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웃는 남자
2019-10-23
글 : 김혜리

*<조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다큐멘터리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올해 부산에서 본 가장 과감한 한국영화다. 영화의 중심에는 어린 시절 가족에게서 버려진 후 40년 동안 의정부 기지촌에서 미군 위안부로 살아온 인순이 있다. 공동연출자 김동령 감독과 박경태 감독은 인순이 자발적으로 진술하는 것 이상의 스토리로 행간을 채워 주제를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의정부 뺏벌을 맴도는 유령과 저승사자를 불러낸다. 그리고 극화된 인터뷰와 아름다운 문학적 내레이션으로, 무당이 신목(神木)을 꾸미듯 영화를 친친 감는다. 층이 다른 다양한 리얼리티가 눈 깜박이듯 이어지는 영화의 구성은, 살아남기 위해 유실되고 파편화된 인순의 기억을 쓸어담는 보자기로 썩 잘 어울린다.

10/10

<조커>의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광대다. 그러나 웃음은 아서에게 불행의 시작이자 끝이며 원인이자 결과이다. 학대받는 아들을 방치하며 “그래도 행복하길” 무책임하게 바랐던 어머니 페니(프랜시스 콘로이)가 붙인 ‘해피’라는 애칭은, 성인이 된 아서에게 강박관념이 된다. 그래서 그는 특별한 재능이 없음에도 구태여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꿈꾸며 광대 일로 생활비를 번다. 남을 웃기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서는 보통 사람과 다른 포인트에서 웃는다. 긴장성 발작에 가까운 그의 웃음은 한번 터지면 멎지 않아 공공장소에서 곤란한 상황을 만든다. 마침내 관객은 의심한다. 이 사람은 울고 싶을 때 웃는 걸까? 호아킨 피닉스는 정말 흐느끼는 동시에 폭소한다. 아서가 세상으로부터 얻어내는 데에 성공하는 웃음은 비웃음뿐이다. 토드 필립스 감독의 각본과 연출은, 사회로부터 무시당하고, 감정적 성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 중년 남성이 폭력적 출구를 찾기까지의 하강일로를 밀어붙인다.

전통적으로 악당 조커의 차별성은 사연이 없다는 점이었다. 팀 버튼이 <배트맨>(1989)에서 조커에게 잭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불평을 살 만큼. 어디에서 왔고 어떤 연유로 범죄에 뛰어들었는지 설명되지 않는 존재는 바닥 없는 공포를 낳는다. 조커는 구체적 개인이라기보다 의인화된 혼돈이다. 한편 코믹스와 이전 배트맨 영화에서 조커는 어떻게 익혔는지 알 수 없는 탁월한 범죄 수완으로 무수한 추종자가 따르는 특급 악당이기도 하다. <다크 나이트>(2008)의 히스 레저는 이 컨셉을 훌륭히 연기했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 두 가지를 포기하고 <조커>의 아서를 사연 덩어리 캐릭터로 썼다. 심지어 브루스 웨인의 이복형제일 가능성도 뿌려놓았다. 후속 작품을 의식한 듯 둘 사이 혈연의 가능성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처리됐다. 병원의 서류는 아서가 웨인가의 사생아가 아니라고 입증하지만 위력에 의한 조작 가능성은 남는다. 나중에 아서는 어머니가 남긴 사진에 적힌 토머스 웨인의 이니셜을 발견하는데 이는 반대로 망상을 앓는 페니의 글씨일 수도 있다. 후반의 후반에야 조커의 정체성을 입는 아서는 주도면밀한 범죄자가 아니다. 고담시 폭동을 포함해 극중 그의 범죄 중 계획된 것은 없다. 제작진의 인터뷰에 따르면 호아킨 피닉스의 아서 플렉은, 이후 DC 영화에서 배트맨과 대결한 조커와 별개 인물일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

