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에드워드 양 감독의 <타이페이 스토리>와 타이베이 3부작
2019-11-07
글 : 김성훈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

오래 기다렸다. 대만 뉴웨이브를 이끈 거장 에드워드 양 감독의 <타이페이 스토리>가 34년 만에 국내 개봉한다. 에드워드 양과 함께 대만 뉴웨이브를 이끌었고, 이 영화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필름 파운데이션과 함께 디지털 복원 작업에 참여했다. 이 영화는 <공포분자>(1986)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과 함께 에드워드 양의 ‘타이베이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으로 불린다. ‘아시아의 4마리 용’이라 불릴 만큼 급격하게 성장하는 대만의 도시화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가 수시로 충돌하고, 그런 상황에 휩쓸리다시피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린 쓸쓸한 도시 이야기다. 이 영화는 이후 제작되는 <공포분자>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큰 토대가 된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연기력과 앳된 얼굴을 확인하는 재미도 있다.

“이 건물들을 봐. 어떤 건물이 내가 디자인한 건지 모르겠어. 전부 똑같아 보여. 내가 있든 없든 점점 더 무의미해지는 것 같아.” <타이페이 스토리>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자마자 이어지는 시퀀스에서, 수첸(채금)과 그녀의 직장 동료는 직사각형 아파트가 줄지어 선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눈다. 그들이 다니는 회사가 큰 기업에 인수되기 직전이고, 둘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미래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사업을 하기 위해 미국 LA로 떠났다가 타이베이로 막 돌아온 아룽(허우샤오시엔)의 눈에도 세상은 똑같아 보인다. 어린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야구 코치 라이상 선생이 오랜만에 만난 제자에게 “LA는 어때?”라고 묻자 아룽은 “대만과 똑같다”고 대답한다. 수첸과 아룽, 두 사람은 세상이 똑같다고 믿(고 싶)지만, 실제로 세상은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1985년작이자 타이베이 3부작(<타이페이 스토리> <공포분자>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연 첫 번째 영화 <타이페이 스토리>는 급성장하고 재빠르게 변화한 탓에 현대와 과거가 뒤섞여 충돌하는 대만 사회와 그곳에서 휩쓸리다시피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려낸 치정극이다.

낯선 타인들의 도시

‘청매죽마’(靑梅竹馬). 영화의 원래 제목인 이 말은 어릴 때부터 사이좋게 지낸 연인이나 부부의 관계를 비유한 말이다. 변함없는 사랑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룽과 수첸, 두 연인은 한 때 청매죽마였다. 어린 시절 “저녁마다 창밖을 바라보며 야구를 하고 집에 돌아가는 아룽을 기다렸다”는 수첸의 대사에서 둘의 관계가 얼마나 오래되고 애틋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연기한 아룽은 어린 시절 재능 있는 야구선수였지만, 가족과 함께 미국 LA로 건너간 뒤 매형과 직물 제조업 사업을 하고 있다. 서구문화를 직접 경험했지만, 자유분방하기보다는 전통 질서를 잘 따르는 보수적인 인물이다. 고지식한 면모도 더러 보인다. 아룽은 상하이에서 태어나 부모와 함께 대만으로 이주한 뒤 타이베이에서 성장하다가 미국으로 유학 간 에드워드 양의 성장 과정이 상당 부분 반영된 캐릭터인 듯하다.

