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엔 국경이 없다. 다양한 방식으로 상상의 세계를 펼쳐내는 작가들이 있을 뿐이다. 애니메이션이 매력적인 이유는 보편적인 동시에 매우 개인적인 표현방식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넘어 모두가 공감할 이야기를 다루는 한편 작가 개개인의 비전과 상상력을 온전히 담아낼 수도 있다. 디즈니 출신의 애니메이터 이민규 감독은 바로 이런 창작의 힘을 믿고 있는 작가 중 하나다.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겨울왕국> <모아나> 등의 캐릭터를 그려온 이민규 감독이 올해 부천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심사위원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민규 감독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단지 디즈니 출신의 애니메이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2013년 아카데미 단편애니메이션 부문에 노미네이션된 이민규 감독의 연출작 <아담과 개>(2011)는 작가로서 이민규 감독의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산업의 최전선에서 자신의 세계를 개척 중인 애니메이터에게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와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올해 단편경쟁부문 심사를 맡았다. 심사위원은 처음이라고 들었는데.
=김성일 프로그래머가 <아담과 개>를 재밌게 봤다고 초청을 했다. 나는 처음부터 미국에서 경력을 시작해서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호기심이 항상 있었다. 이번 기회에 좀 더 자세히 알고 영감을 얻고 싶은 마음으로 왔다. 심사는 처음이라 좀 긴장했지만 지금은 다채로운 작품들을 보며 한창 자극받는 중이다. 전세계에서 독특한 스타일과 개성을 지닌 작품들이 모인 것 같다. 단편인 만큼 예산이 크진 않지만 그래서 더 영리하고 자유로운 아이디어들이 넘쳐나는 작품들이 많다. 평가라기보다는 지금 내게 필요한 에너지를 받고 돌아가는 기분이다.
-소개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세편이 기억에 남는다. 토마시 포파쿨 감독의 <산성비>는 한번도 본 적 없는 독창적 스타일이 눈에 띄었다. 헝가리의 나디아 안드라세브 감독이 연출한 <공존>도 흥미롭다. 작가의 직관이 잘 표현된 그림체가 좋았다. 마지막으로 김명은 감독의 <퍼스트 클래스>를 꼭 이야기하고 싶다.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제대로 이해하려면 콘텍스트가 필요한 내용이지만 스타일만으로도 전달되는 감성이 있었다. 시대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점도 좋았다. 새삼 내가 단편 작업할 때가 생각나서 여러 가지로 즐거운 경험이었다.
-직접 연출한 <아담과 개>는 2013년 애니상 어워드에서 최우수 단편영화상을 수상했고, 2013년 아카데미 단편애니메이션 부문에 노미네이션되며 화제를 모았다.
=생각지도 못한 영광이었다. 덕분에 주변에서 관심을 가져주기도 했고 내 이력에도 도움이 됐다. 하지만 변화는 크지 않다. 오히려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화려해 보이는 스포트라이트는 1%에 불과하다. 나머지 보이지 않는 99%의 과정, 사무실에서 새벽까지 작업해야 하는 그 시간이 애니메이터로서 나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보면 고치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그런 거친 부분까지 포함하여 열정 넘치게 작업했으며 아티스트로서 내가 어떤 방향을 지향하는지 고백한 작업이었다.
-<아담과 개>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그를 따르는 개의 이야기를 다룬다. 익스트림 롱숏으로 자연 속에 묻힌 인물들을 잡아내는 시선이 돋보인다. 음악도 거의 쓰지 않아 전반적으로 고요하고 정적이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과 개가 최초에 어떻게 만났을까 하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캘리포니아 인스티튜트 오브 아츠(이하 칼아츠)를 다닐 무렵부터 생각하고 있던 건데 이후 디즈니에 입사하고 경험이 쌓이면서 차츰 구체화해나갔다. 개가 나오는 상업애니메이션의 클리셰, 그러니까 시끄럽고 밝고 과장된 방식으로 그리고 싶진 않았다. 관객이 보면서 자신의 상상으로 채워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표현이 좋다. 핸드드로잉도 그중 하나다. 의미를 지정해주는 사운드 대신 새소리, 벌레 소리, 바람 소리를 통해 거기에 있는 듯한 감각을 전달하고자 했다. 마치 멀리서 찍은 사진처럼 롱숏이 이어지는 건 관객이 안에서 경험하고 탐험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내 머릿속에 맴도는 느낌을 재현하고 공간을 창조해나가는 작업이다.
