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명 보트>
<새>
자신의 영화에 등장하는 깜짝 선물이 일종의 루틴(routine)이 되어버린 감독들이 있다. 클래식 스릴러의 대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이 분야로는 선구자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샅샅이 살펴야 겨우 발견할까 말까 한 행인 역할로 등장하길 즐겼다. 후대 감독들은 그에 비해 다소 대범해졌다. 단역과 조연을 아우르며 제 작품에 재치 있는 흔적을 새긴 감독들을 모았다.
토드 필립스
Todd Phillips
<올드 스쿨>
<더 행오버>
현재 <조커>로 주가 상승 중인 토드 필립스 감독. 그는 <조커> 이전까지 할리우드 19금 코미디의 대가였다. 총각 파티 뒤에 깨어난 세 친구가 어젯밤 난장판의 기억을 짚어가는 <행오버>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그동안 <로드 트립> <올드 스쿨> <듀 데이트> <더 행오버> 등 그의 거의 모든 작품 속에서 그는 카메오 출연을 해왔다. 배역 이름도 심상치 않은 풋 러버(Foot Lover), 갱 뱅 가이(Gang Bang Guy), 미스터 크리피(Mr. Creepy). 이번엔 아예 결이 다른 <조커>를 발표하면서 그의 출연을 기대하지 않은 관객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조커>에 등장했다는 사실. 아서(호아킨 피닉스)가 코미디 클럽의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무대 위에서 조크를 하던 남자가 바로 토드 필립스다.
쿠엔틴 타란티노
Quentin Tarantino
<펄프 픽션>
<저수지의 개들>
<데쓰 프루프>
<장고: 분노의 추적자>
쿠엔틴 타란티노 또한 카메오 (혹은 거의 조연급) 출연을 거의 고정적으로 해온 감독 가운데 하나다. <펄프 픽션>부터 그의 등장은 화려했다. 극의 후반부, 갑자기 들이닥친 일당들에 난감해 하면서 아내가 집에 들어올 시간이 다가와 전전긍긍하는 역할이었다. 카메오 치고는 분량도 꽤 많고 연기력도 출중한 신 스틸러다. <저수지의 개들>에서는 아예 첫 대사부터 타란티노의 차지다. 미스터 브라운 역으로 등장한 그는 마돈나의 ‘라이크 어 버진’(Like a Virgin) 전체가 대물에 관한 은유라며 진지한 농담을 해 보였다. 이후로도 감독의 카메오 출연은 계속됐다.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과 함께 한 작품 <플래닛 테러>에서는 지저분한 행동과 언변을 일삼다가 된통 당하고,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선 배우의 하차로 얼결에 출연하게 됐다가 몇 마디 던지곤 금세 죽는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역시 처음으로 두피를 뜯긴 나치 대원으로 출연하면서 금방 죽는 역할로만 등장하는 그를 발견하는 재미까지 생겨 버렸다.
피터 잭슨
Peter Jackson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의외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 <반지의 제왕>에 카메오 출연을 한 피터 잭슨 감독이다. 워낙 방대하고도 화려한 세계관 속에 많은 인물들이 나오는 작품인지라 그를 알아채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팬들이라면 모를 리 없다. 그는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에서 당근을 씹고 있는 취객을,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에서 우루크-하이들에게 창을 던지는 전사를,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에서 코르사르 배에 올라타 레골라스의 활에 맞아 죽는 해적으로 출연했다. 피터 잭슨의 카메오 욕심은 <호빗> 시리즈에서도 계속됐다. <호빗: 뜻밖의 여정>에서 난쟁이 가운데 한 명으로 등장했고,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에서는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속 카메오를 패러디해 재차 당근을 씹는 취객으로 나와 팬들을 웃음 짓게 했다. 다른 작품 <킹콩>에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위의 킹콩을 공격하는 전투기 조종사로 출연한 전력도 있다. 이렇게 출연 욕심 뽐내는 감독이 가장 탐내는 역할은 다름 아닌 <반지의 제왕>의 레골라스라고.
M. 나이트 샤말란
M. Night Shyamalan
<식스 센스>
<언브레이커블>
<싸인>
<23 아이덴티티>
이 리스트에 이름이 빠지면 섭섭할 사람이 더 있다. 반전 스릴러의 대가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다. 그를 널리 알린 반전의 대명사 <식스 센스>에서까지 그가 출연했단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콜(할리조엘 오스먼트)의 주치의 역할이었다. 그의 첫 외계 영화 <싸인>에서는 주인공의 아내를 차로 죽인 사람으로 등장했고, <빌리지>에서는 신문 읽는 감시원으로 출연했다. 최근 완성된 히어로 3부작에서도 마찬가지. <언브레이커블>에서 약쟁이로 의심받아 검문을 받는 남자로, <23 아이덴티티>에서 CCTV를 확인하는 남자로, <글래스>에서는 가게에서 마주친 손님 역할로 등장한다. 데뷔작부터 카메오 출연을 고집해온 그는 이렇게 유명해지기 전까지 “제작사의 만류도 있었다”고 밝혔다. 우디 앨런이나 히치콕처럼 유명 감독들의 전례가 있지만, 신인 감독이 연출과 조연을 겸하는 것은 당시엔 파격이었다.
마틴 스콜세지
Martin Scorsese
<택시 드라이버>
<갱스 오브 뉴욕>
<휴고>
마틴 스콜세지 감독도 수십 년의 커리어 동안 흥미로운 카메오 출연을 해 왔다. 데뷔작 <아이 콜 퍼스트>에서의 출연을 시작으로, <비열한 거리>에서의 총잡이 지미 쇼츠 역할이 눈에 띄었다. 그의 대표작 <택시 드라이버>에도 출연했다. 주인공 트래비스(로버트 드 니로)의 택시에 탑승한 뒷좌석 승객으로,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는 남성으로 나와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코미디의 왕>에서는 TV 쇼를 연출하는 감독으로, <갱스 오브 뉴욕>에서는 부유한 저택에 사는 주인으로 나왔다. 영화의 아버지 조르주 멜리에스에게 바치는 헌사인 <휴고>에서는 스튜디오 앞의 멜리에스(벤 킹슬리)를 찍는 사진사로 출연해 존경을 표했다. 머지않아 우리 곁을 찾아올 운명인 <아이리시맨>에서 페르소나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와의 재회를 하는 만큼 그의 숨은 얼굴을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