수첸은 회사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고, 아룽이 LA로 떠난 사이 유부남 직장 동료 커와 자유로운 연애를 하는 당당한 여성이다. 아룽이 오랜만에 타이베이로 돌아와 수첸과 함께 수첸의 아버지에게 안부 인사를 드리러 가는 영화의 초반부 시퀀스에서, 수첸의 아버지는 오랜만에 자신을 보러 온 수첸에게 “집엔 어쩐 일이냐”라고 묻는다. 수첸은 “호적등본을 정리해 나가려고요”라고 당돌하게 대답한다. 그 말은 들은 아버지는 “세상이 변했어. 결혼도 안 한 처녀가 호적을 옮기려고 하다니”라고 혀를 끌끌 찬다. 그러고선 아룽에게 “너희는 언제 결혼할 거냐. 대를 이어야 할 거 아냐”라고 말한다. 한때 청매죽마였지만 지금은 떨어진 시간만큼 멀어지고 달라졌으며, 그래서 감정이 예전만 같지 않은 두 남녀가 오랜만에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하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으며, 기업은 먹고 먹히기를 반복하는 도시화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는 수시로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젊은 세대들에게 타이베이는 더이상 밝은 미래를 보장하는 도시가 아니다. 아룽은 미국에서 매형과 함께 사업을 하다가 돌아왔지만 여전히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야구를 그만둔 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야구선수 시절 왜 동료와 사이가 틀어졌나’라거나 ‘야구를 했었다면서 (왜 다트 던지기를 이렇게 못하나)’ 같은 질문들이 꼬리표처럼 그를 졸졸 따라다닌다. 기성세대들은 그에게 희망은커녕 오히려 짐을 지운다. 수첸의 아버지는 그에게 “반품된 물건이 많아 재고가 쌓였는데 재고를 처리할 만한 사람을 알아봐달라”고 무리한 부탁을 한다. 아룽의 어린 시절 친구는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기 위해 청춘을 바치며 열심히 연습했지만 노력만큼 보상을 받지 못한다. 그 친구의 아내는 도박에 중독됐고, 친구는 혼자서 아이 셋을 키우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택시를 몬다.

도시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성인 수첸에게 사회는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고, 변화는 실감하기 힘든 신기루다. 인수합병된 회사는 그를 정리해고 대상에 올리고,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그의 존재를 있는 듯 마는 듯 여기는 데다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어머니는 그에게 손을 벌린다. 회사를 그만 둔 수첸을 안타까워하는 친구들은 술자리에서 한 친구에게 “수첸을 고용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그가 “수첸 같은 인재가 우리 회사에 오면 재능 낭비”라고 말하며 웃어젖히는 이 시퀀스는 꽤 씁쓸하다. 아룽은 마땅한 대안이 없는 수첸에게 “생활비가 빠듯하니 돈을 빌려줄까”라고 제안하지만, 그건 그에게 결코 위안이 되지 못한다. 수첸은 아룽에게 “우리 미국으로 가는 건 어때?”라고 이민을 제안하지만 아룽은 “이민 가서 뭘 할지가 문제지”라고 소극적으로 대답한다. 수첸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을 보이지 않고, 겉만 뱅뱅 도는 그들의 대화는 수첸을 더욱 우울하게 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청매죽마’는 요원한 메아리일 뿐

가부장적인 대만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현실과 고민 그리고 그로 인한 성장은 에드워드 양 감독이 전작 두편을 통해 줄곧 그려온 주제다. 가일정, 도덕신, 정의 감독과 함께 모여 만든 옴니버스영화 <광음적고사>(1982)에서 에드워드 양 감독이 연출한 두 번째 에피소드인 <갈망>은, 1960년대 상하이에서 어머니, 언니와 함께 살아가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다. 어머니가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해 남은 방 한칸을 남자 대학생에게 세놓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사춘기 소녀가 남자 대학생에게사랑을 느껴 용기를 내 고백하러 가지만, 이미 자신의 언니가 그의 방에 들어간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는 이 사건을 통해 소녀의 성장, 인간관계, 그로 인한 복합적인 감정을 섬세하게 펼쳐놓았다.