초능력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조커>의 액면은 슈퍼히어로 무비가 아니다. DC 유니버스와 연결고리를 짓는 대목을 제외하면 <분노의 피에로>나 <선동자> 같은 제목을 붙여 심리 스릴러나 호러로 개봉해도 통할 정도다. <조커>를 보자마자 기존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영화와 매우 다르다는 느낌을 받은 다른 이유는 오늘에야 깨달았다. <조커>는 일반적 슈퍼히어로 장르영화들과 달리 액션이 쾌감의 중심에 있지 않다. 이 영화에서 살인의 시각적 묘사는 서슴없지만 카타르시스를 목적으로 양식화돼있지 않다. 폭력은 투박하고 역겹게 그려졌고 아서 플렉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에서 만나면 뒷걸음질칠 만한 인물이다. 폭력과 그 주체를 ‘미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토드 필립스는 선은 넘지 않았고, 호아킨 피닉스로 말하자면 원래 관객의 호감을 자본 삼아 연기하는 부류의 배우가 아니다. 토드 필립스의 시나리오와 연출이 논란을 부르는 까닭은, 아서가 파괴적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의 불가피성을 설득하기 위해 지나치게 열심이기 때문이다. 아서는 거리의 10대에게 뜬금없이 린치당하고, 정부가 제공하는 정신상담 및 약 처방 서비스도 예산삭감으로 중단된다. 궁지에 몰린 아서의 손에 때마침 촉매로 권총이 들어오고, 다름아닌 실직한 날 밤 지하철역에서 세명의 화이트칼라 남자들이 저열한 시비를 걸어온다. 음향도 한몫한다. 영화 초반 배음으로 깔리던 사운드 트랙 속 위협적인 음향은 점점 수위를 높여간다. 아서가 심리상담을 받는 두 장면에서 연신 울리는 옆방의 전화벨은, 공무원 인력축소를 보여주는 기능을 넘어 관객의 신경을 갈아세운다. 잘 맞물리지 않거나 지나치게 노골적인 플롯을 대신해 인물의 변화를 비언어적으로 설득하는 것은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 흔히 말하는 대문자 A의 액팅이다. 혹자는 그의 오페라틱한 연기가 오버 액팅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커>는 같은 각본으로 피닉스가 절제된 연기를 한다고 더 좋아질 영화는 아니다. 호아킨 피닉스는 만화적 과장과는 다른 방식으로, 마음의 병이든 상태에서 어떤 외부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위험한 나르시시즘에 빠진 인물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조커>의 호아킨 피닉스는 전력투구한다. 높은 개런티를 보장하는 프랜차이즈 영화에 잠시 나들이한 태세가 아니다. 과거 조커들도 그렇고 이번 영화에서도 조커가 깡말라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상의를 벗고 웅크린 그의 골격은 뒤틀린 고목이나 해저생물을 연상시킨다. 견갑골 연기라는 새 장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에로의 큰 구두에 발이익은 아서가 달리는 모양새는 절박하고 우스꽝스럽다. 무엇보다 뮤지컬 시퀀스에 가깝게 찍힌 아서의 자아도취적인 춤 장면들은 마임이나 아시아 가면극의 댄스처럼 보인다. 첫 살인 직후를 위시해 결단의 순간에 쓰인 춤 신들은 음악과 촬영의 뒷받침으로 시나리오가 해명하지 못한 인물의 변모 동기를 비언어적 방식으로 대신 설득한다. <조커>는 보기 좋게 만들어졌다. 프로덕션 디자인은 나무랄 데가 없고 화면구성과 색채도 아름답다. 촬영과 조명은 영화의 심장인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에 밀착해 그것을 잘 보여줄 최선의 거리와 앵글을 고민한 기색이 역력하다.

