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이었던 <윤희에게> 개봉을 앞두고 배우 김희애는 “내가 주인공이라 흥행 면에서는 솔직히 걱정이다. 여자고, 나이도 있으니 한국영화계에서 플러스 요인이 아니지 않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김희애는 지난 몇년간 중년 여성 주연의 영화와 드라마가 시장에서 세력 발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지런히, 그리고 굳건히 증명해온 배우다. 40대 여성의 로맨스와 직업적 야심을 뜨겁게 그린 드라마 <밀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관부재판을 주도한 실존 인물을 연기한 <허스토리>(2018), 그리고 첫사랑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여성이 자신의 딸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윤희에게>까지, 그녀는 매체와 작품의 규모를 아우르며 꾸준히 최고의 커리어를 갱신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녀의 궤적은 배우 개인의 성취를 넘어, 대중에게 소개되는 중년 여성 캐릭터의 문턱이 낮아지고 다양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지표가 됐다. 배우 김희애에게 11월 14일 개봉하는 임대형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윤희에게>의 출연 경험에 대해 물었다. 비밀을 간직한 채 눈 내리는 풍경 위를 걷는 영화 속의 윤희처럼, 그녀는 배우라는 직업과 매일의 일상에 임하는 지혜를 차분히 들려주었다.
-영화 <허스토리>에서 관부재판을 주도하는 여행사 사장을 연기했고, <사라진 밤>을 통해 첫 스릴러 장르에 도전하며 캐릭터의 장르적, 외형적 특성이 강렬한 역할들을 소화했다. <윤희에게>는 최근의 행보 중에서 가장 일상적이고 편안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라 반가운 마음도 든다.
=운이 좋은 걸까? 배우 생활을 하면서 외형적으로나 성격적으로 항상 극과 극을 오가는 인물을 연기할 수 있었다. 배우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 충실할 때, 극중 인물에 가장 가까워졌을 때다. <윤희에게> 역시 작품이 가진 고유한 분위기에 내가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며 작업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로 데뷔한 임대형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감독과 프로듀서를 비롯해 젊은 구성원들이 운영하는 현장에서 체감하는 분위기는 어땠나.
=무엇보다도 자신의 일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과 모여서 일하고 있다는 것, 내가 그 순간에 속해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애정하는 분야의 일을 하면서 기뻐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건 그 자체로 굉장히 귀한 일이다.
-<윤희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뜻밖의 편지를 받고 첫사랑의 기억을 찾아가는 여성 윤희의 여정을 따라간다. 이혼 후 딸 새봄(김소혜)과 사는 윤희에 관해 전남편(유재명)은 “사람을 외롭게 하는 사람”이라는 수식을 덧붙인다. 편지의 발신처인 오타루로 떠나기 전까지, 일상 속 윤희의 모습에선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억눌러왔던 사람의 피로감 같은 게 선명히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윤희라는 인물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솔직히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 내가 택한 최선의 방법은, 늘 그래왔듯이 대본에 충실하는 것뿐이었다. 윤희는 굉장히 비밀스러운 사람이라 여행지에서 어떤 중요한 순간이 영화에 처음 공개된다. 대체로 건조한 모습이었던 윤희가 자기 감정을 폭발시켜야 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준비하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말 많이 고민했다. 강박에 가깝게 최대한 집중하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내게 연기란 배우가 경험했던 것을 끄집어낸다기보다는 대부분 상상하고 흉내내는 것에 가깝다. 이번 영화는 내 상상만으로는 소화하기가 힘들었고, 그래서 최대한 음악도 많이 듣고 영화도 많이 보면서 대리 체험을 해보려고 노력했다. 오타루로 떠나기 전 윤희의 상태보다는 그 이후의 변화에 방점을 두고 준비했다. 실제 촬영은 일본에 도착한 첫날에 했다. 다행스럽게도 나도 모르게 감정이 흘러나왔고, 준을 연기한 나카무라 유코 배우도 정말 열심히 하는 게 느껴졌다. 모든 상황이 잘 맞아떨어진 순간이었다.
-임대형 감독의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와 마찬가지로 <윤희에게>도 삶의 호시절이 이미 지나간 사람들을 향한 애틋함이 느껴진다. 윤희에게는 반추할 시간이 굉장히 많다. 과거에 이루지 못한 사랑이나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오빠를 위해 자신의 꿈을 희생해야 했던 것 등 녹록지 않은 기억들이 많다. 동세대로서 공감할 만한 지점이 있었나.
=아무래도 우리 세대는 별것도 아닌 걸 큰 비밀처럼 부끄러워하고 자기 존재를 더 숨기고, 이런저런 것들을 감추는 일이 많았다. 그 시대는 상황이 그랬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좋아졌지만 한편으로는 또 크게 달라지지 않은 점도 있다. 그런 의미에선 윤희의 상황에 대해 충분히 공감했다.