단편으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에드워드 양 감독이 그다음 해 내놓은 <해탄적일천>(1983)은 그의 대표적인 여성 서사다. 에드워드 양 감독과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는 한 남자의 실종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영화는 남자의 부재와 관련된 진실을 추적하는 데 관심이 없다. 오히려 가리(장애가)와 칭칭(호인몽) 두 여성의 삶을 그려내는 데 공을 들인다. 칭칭은 과거 가리의 친오빠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가리 아버지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이후 피아니스트로 성공한다. 가리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하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집을 뛰쳐나온다. 원하는 결혼에 성공했지만 회사 생활에 바빠 가정과 자신에게 소홀히 하는 남편에게 불만이 쌓인다.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감독은 여러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자신의 꿈과 욕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삶을 쓸쓸하게 담아낸다. <타이페이 스토리>를 앞의 두편과 함께 온전한 여성 서사로 묶기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여성의 삶을 주로 다룬 전작과 달리 처음으로 남자(아룽)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전반부가 아룽과 수첸,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불안해하는 두 사람의 사연을 교차로 보여준다면, 후반부는 둘의 갈등이 점점 심각해지고, 그로 인해 서사는 치정극으로 전환된다. 이같은 전개는 역시 치정극인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토대가 된다. 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하게 얘기할 순 없지만 두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건 역시 물질(돈)이다. 물질은 인물을 옥죄고, 그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끄집어내며, 사람을 잘못된 선택으로 이끈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담아내는 타이베이 풍경이 유독 차갑고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래서다. <타이페이 스토리>는 개봉당시 흥행과 비평 모두 실패해 개봉 나흘 만에 극장에서 내렸고, 그해 열린 금마장영화제에서도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사회를 풍자하는 에드워드 양의 시선은 다음 영화인 <공포분자>에서 더욱 날카롭고 차가워진다.

<공포분자>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릴레이 달리기를 하듯 서사를 이끌어가는 독특한 이야기다. 한 소녀가 경찰 수사를 피해 도망가다가 발코니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친다. 사진 찍기가 취미인 소년이 우연히 그녀를 찍고, 그녀 사진을 보면서 매혹된다. 소녀는 동네 불량배들과 어울리다가 어머니에게 잡혀 집 안에 갇히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장난전화를 건다. 결혼 생활에 회의감을 느끼던 한 여성 작가가 소녀의 장난전화를 받는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타이베이라는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들과 도시 생활의 무기력감, 우울증을 카메라에 한데 담아냈다. <공포분자>는 관객으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덕분에 금마장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차지했다.

그 점에서 <타이페이 스토리>가 담아낸 도시의 차가운 풍경과 과거와 현재의 불협화음은, 이후 대만의 현재(<공포분자>)와 과거(<고령가 소년 살인사건>)를 더욱 구체화하는 데 중요한 동력으로 작동된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는 급변하고, 과거와 현재는 충돌하며, 인간은 점점 더 불행해지는 데다가 이 과정들은 역사의 쳇바퀴에서 계속 반복된다. 개봉한 지 무려 34년이 지난 지금도 이 영화가 쓸쓸하고 우울하게 다가오는 것도 그래서다. 청매죽마라니, ‘변함없는 사랑’은 도시인들에게 요원한 메아리로만 울릴 뿐이다.

●‘배우’ 허우샤오시엔과 대만 뉴웨이브

<타이페이 스토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배우는 주인공 아룽을 연기한 허우샤오시엔 감독이다. 이 영화에는 그의 청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잘 알려진 대로 허우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 두 거장은 대만 뉴웨이브를 이끈 감독이다. 그들이 처음으로 서로를 지지하게 된 계기는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에드워드 양의 <해탄적일천>을 보면서부터다. 관객이 할리우드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던 당시 열악한 대만 영화산업에서 두 사람은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두 사람이 감독과 배우로 만난 <타이페이 스토리>는 둘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한 작업이었지만, 흥행에 실패한 탓에 둘은 뉴웨이브를 반대하는 대만영화계 기득권 세력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보여준 배우 허우샤오시엔의 연기는 웬만한 베테랑 배우 못지않게 사실적이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이 영화에서 수첸 역할을 맡은 배우 겸 가수 채금을 에드워드 양에게 소개해주었고, 둘은 결혼에 이른다(에드워드 양 감독과 채금은 이후 이혼했다). 채금은 등려군과 함께 1980, 90년대 대만을 대표하는 가수로도 유명하다. 또 영화에서 아룽의 어린 시절 친구인 택시 기사를 연기한 사람은 시나리오작가 오념진이다. 오념진은 <해탄적일천>, <비정성시>(1989), <희몽인생>(1993), <마작>(1996) 등 여러 영화의 각본을 쓰면서 대만 뉴웨이브를 이끌었고, 에드워드 양 감독의 유작 <하나 그리고 둘>(2000)에서 NJ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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