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고명성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2019-11-12
글 : 고명성 (감독)

감독 리들리 스콧 / 출연 해리슨 포드, 숀 영 / 제작연도 1982년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자주 듣는 질문이지만 난감하다. ‘제일’이라는 말엔 한편만이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입장에선 그러하다. 내 인생의 영화는? 이 질문엔 전광석화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영화가 있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82년작 <블레이드 러너>다. 기억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동시에 꿈틀거린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감정과 상황, 향후 비칠 자신을 위해 그 기억은 왜곡되고 나아가 정당화되며 삭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왜곡되지 않고, 잊히지 않고, 나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이 영화를 보았을 때고 이 영화가 내 인생 영화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명화극장> <토요명화> <주말의 명화>…. 지금처럼 채널 선택권이 많지 않았던 어린 시절, 지상파의 이들 방송은 내가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임과 동시에 이국적인 세계를 브라운관을 통해 접할 수 있는 통로였으며 방송에서 보내는 시그널송은 나를 비현실적 세계로 안내해주는 문지기였다.

밤늦게 거실의 불을 끄면 언제나처럼 이국적 세계로 안내할 <주말의 명화> 시그널송이 시작되었다. 광고가 끝나고 시작된 이 영화는 2019년의 미래를 처음부터 어둡고 칙칙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몽환적인 세계로 이끌었고 묘한 느낌마저 들게 해주었다. 데커드(해리스 포드)가 레이첼(숀 영)을 붙잡고 격정적으로 키스하는 장면에선 모호한 감정에 가슴이 두근거렸으며 동시에 시선은 안방으로 향했다. 자고 있을 엄마가 이 타이밍에 나오지 말았으면 하는 간절함이었다. 초등학생이 감히 이런 영화를! 죄책감이 들었지만 은밀하고 야릇했다. 그렇게 이 영화와 나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90년대 초반 감독판 <서기 2019 블레이드 러너>라는 타이틀로 재개봉 했을 땐 고등학생이었고, 극장에서 이 영화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어릴 때 느꼈던 모호한 감정은 퇴폐미와 공허함으로 다가왔고,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흥분되었다. 영화 속 반젤리스의 O.S.T는 그 느낌을 충분히 구현해주었고, 레코드점에서 사운드트랙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등하굣길에 언제나 함께했다. 영화는 예민했던 10대 중반의 나를 미지의 세계로 이끌었다.

2000년대 중반 일본 유학 시절, 가전 양판점에서 우연히 <블레이드 러너> 한정판 DVD 세트를 발견했다. 모든 버전과 워크프린트, 메이킹필름은 물론 당시 스토리보드와 유니콘, 스피너 비행차량 피겨까지! 하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았고 남아 있는 수량은 하나였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하던 내겐 큰 부담이었지만, 선택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점원에게 다른 이에게 팔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고 황급히 은행에서 돈을 인출했다. 추억과 함께 내 인생의 영화는 그렇게 재회했고, 그 한정판 박스는 지금도 나와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다.

좋아서 혹은 배움을 위해 보았던 멋진 영화는 많으며 훌륭한 영화도 많다. 하지만 1989년 어느 날, 불 꺼진 거실의 텔레비전 브라운관에서 흘러나왔던 이 영화가 지금 나에게 이 일을 하게끔 안내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30년이 지난 2019년은 이 영화의 배경이며 내가 영화를 개봉한 해이기도 하다. 결과론적 우연이라 할지라도 이 영화는 내 인생 가까운 곳에서 배회하고 있었고, 삽입곡 <One More Kiss, Dear>가 몇년째 휴대폰 착신음인 건 나 역시 이 영화 가까운 곳을 배회하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훗날 지난 시간을 반추하며 ‘내 인생의 영화’로 남아 있을 이 영화에 애정을 담아 감사를 표하고 싶다.

●고명성 영화감독. <사요나라 안녕 짜이 >(2009), <열두 번째 용의자>(2019)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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