은 발랄하게 자신을 소개한다. “저는 메기입니다.” 이것은 허무맹랑해서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한편, 목소리와 실체의 충돌로 인해 얼떨떨한 기분을 안긴다. 관객을 안내하던 전지전능한 목소리가 겨우 수족관에 갇힌 메기라고? 물론 영화 속 메기는 다른 평범한 메기와 달리 지진을 감지하면 물 밖으로 튀어오르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런데 그 기능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위한 것일 뿐, 메기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수동적인 메기의 현 상태를 개선해주지 못한다. 포박된 육체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전지전능한 목소리의 충돌. 그리고 싱크홀을 예고하는 메기의 튀어오름. 메기와 싱크홀의 조합은 우리에게 또 다른 구덩이 하나를 기억하도록 만든다. 동굴이라는 이름의 구덩이 말이다. 플라톤은 진리를 깨닫기 전 인간의 상태를 동굴 속에 포박된 채 실체의 그림자만을 보는 죄수에 비유한 바 있다. 메기를 통해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다시 생각할 때, 일종의 전환이 일어난다. 진리를 보지 못하는 죄수와 달리, 메기는 속박되었으되 진실을 누구보다 더 많이 아는 존재다. 영화는 관객과 메기를 동일한 시선의 관찰자로 설정한 뒤, 메기의 현재 위치를 뒤늦게 노출하면서 관객이 처한 상황을 풍자적으로 드러낸다. 동굴 속의 사람들에게 ‘교육’이 필요했던 것처럼, 관객에게도 ‘믿음 교육’이 필요하다. 이 교육이 단일한 진리로 귀결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윤영(이주영)과 경진(문소리)이 벌이는 첫 번째 믿음 교육은 특정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비슷한 행동을 했을 때, 고정관념에 따라 추측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곧이어 한눈에 봐도 ‘조폭’처럼 보이는 남자가 피 흘리며 수술대에 올랐을 때, 그 상황은 예측을 빗나가지 않는다. 관념에 관한 것일 때는 자신의 생각을 의심해야 하지만, 나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는 상황에 처했을 때는 자신의 직관에 따라 의심하고 행해야 한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리는 고정된 것일 수 없고 유동적이라는 것이 이 믿음 교육이 주는 교훈이다.

메기의 시선을 연습하기

유동하는 진리의 움직임과 함께 동굴 역시 인간을 고정시키는 평지가 아니라 끝없이 빠져들어가는 구덩이, 싱크홀이 된다. 그런데 이 구덩이는 어딘가 수상쩍다.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더 파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이 문구는 영화 초반 윤영이 발견하는 작은 메모로, 경진이 윤영에게 들려주는 글귀로 반복된다. 이상한 건 이 문구를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윤영은 구덩이에 빠진 자이기보다는 구덩이 바깥에 있는 자라는 사실이다. 나아가 윤영은 구덩이에 누구를 묻어야 할지 선택하는 자이기도 하다. 영화의 초반부 윤영이 문구가 적힌 노란 메모지를 구덩이 속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이 말이 정말 필요할 구덩이 속의 누군가에게 메모를 전송하는 행위와도 같다. 그 메모의 수신자는 영화의 말미에 드러난다. 구덩이를 바라보는 윤영을 보여주는 장면은 성원(구교환)이 끌려들어간 싱크홀을 바라보는 윤영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과 쌍을 이룬다. 앞선 장면에서 구멍을 들여다보는 윤영을 수평적인 위치에서 바라보던 카메라는, 이번에는 싱크홀 구멍 속에서 바깥의 윤영을 올려다본다. 이 위치가 당황스러운 건 관객은 방금 “전 여친을 때린 적이 있다”고 당당히 말하는 성원을 마주하는 동시에, 그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지 않고 파묻어버리는 영화의 선택을 목격한 참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구덩이에 빠진 성원을 보며 유희할 준비가 되어 있던 관객을 몸소 싱크홀 속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요약하자면, <메기>는 구덩이 밖에서 관찰하던 관객을 구덩이 속으로 던져놓고 끝내는 영화다. 이제 관객은 영화관의 안락한 자리에서 벗어나 행동을 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이미 알고 있다. ‘구덩이를 더 파는 대신, 구덩이에서 얼른 나오기.’ 그렇다면 어떻게? 거기에 답은 없다. 그래도 우리는 방금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메기의 시선을 연습한 참이다. 일단은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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