10/11

거리 영화관 간판으로 추정하건대 <조커>의 극중 시간은 1981년이다. 그러나 <조커>가 반드시 1981년을 배경으로 삼아야 할, 혹은 어느 특정 연도이건 지정해야 할 필요는 찾을 수 없다. 1981년이었어야 하는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토드 필립스 감독이 1970년대 미국영화에 큰 감명을 받았다는 사실과 특히 서사가 매우 유사한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1976)와 <코미디의 왕>(1982)의 뉴욕 풍경을 재현하고 싶어 했으리라는 추측이다. 극중 누구도 로널드 레이건을 언급하지 않는 가운데 동시에 <조커>의 각본은, 뉴욕의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인용하고 있다. 뉴욕시 재정 위기, 청소노동자 파업, 센트럴파크에서 한 백인이 여러 명의 유색인에게 습격당한 사건, 월스트리트 점령 사태 등이다. 특히 아서의 결정적 첫 살인과 여파는, <뉴요커> 등 뉴욕 매체들이 지적하는 대로 1984년 치안에 불만을 품은 백인 버니 괴츠가 뉴욕 지하철에서 5달러를 요구하는 흑인 소년 넷을 리볼버로 쏘아 한명을 영구적 불구로 만든 후 일부 시민들에게 영웅으로 숭배받은 사건과 정확히 닮아 있다. 다양하고 구체적인 실제 사건의 패스티시는 <조커>를 정치적인 영화로 보이게 하는 착시효과가 있다. 하지만 각 사건의 인종적, 계급적 맥락을 떼내고, 주인공의 곤경과 타락의 계기로 재배열한 시나리오는 결과적으로 <조커>를 사회드라마로서 더없이 공허하게 만든다. 그리고 사회는 항상 나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어떤 혼란이건 혼란은 다 똑같다고 뭉뚱그리는 탈역사적 관점을 드러낸다. 합법적 영역 밖에서 불만스런 남자들을 이끄는 영화 속 리더로는 일찍이 <파이트 클럽>(1999)의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이 있었다. 다만 타일러와 조커의 결정적 차이는 그나마 정치적 어젠다가 있냐 없냐이다.

<조커>에는 기묘한 도치들이 있다. 최초의 살인 전까지 아서와 접촉해 모멸감을 주는 인물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비백인이다. 악기가게 광고판을 든 아서는 히스패닉 청소년들에게 이유 없이 몰매를 맞고, 버스에 같이 탄 흑인 아이 엄마에게 면박을 당한다. 아프리카계 여성 심리상담사는 아서가 보기에 냉담하고 성의 없다. 그런데 아서의 첫 피살자는 지하철에서 한 여성을 둘러싸고 성희롱하는 세 백인 화이트칼라 남성이다. 나중에 세 피살자는 토마스 웨인 회사의 직원으로 판명된다. 여기서 잠깐, 현실에서 사회적 박탈감으로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은 힘을 가진 대상보다 주변에 있는 본인보다 더 약한 존재에게 가해지는 예가 많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조커>가 묘사한 것과 같은 무질서가 도래할 경우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회집단은 자본가나 정치인이 아닐 것이다. 나아가 토드 필립스 감독은 두 신을 통해 약자에 대한 조커의 ‘관용’을 암시한다. 첫 번째는 장면이라기보다 장면의 생략이다. 가족사에 충격을 받은 아서는 같은 층에 사는 여자친구(재지 비트)의 아파트를 찾아간다. 그러나 여자의 반응은 지금까지 관객이 본 둘의 데이트가 아서의 일방적 환상임을 말한다. 무단 침입한 아서에게 딸을 해치지 말라고 여자가 호소한 직후 영화는 다른 장면으로 컷한다. 그 지점까지 살인에서 눈을 돌린 적 없는 영화에 등장한 예외적 점프다(나머지 하나는 다른 흑인 여성 상담자와 조커가 만나는 에필로그에 나온다). 조커가 모녀를 살려줬거나 영화가 살인을 보여주지 않기로 결정했거나 둘 중 하나다. 두 번째는 집에 찾아온 광대 동료 두명 중 한쪽을 아서가 잔혹하게 죽인 다음 장면이다. 살아남은 소인(小人) 개리(리 길)는 아서의 허락으로 벌벌 떨며 현관으로 향하지만 키가 작아 체인을 풀 수 없다. 아서가 피식 하며 개리에게 다가가는 몇초는 가학적 유머와 잔인한 서스펜스의 시간이다. 달아난 동료 뒤에서 아서는 “나한테 잘 대해준 것은 너뿐이었어”라며 방금 일어난 일이 권선징악일 뿐이라는 의미의 대사를 중얼거린다. <조커>는 각본이 아서 플렉을 변명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구차해진다. 그 절정은 머레이 프랭클린의 쇼 생방송에 출연한 아서가 별안간 “정신적으로 아픈 외톨이를 사회가 쓰레기 취급하면 어떤 결과가 오겠어요?”라며, 지금까지 구축한 캐릭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해설자의 대사를 외칠 때다.

