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20년이 지나 우리에게 당도한 <아이언 자이언트>가 현재에도 유효한 이유
2019-10-23
글 : 나호원 (애니메이션 평론가)
불시착과 집단 히스테리

<아이언 자이언트>를 접하는 순간, 우리는 두개의 과거 시간대 사이에 놓인다. 하나는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시기인 1999년, 즉 세기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1957년, 즉 냉전의 긴장이 한껏 팽팽해지던 때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21세기의 첫 20년에 다다르고 있다. 주인공이 겪는 1957년과 우리가 살고 있는 2019년 현재 사이에는 대략 60년, 그러니까 두 세대의 간극이 있고, 작품이 제작된 해와 아이언 자이언트가 지구에 불시착한 시기 사이에는 약 40년의 차이가 있으며, 첫 개봉 시기에서 2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영화관에서 이 작품을 접할 수 있다.

연착된 시간이 야기한 착시효과

그렇다면 <아이언 자이언트>는 뒤늦게 비로소 우리에게 당도한 것일까? 물론이다. 연착된 시간이 제법 길다. 그사이에 시네마는 바뀌었다. 물론 새로운 시네마는 <아이언 자이언트> 이전에 시작되었다. 바로 <토이 스토리>(1995)에 의해서 말이다. 영화가 100살이 되었을 때, 시네마는 더이상 광학적 카메라와 감광유제를 코팅한 필름에 의지하지 않고도 움직이는 환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움직이는 이미지를 0과 1의 데이터값만으로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토이 스토리> 또한 올해 네 번째 이야기를 선보였다.

<아이언 자이언트>가 개봉되었어야 할 1999년 당시, 영화는 가상 현실과 실제 현실 사이의 호접몽에 열광하며 세기말의 분위기를 북돋웠다. 그리고 21세기가 시작되자마자, 영화는 돌연 에픽 판타지 시리즈를 연달아 선보이며 새로운 세기의 신화를 펼쳐냈다.

그사이에 애니메이션은 컴퓨터의 도움 없이는 더이상 제작이 불가능한 프로젝트가 되었다. 픽사는 승승장구했고, 디즈니는 허우적거렸으며, 드림웍스는 시행착오 끝에 제정신을 차리는 상황이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으니, 아이언 자이언트가 롤모델로 삼고자 했던 ‘슈퍼맨’은 물론이고, 그를 능가하는 슈퍼히어로들이 만화를 찢고 나와 스크린을 누비고 다니고 있으며, 아이언 자이언트보다 더욱 강력하게 지구에 불시착한 트랜스포머 로봇들 또한 나름대로 변신 재롱을 부리며 극장 안을 휘젓고 있다.

어쩌면 <아이언 자이언트>가 제때에 영화관에 도착하지 못한 까닭도, 그리고 그로 인해 때론 ‘저주받은 걸작’으로, 때론 ‘안타까운 전설작’으로 추앙받는 이유도 <아이언 자이언트>의 작품 속 상황과 고스란히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불시착이다. 누구도 예견하지 못한 불시착, 그리고 여전히 베일에 싸인 불시착 이전의 상황. 로봇 ‘아이언 자이언트’와 작품 <아이언 자이언트>는 그렇게 내던져졌다. 누군가는 갑자기 내리꽂힌 거대한 것을 두려움으로 바라보았고, 누군가는 호기심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미지의 것은 선명하게 흔적을 남기면서 이동하지만, 의외로 쉽게 자신을 숨긴다. 못 찾는 것일까, 안 찾는 것일까? 못 본 것일까, 안 본 것일까? 무엇을? 거대한 로봇 아이언 자이언트의 존재를? 아니면 그 이야기를 담은 장편애니메이션 <아이언 자이언트>를?

늦춰진 개봉 시기는 이 작품을 더욱 아련하고도 미묘하게 만든다. 지연된 20년은 <아이언 자이언트>를 1999년 작품이 아니라 1957년 작품으로 보이게끔 착시효과를 이끌어낸다. 물론 이 작품의 컨셉이 1950~60년대를 풍미한 카툰애니메이션 스타일을 따르고, 당시의 문화와 시대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 오히려 이 작품의 실제 제작연도인 1999년을 불현듯 상기시키는 것은 3D 모델링으로 기본 형체를 잡은 아이언 자이언트가 불쑥불쑥 두드러지게 튀어 보일 때이다. 이러한 ‘갑자기 툭 튀어나온’ 3차원 아이언 자이언트의 이질적인 모습은 2차원 카툰 랜드에 사는 지역주민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을 이어준다. ‘우리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라고….