-디즈니의 캐릭터 애니메이터로 활동할 때와는 사뭇 다른 일처럼 들린다.
=엄밀히 보면 다르지만 결국 내 관심사는 대중적인 화법과 내 감각의 접점을 찾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디즈니에서의 경험은 큰 자양분이 되었다. 픽사에 처음 인턴을 갔을 때 잠시 혼란스러운 시기가 있었다. 현장의 접근방식, 촬영법들은 큰 도움이 되었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과는 다소 달랐다. 이후 칼아츠를 다니면서 이야기와 연출의 방향에 대한 고민을 오래했다. 장 뤽 고다르, 소피아 코폴라, 테렌스 맬릭,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등 작가감독들의 이미지를 보며 여러 가지로 영감을 받았다. 정해진 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감독으로서 내가 지향하는 애니메이션은 삶의 순간을 포착하는 일이다. 디즈니에서의 경험이 도리어 그 길을 선명하게 만들어줬다.
-<아담과 개>에서 아담이 개에게 처음으로 먹이를 주는 순간이 긴 호흡으로 그려진다. 내 생각에 이 작품의 영혼은 그 순간을 가만히 지켜봐주는 기다림에 있는 것 같다.
=감사하다. <아담과 개>를 만들 무렵 나는 테렌스 맬릭 감독의 <뉴 월드>(2005)를 보고 흠뻑 취해 있었다. 특히 광활한 자연을 담는 에마누엘 루베스키 촬영감독의 카메라워크에 큰 영감을 받았다. 루베스키의 렌즈에는 대상의 촉감까지 묻어난다고 생각한다. 특정 부분을 과장하거나 부각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선명해지는 것들도 있다. 내 작품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길 소망한다.
-글렌 킨 감독의 단편 <디어 바스켓볼>(2018)에서 수석애니메이터를 맡았고, 넷플릭스에서 제작하는 글렌 킨의 신작 <오버 더 문>에서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로 참여했다.
=그는 나의 우상이자 마스터이며 내게 있어선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물 같은 존재다. 어린 시절 글렌 킨이 캐릭터 디자인을 한 <인어공주>(1997)를 보고 애니메이션쪽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와 함께 작업한 것만으로 꿈을 하나 이룬 셈이다. <오버 더 문>은 달의 신에 대한 중국 고전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작업을 마쳤다. 아직 구체적으로 공개할 순 없지만 지금은 넷플릭스에서 신작을 준비 중이고 개인적으로도 또 다른 작품을 구상 중이다.
-애니메이션에 국한되지 않고 영화, 소설, 건축, 현대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다. 당신을 롤모델로 삼는 젊은 애니메이터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어머니(김선희 부산시립미술관장)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현대미술을 자주 접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접하다보니 자연스레 생각하는 힘이 길러진 게 아닌가 싶다. 내 삶의 모든 경험이 곧 나의 영감이자 자산이다. 그래서 지금도 분야와 매체에 국한하지 않고 즐긴다. 틀에 갇히지 않는 표현들, 문화와 맥락이 반영된 결과물들이 나를 움직인다. 중요한 건 본질을 탐구하는 호기심과 이를 함께 나누려는 자세다. 이번에 새삼 느낀 거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의 기술 수준과 애니메이터들의 테크닉은 훌륭하다. 다만 젊은 애니메이터들이 테크닉을 따라 배우기보다는 자기 안의 목소리를 먼저 따라갔으면 한다. 모두가 픽사처럼 그리면 재미없지 않나. 굳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 용기를 가지고 자신이 할 수 있는걸 보여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