-드라마 <밀회> 이후 40대 김희애의 멜로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더 커졌다. <윤희에게>는 일부분 정통 멜로드라마의 분위기가 이식되어 있고, 퀴어영화로 분류할 수도 있다.
=가급적 장르에 규정되고 싶지 않다. 흔한 말이긴 하지만 이 영화는 어느 평범한 여자의 성장기다. 멜로적인 요소는 영화를 구성하는 소재 중 하나이고, 주인공 윤희를 둘러싸고 보는 사람마다 방점을 두는 부분이 다를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윤희와 새봄이 만드는 모녀 드라마로서의 비중이 더 커 보인다. 딸 새봄이 독립된 개체로서 자기만의 여정을 만들고, 엄마와 딸이 동료 같은 관계를 형성하는 모습도 아름답다.
=정말 이상적인 관계다. 어떨 때 보면 엄마 같기도 하고 또 친구 같기도 하다. 새봄처럼 적극적으로 엄마의 인생을 관심 있게 지켜봐주고 배려해줄 수 있다면 너무 멋지지 않나. 영화를 찍으면서 ‘아, 이게 가족이구나’ 하고 느꼈다. 겉으로 볼 때 완벽한 가족이라도 들여다보면 밸런스가 안 맞는 경우가 허다한데, <윤희에게> 속 가족은 그와 반대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부부가 이혼을 하고 윤희와 전남편에게 각자의 사정이 있지만, 실은 이들 가족만이 갖는 어떤 완벽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산국제영화제 야외무대 행사에서, “젊은 배우인 소혜씨가 있긴 하지만, 중년 여성들이 이끌어가는 영화인데 과연 잘될까 걱정도 된다”라는 말을 했다. <허스토리> <미쓰백> <걸캅스> 등 여성 주연의 영화에 대한 응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분위기인데, <윤희에게>도 그런 맥락에서 여성 서사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어휴, 내가 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나는 그럴 힘이 없다. <허스토리>에 이어 어쩌다 보니 이런 상황이 되었는데…. 최근에 어떤 외국 감독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말씀하시길 한국의 영화는 매우 남성적이고 TV드라마는 여성적인 느낌이 있다고 하더라. 내 생각에는 잘 보신 것 같다. (웃음) 배우인 내가 뭐라고 그런 특성을 정의하겠냐마는, 분명한 건 나같이 나이 많은 배우는 그 속에서도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조류 속에서 그래도 계속 열심히 하고 또 매사 감사해하다 보면 지금과 같은 기회가 오는 것 같다. 관객도 조금씩 알아봐주시는 것 같고. 나를 비롯해 또래 배우들에게 앞으로 점점 더 많은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까?
-드라마 <미세스 캅>에선 경찰을, <끝에서 두번째 사랑>에선 방송국 PD를 연기하며 전문직 여성 캐릭터로 호출되기도 했다.
=<미세스 캅>은 원래 대본에서는 남자 캐릭터였는데 여자로 바뀐 경우다. 실은 어떤 남자배우가 역할을 거절하면서 제작진이 여자배우로 해보면 어떨까 하고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캐릭터도 터프한 측면이 많았다. 앞으로 이런 사례가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 기존에 남자배우가 하던 역할을 여자가 하는 거다. 재밌잖나.
-<허스토리>는 일종의 아이돌 문화처럼 영화와 배우를 향한 팬덤이 형성되는 흥미로운 현상도 만들어냈다. 단관 행사에 참석하며 관객과 스킨십을 쌓는 등 이전과는 또 다른 형태로 힘을 얻었을 것 같다. 처음엔 낯설지 않았나.
=반반이다. 나이도 많고, 나보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도 정말 많은데 어떻게 이렇게 잘 봐주시나, 내게 기적이 일어났구나, 감사하고 믿어지지 않는 기쁨이 있었다. 그런데 또 한편에서 나는 모든 반응들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편이다. 재빨리 내 생활로, 그리고 내 일로 넘어온다. 연기는 다행히 내가 잘할 수 있고, 이것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라 이 나이까지 직업으로 삼고 있다. 밖에서 주시는 사랑에 관해선 이런 두 마음이 동시에 존재한다.
-일부러 외부의 평가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건가.
=일부러 노력하는 것은 전혀 아니고 나도 모르게 오래 하다보니 공부가 되어서 그런 것일 순 있다. 긴 시간 일하면서 나도 모르게 상처도 받았고, 그런 것들이 어느새 지나가고 하면서 지금의 내가 된 것이겠지. 오늘 하루 건강하게 일할 수 있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또 다른 기회가 오면 그만이다. 나는 지금 내게 주어진 것들이 모두 덤으로 느껴진다. 선물이라고 할까, 그렇게 여긴다.