10/12

로버트 드니로의 캐스팅은 <조커>에 <택시 드라이버>와 <코미디의 왕>이 승인한 21세기판의 후광을 부여하지만 그것은 포장을 넘어서지 못한다. <코미디의 왕>의 루퍼트 펍킨은 유명 토크쇼 진행자를 인질로 삼았다 체포되지만 나중에는 자서전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명사가 된다. 이 결말을 루퍼트의 몽상으로 해석하건 아이로니컬한 현실로 보건 영화는 병들고 상처 입은 정신을 가진 주인공과 일정거리를 두고 그를 미국 사회 안에서 조망한다. <조커>는 감독의 시선도 처음부터 끝까지 아서의 그것에 동조한다. 아서가 보는 아서, 아서가 보는 사회가 곧 감독이 바라보는 인물과 세계다.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이후 이어진 제작진 인터뷰와 찬반 논란은 이 영화를 부풀리고 의미심장한 텍스트로 보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이야기 자체를 들여다보면 아서를 조커가 되도록 떠민 억압 가운데 보편화할 수 있는 변수는 공공의료 서비스의 폐기와 빈부 격차 정도이고 나머지는 매우 특수한 가족사와 정신질환에 돌려진다.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은 방아쇠만 주어지면 쉽게 연쇄살인을 범할 수 있는 위험인물이라는 편견도, 만든 사람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영화의 대성공과 함께 더 널리 퍼질 것이다.

인상 깊은 대사가 많은 편이 아니지만 <조커>의 한 장면에는 솔깃한 대화가 있다. 아서를 담당하던 심리상담사가 예산 삭감으로 더이상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다는 통보를 할 때다. 상담사는 나쁜 소식을 전한 다음 아서에게 개인 대 개인으로 말한다. “그들은 당신 같은 사람에겐 쥐뿔도 신경 쓰지 않아요.” 그리고 덧붙인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선의를 품고 타인을 돕는 직업에 종사하며 딱 한표에 해당하는 권력을 가진 조커 아닌 다른 시민의 좌절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나는 <조커>에 이런 대화가 더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한다. 그러나 <조커>의 시나리오와 연출은 호아킨 피닉스의 아서 플렉 외에는 어떤 인물에게도 관심이 없다.

<남매의 여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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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매의 집

영화는 세 식구의 조촐한 이사로 시작한다. 형편이 어려워진 아빠(양흥주)는 옥주(최정운)와 동주(박승준) 남매를 승합차에 싣고 할아버지(김상동) 집에 더부살이를 하러 간다. 결혼의 위기를 맞은 고모(박현영)도 친정을 찾는다. 바야흐로 잊지 못할 여름방학이 시작되려 한다.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 상영작 <남매의 여름밤>에서 한시적 대가족을 이룬 어른과 아이들을 끌어안은 공간은 할아버지와 함께 나이 들어온 구식 단독주택이다. 널찍한 창은 때때로 예쁜 가족사진의 프레임이 되고, 고풍스런 여닫이문이 달린 계단으로 이어진 2층은 사춘기 옥주에게 프라이버시를 선사한다. 구식 베란다는 옥주와 고모의 호젓한 대화 공간이 되고, 텃밭 같은 연초록 뜰은 더이상 이 가족을 쪼들려 보이지 않게 한다. 윤단비 감독은 집을 헌팅한 후 그에 맞게 시나리오를 고쳐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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