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영화 <신문기자>가 실화와 실화 바탕 소설과 어떻게 다른 길을 가는가
2019-10-31
글 : 우혜경 (영화평론가)
‘개인적 사건’으로 만드는 기획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최근 어떤 영화나 TV프로그램이 가장 재미있었냐는 내 질문에 한 친구가 “뉴스”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금세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는 이렇게 덧붙였다. “어떠한 영화도 그렇게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그것도 하루 만에 다 보여주지 못할걸?”

이때 특히 난처해지는 건 ‘사회고발’ 성격을 띤 영화일 것이다.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는 대신 현실이 영화를 앞서갈 때(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현실을 널리 알리려는 ‘고발’성 영화는 자연히 그 힘을 잃고 만다.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의 영화 <신문기자>는 그 난처함과 무기력함을 고스란히 담고있다. 일본 정권에 쓴소리를 마다지 않던 기자 모치즈키 이소코의 동명 소설을 모티브로 한 <신문기자>가 다루는 소재, 그러니까 ‘현실’은 일본이라는 이름표를 떼고 지금의 전세계, 어느 국가의 이름을 붙인다고 해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민간인 사찰, 가짜뉴스, 비리로 가득한 정치인, 그리고 그들을 은폐하고 문제의식 없이 기사들을 만들어내는 언론사까지, 우리가 바로 오늘 확인한 뉴스 속 사건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신문기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현실의 위중함이야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 대해, 혹은 이 영화를 경유해 지적한 바 있으니 굳이 반복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오히려 (경악할 만하지만) 뻔한 이야기를, 그것도 현실, 원작 소설로 이미 반복된, 새로울 것 없는 이 서사를 <신문기자>가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는지에 주목하고 싶다.

무엇이 이 영화를 느리게 만드는가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린 속도감이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사건들을 신문으로, 이메일로, 트위터 등으로 실시간 생산하고 퍼 나르는 것을 ‘업’으로 삼는 기자들에게 속도는 매우 중요한 요소일 텐데, 이는 그런 사건과 주인공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그런 ‘느림’이다. 영화는 핵심이 되는 사건인 ‘대학 설립 계획’을 둘러싼 의혹을 다루기 전, 등장인물들을 소개하고 이들의 성향을 한번에 설명하기 위해 현직 총리와 절친인, 그래서 ‘정부의 개’로 정부가 원하는 기사만 써주는 기자 츠지카와의 강간사건을 영화 시작과 함께 간략하게 스케치해낸다. 하지만 영화는 온라인상에서 사진과 함께 이리저리 퍼져 나가는 사건의 위급한 속성과는 관계없다는 듯 느리게 사건 진행 과정을 담는다. 우리가 이제까지 익숙하게 보아왔던 ‘사회고발’ 영화라면 빠른 비트의 음악과 함께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분할화면이 대사도 별로 없이 이어지다 몇번의 자막과 함께 사건이 정리됐을 텐데 <신문기자>는 한순간도 속도에 얽매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느리게’라는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이 영화를 느리게 만드는 걸까?

이상한 건 개별 숏의 길이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는 점이다. 내각정보조사실에서 막 일하기 시작한 스기하라(마쓰자카 도리)가 강간 피해자를 ‘꽃뱀’으로 몰아가라고 지시하는 상사와 면담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자리에 앉아 있는 상사와 그의 명령을 받기 위해 책상 앞에 서 있는 스기하라의 모습을 멀리서 함께 담은 투숏으로 시작해 대화의 진행에 맞춰 숏-리버스숏으로 쪼개 담는다. 1분여 진행되는 이 장면은 14개의 숏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사가 스기하라에게 거짓 정보를 전달하는 숏의 길이를 앞뒤 숏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게 이어감으로써 거짓이지만 거절할 수 없는 명령으로 갈등하는 스기하라의 심리적 시간을 포착해낸다.