‘너무 늦은’ 작품은 없다

기이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뒤틀린 시간대는 작품 속 사건이 펼쳐지는 시간과도 연결된다. 불시착, 발견, 은신, 추적, 도피, 은신, 재추적, 재도피, 발견, 포위, 폭파… 그리고 그사이에 전개되는 소년과의 우정부터 마을 주민들의 공포, 급격히 전파된 신뢰, 이를 부정하는 정부와 군대의 불신, 거룩한 희생. 이 모든 일이 며칠 동안에 벌어진 걸까? 보여지는 것만으로는 최소 3일, 넉넉잡아야 일주일…. 무엇이 이토록 거대한 소동을 낳았고, 그 소동을 폭풍처럼 전개시켰을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시 1957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작품의 첫 장면을 복기해야 한다. 지구를 돌고 있는 위성, 바로 냉전의 ‘무시무시한’ 적국, (구)소련이 쏘아올린 인공위성 ‘스푸트니크’가 24시간 내내 자신들을 샅샅이 훑고 있다는 공포감이 지배한다. 그리고 그 공포를 더욱 부풀리고 일상 속에서 몸으로 익히도록 하는 것은 ‘적의 핵폭탄 공격’에 대비한 대피 훈련이다.

냉전 시대의 집단 히스테리, 집단 광기가 아이언 자이언트를 괴물로 바라보게끔 만들었고, 대규모 군사작전을 신속하게 이끌어냈다. 속전속결. 항공모함이 이동하고, 전투기가 날아가고, 미사일이 발사된다.

<아이언 자이언트>를 1999년이 아니라 1957년에 더 가깝도록 옮긴 힘 중에는 스탠리 큐브릭의 1964년 작품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가 한몫을 차지한다. 그리고 1957년과 1964년 사이의 현실 세계에서는 쿠바의 미사일 위기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아이언 자이언트>는 1999년 관객 중에서 부모 세대를 겨냥한다. 집단 히스테리를 어릴 적에 겪은 이들에게 소동은 추억으로 자리 잡는다.

그렇다면 <아이언 자이언트>가 1999년으로 돌아올 방법은 없는 걸까? 물론 있다. 실마리는 자신의 운명과 직면한 아이언 자이언트의 마지막 결단에서 나온다. ‘난 총이 아니야!’ 1999년과 마주하는 지점은 아련한 추억이 아니라 비참한 현실에 있다. 영화 개봉 몇달 전, 컬럼바인고등학교 총기난사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건 이전부터 충격적인 총기사건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였다. 자녀 세대 관객에게 아이언 자이언트의 고뇌는 현재의 아픔과 현실의 고통과 맞닿는다. 이 작품은 당시 관객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아니면 끔찍한 사건을 되살아나게 하는 공포였을까?

시간은 흘러갔다. 세기말을 지나는 동안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세계 정세와 미국의 위상은 급격히 변해왔다. 인간의 역사가 이제껏 그러했듯이, 변화는 더욱 가속페달을 밟는다. 1만년 동안의 변화보다 지난 100년의 변화가 더 가파르게 진행되었듯이, 1957년부터 1999년까지, 42년 동안의 변화보다 1999년부터 2019년까지, 20년 동안의 변화가 더 가파른 기울기를 갖는다. <아이언 자이언트>는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예상한 시간보다도 조금 늦게 찾아오기는 했다. 그렇지만 늘 그렇듯, ‘너무 늦은’ 작품은 없다. <아이언 자이언트>는 특히 그러하다. 집단 히스테리는 어느사회에서나 항상 잠복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족: <아이언 자이언트>의 원작을 쓴 시인 테드 휴스는 완성된 작품을 보지 못하고 그 전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그의 책을 함께 읽어볼 시간이긴 한데, 애석하게도 한국어 번역 그림책은 절판된 상태다. 이래저래 우리가 ‘무쇠 인간’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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