-배우가 아닌 생활인 김희애로서도 관심을 많이 받는 편이다. 특히 자기 관리에 철저한 이미지가 있다. 요즘엔 어떤 데 흥미가 있나.
=진짜 재미없게 산다. 너무 단순한 삶을 살아서 남들이 보면 저 사람 왜 저러나,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운동하고, 내 할 일 하고 그렇게 심플하게 규칙적으로 생활하는데 요새는 그리스식으로 음식을 해먹고 있다. 건강을 챙기는 것 같지만 술도 좋아한다. (웃음) 특히 혼술! 어디 가면 골치가 아파지니 집에서 그냥 직접 음식을 차리고 와인을 마신다. 안전하고 보호받는 장소에 있는 느낌이 편하다. 많이 마시면 다음날 꼭 후회하니까 딱 한 잔 정도만 마시면서 넷플릭스를 보는데 정말 달콤하다. 아침부터 시작되었던 나만의 숙제, 나만의 할 일들을 다 마치고 난 뒤 저녁에 그런 순간을 가지면 ‘소확행’이 따로 없다.
-<허스토리> 개봉 즈음에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는데 꾸준히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시도하는 것 같다.
=머리에 기름칠 한다고 할까? 나이 들면 조금씩 기억력이 나빠지기도 하니까 배우로서도 필요한 활동이다. 사람들이 영어 공부를 한다고 하면 오해할 것 같은데, 쇼핑 영어 혹은 허접 영어다. (웃음) 옛날에는 ‘아무리 해도 늘지 않는데 이거 왜 하지?’ 이런 생각도 했는데 요즘엔 달라졌다. 내가 참 부족하구나, 하나 더 배웠네. 내일 비록 잊어버리더라도 이렇게 나의 무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좋다, 이렇게 느낀다. 무언가를 배우다보면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되고 또 겸손해진다.
-성실한 자기 관리가 곧 배우로서의 수명과 에너지로 연결되는 선순환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나 자신을 대단히 개선하기 위해서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그냥 하다보니 삶이 행복해지는 걸 깨달았다. 정해진 대로 할 일을 하는 게 지루할 것 같겠지만, 막상 하는 사람은 정말 재밌다. 정신 건강에 좋은 것 같다. 맥 놓고 있는 것보다 머리도 개운하고.
-영화 속 윤희는 여러 상처를 안고 있지만 그럼에도 내면에 자리잡은 단단한 강단 같은 것이 느껴져 인상적이었다. 오늘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배우의 성품이 캐릭터 형성 과정에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배우들이 자기 안에 있는 어떤 것들을 끄집어낸다는 말을 하고, 캐릭터에 자신을 투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나는 그 반대다. 대본 속 인물이 나와 닮았다고 느끼기보단 내게 없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많고, 그걸 자연스럽게 여긴다. 개인적으로도 그런데, 사실 나는 수줍음도 많고 꽤 무뚝뚝한 성격이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주위 사람들이 내가 화난 건 아닌지 혹은 건방지고 도도하다고 오해를 하기도 하더라. 어떤 이유든 다른 사람의 기분을 안 좋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일부러 많이 웃기도 하고 나 자신을 바꾸려고 굉장히 노력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건 가면이라기보다는 애티튜드라고 생각한다.
-외부의 기대와 실제 자신을 직업적으로 프로페셔널하게 조율해나가는 태도가 인상적이다. 배우라는 직업이 동반하는 환상이나 나르시시즘과 거리를 두는 것 같다.
=나르시시즘은 조금 있다. (웃음) 그리고 연기에서 그건 중요하다. 겸손과는 또 다른 이유로,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 어떤 인물에 빙의되어서 메소드 연기를 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불안하면 바로 눈동자가 흔들리고, 연기가 안 나온다. 동시에 나는 배우가 세상의 수많은 직업 중 하나일 뿐이고 연기가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갖고 있다. 다른 직업처럼 노하우나 스킬도 있을 수 있고 뭐 그런 게 아닐까. 진심과 스킬을 균형 있게 가져가야 좋은 연기, 좋은 배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피드백을 많이 받아보고, 젊은 친구들, 외국 친구들이 연기하는 것을 보면서 내 것을 자꾸 확인하려 한다.
-아까 넷플릭스 시청을 언급했는데 어떤 장르를 주로 보나. 지금껏 해보지 못한 역할이 있다고 느낀다면.
=연기를 참고할 만한 작품이 있으면 스릴러 장르도 가끔 본다. 지금까지 내게 과분한 역할을 너무 많이 맡아서 배역에 큰 욕심은 없지만, 다음엔 아주 새하얀 흰머리를 하고 큰 뿔테를 낀, 추리극의 탐정 역할 같은 건 어떨지 이미지를 떠올려본다. 재밌을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작품이든 캐릭터로는 승부를 못 본다. 좋은 작가, 감독이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