스기하라가 자신의 사무실로 복귀해 동료에게 받아든 거짓 정보를 온라인으로 퍼뜨리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자신이 업로드해야 하는 거짓 기사를 받아든 뒤 스기하라는 빼곡하게 앉아 정신없이 거짓 정보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내각정보조 사실 동료들을 천천히 바라본다. 이때 카메라가 서서히 부상하면 똑같은 작업을 하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를 강조라도 하려는 듯 카메라는 다시 사무실을 느리게 수평 트래킹하며 사무실의 풍경을 다시 한번 담아낸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이내 스기하라가 퇴근해서도 계속 자신이 올린 정보들이 어떻게 온라인상에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트위터 화면이 마치 스기하라 얼굴에 반사돼 쏟아져 내리기라도 하는 듯 중첩된다. 실제로 컴퓨터 화면이 그렇게 반사될 리 없으니 이 장면은 분명 자신이 올린 거짓 기사가 마구 퍼져나가는 걸 보며 그 ‘걷잡을 수 없음’에 압도돼 번뇌에 빠진 스기하라의 ‘심리적 숏’인 셈이다. 다시 말해 <신문기자>는 영화가 다루는 소재에 직접 짓눌리는 대신, 그 사건 앞에서 이러한 사건을 사실대로 옮겨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 신문기자 요시오카 (심은경)와 권력과 삶의 안정 사이에서 갈등하며 거짓 정보 생산에 참여해야하는 공무원 스기하라의 ‘반응’을 담는 데 주력한다. 이때 이들의 ‘리액션’은 단순히 사건을 처리하거나(요시오카) 감당해보려는(스기하라) 일종의 행위로서의 반응이라기보다 오히려 ‘심리적인 반응’에 더 가까워 보인다. 스기하라의 전 상사킨자키(다카하시 가즈야)의 투신자살을 두고 요시오카는 표면적으로는 기자의 본분에 따라 의혹이 불거진 대학 설립 계획의 이면에 있는 비리를 파헤치지만, 영화는 오히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세상을 떠난 요시오카의 아버지와 킨자키를 같은 위치에 놓은 다음, 기자로서의 본분과 딸로서의 도리를 뒤섞기 시작한다. 킨자키의 장례식장에서 그의 딸에게 질문을 퍼붓는 기자들을 보며 요시오카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 서 있던 자신을 떠올리며 (그때는 하지 못했을 말을 킨자키의 딸을 대신에) 기자들에게 “그게 지금 할 질문이냐”고 소리친다. 너도 똑같은 기자가 아니냐며 힐난조로 말하는 스기하라에게 요시오카는 마치 자신의 아버지가 왜 죽어야 했냐고 묻는 듯 킨자키가 왜 죽어야 했는지 알고 싶다고 말한다.

개인의 심리적 반응에 주목하다

상황은 스기하라도 마찬가지다. 내각정보조사실의 역겨운 지시를 따르는/거절하는 스기하라의 결정의 이면엔 공무원으로서의 사명감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른 채 남편만을 기다리는 아내와 막 세상에 태어난 아이가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우리가 ‘고발’거리 혹은 ‘뉴스’거리로만 다루었던 사회적 이슈를 철저하게 사적 영역으로 끌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슈들과 직간접적으로 (혹은 아주 멀게) 연결돼있는 개인들의 심리적 반응을 지켜보는 데에 대부분의 상영시간을 할애한다. 사건의 시간은 빠르게 흐르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나의 것으로 처리해야 하는 인물들의 심리적 시간은 느리게 흐를 수밖에 없다. 이를 담아내기 위해 카메라는 인물들의 얼굴 가까이에 핸드헬드 카메라로 다가가 느리게 흔들리는 화면들을 마치 이들의 심정이 출렁이는 양 담아낸다. 그리고 철저하게 사건을 요시오카와 스기하라 두 사람의 ‘개인적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객관적인 사건 기록이나 보도 진행상황 등은 관객의 이해를 돕는 정도에서 전달하는 데 그친다. 그래서 이러한 방식이 동시대에 도착할 ‘사회고발’ 영화를 위한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지 못하겠지만, 분명한 건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이 자신만의 대응방안을 찾아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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