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10월 28일부터 11월 5일까지 열린 제32회 도쿄국제영화제 탐방기
2019-11-14
글 : 김소미
일본다운 것과 세계적인 것 사이에서
개막작 <남자는 괴로워-어서 와 토라>의 야마다 요지 감독과 배우, 제작진.

도쿄 롯폰기 힐스에 위치한 모리타워를 중심으로 대도심 중심가에서 펼쳐지는 도쿄국제영화제는 우수한 접근성과 더불어 대중친화적인 프로그램 덕택에 필름 페스티벌과 세계영화의 동향에 관심이 적은 관람객에게도 문턱이 낮은 쇼케이스장이다. 나루히토 새 일왕 즉위와 함께 개막한 레이와 시대로의 첫걸음에 동행한 올해 영화제는 내년 2020 도쿄올림픽 및 패럴림픽을 염두에 두고 일본영화의 고유한 빛을 밝히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한일 관계 악화와 중국영화 검열 문제로 인한 수급의 어려움 등 당면한 난제가 많았던 올해, 이를 슬기롭게 돌파한 제32회 도쿄국제영화제의 이모저모를 전한다.

2020 도쿄올림픽, 일본 애니메이션의 궤적과 기술 변화, 포스트 고레에다 히로카즈 찾기,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영화들, 한일 갈등과 중국 영화 검열 속에서 아시아영화제의 정체성을 고민하기…. 올해 도쿄국제영화제(이하 도쿄영화제)의 키워드는 이러했다. 총 180편의 상영작 중 첫인상에서 가장 돋보인 건 개·폐막작의 선정이었다. <빅 히어로> <플로렌스> <스타 이즈 본> 등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영화들을 개·폐막작으로 택하는 호화로운 선정을 보여주곤 했던 도쿄영화제는 최근 자국 콘텐츠 강화에 조금씩 더 주력하는 듯하더니 올해는 <남자는 괴로워-어서 와 토라>(Tora-san, Wish You Were Here) 그리고 <변사>(Talking the Picture) 두편의 일본영화로 영화제를 여닫았다. 임기 3년차를 맞이한 다케오 히사마쓰 집행위원장은 “자국 문화를 홍보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일본 문화, 특히 영화의 정수를 새롭게 발견하고 쇄신하기에 가장 시의적절한 타이밍임은 부정할 수 없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마침 영화제 기간 동안 2019 도쿄 럭비월드컵이 겹쳐 유니폼을 맞춰입고 밤늦게까지 거리를 활보하는 외국인 관광객의 행렬이 증가한 상태였고, 2020 도쿄올림픽을 홍보하는 광고판이 도심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 개막작 <남자는 괴로워-어서 와 토라>는 언론 및 산업관계자를 대상으로 하는 P&I 스크리닝 직후 특히 비아시아 지역 기자들로부터 이색적이라는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거칠고 익살맞은 성격과 엄청난 여성 편력을 자랑하는 캐릭터 토라지로(아쓰미 기요시)가 주인공인 <남자는 괴로워>는 우리로 치면 <전원일기>에 해당하는 국민적인 장수 시리즈다. 야마다 요지 감독에 의해 1969년에 처음 영화로 제작돼 1995년에 주연배우가 사망하기 전까지 도쿄 시바마타를 무대로 약 25년간 48개에 달하는 작품이 개봉했다. 이번 영화는 올해 88살인 야마다 요지 감독이 14년 만에 메가폰을 잡아, 지난 시리즈들의 클립을 플래시백 장면으로 재편집하고 동시대를 배경으로 죽은 삼촌을 그리워하는 조카가 등장하는 서사를 덧붙인 결과물이다. 아내와 사별한 뒤 실의에 빠진 토라지로의 조카는 중년의 위기를 겪으며 푸근하고 혈기 넘쳤던 삼촌과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과거 시리즈에 출연한 배우들이 나이든 모습으로 스크린에 등장해 오랜 시간의 더께를 쓰다듬는 영화이기에 토라지로 캐릭터에 대한 추억과 향수를 온전히 공유하지 못하는 해외 관객에게도 애수어린 감정은 그대로 전달된다. 필름 시대의 일본영화, 가족적인 과거의 생활상에 대한 그리움이 아시아 관객에게는 친밀감으로, 서구 관객에게는 이국적으로 다가갈 영화다. 새 시대를 맞이한 일본의 비전을 질문받는 때에 오래된 국민 캐릭터를 호출해 과거를 향한 멜랑콜리를 부르짖는 이 영화는, 일견 지금 일본 사회의 고독 혹은 구습과 현대화 사이의 딜레마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야마다 요지 감독과 원로배우들이 레드카펫에 올라 환영받는 것이 올해 개막식의 가장 큰 스포트라이트이기도 했다. <쉘 위 댄스>를 만든 수오 마사유키 감독의 폐막작 <변사> 역시 20세기 초 일본에서 무성영화 변사로 활동하는 주인공을 통해 과거의 아름다움을 추억하는 공동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라이브-액션 TV시리즈 <울트라Q>(1966)의 4K 복원판으로 돌아온 제작진.

올해 회고전의 영예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1983)로 잘 알려진 일본 컬트영화의 대부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에게 돌아갔다. <미스 로운리>(1985), <하나가타미>(2017) 등 네편의 영화와 최신작 <라비린스 오브 시네마>(Labyrinth of Cinema)로 영화제를 찾은 오바야시 감독에 대해 집행위원장은 “이렇게 늦게 그의 회고전을 여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라고 말했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기자는 올해 오바야시 감독을 호출한 것이 더없이 시의적절한 선택으로 느껴졌다. 영화는 오노미치의 오래된 극장에 들어선 세명의 청년들이 어느새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터지기 직전의 1945년으로 시간이동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멀티장르적 특성과 강렬한 미장센으로 무장한, 평생 실험적인 스토리텔링과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활용해온 오바야시 감독의 스타일을 집대성한 작품임은 물론이고 전쟁의 공포와 피해를 경고하는 반전주의자 감독의 메시지 또한 여전하다. 최근 폐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오바야시 감독은 상영 후 열리는 토크 프로그램 등에 빠짐없이 참석해 제작진, 관객과 호흡했다. 한편 야타베 요시 경쟁부문 프로그래밍 디렉터는 외신기자들과 인터뷰에서 “정치적 이해관계에 구애받지 않고 문화·예술 교류의 가치에 주력하겠다”는 뜻을 언급하며 영화제 외부를 둘러싼 첨예한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입장을 공고히 했다. 공동 제작을 포함한 한국영화 출품작이 총 57편으로 예년에 비해 그 수가 크게 줄어든 상황에 안타까움을 드러냈고,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가 영화제 기간 중 갑자기 상영 취소된 것을 예로 들며 “동시대 영화제의 가장 큰 악몽 중 하나일 것이다. 중국영화의 검열 과정이 점점 더 복잡하고 심사 기간이 지연돼, 도쿄영화제 역시 눈여겨봤던 작품을 결국 포기해야 했다”라고 동아시아영화계를 둘러싼 교류 위기를 전했다.

도쿄에서 촬영한 넷플릭스 영화 <지진새>의 프레스 컨퍼런스. 배우 고바야시 나오키, 알리시아 비칸데르, 감독 워시 웨스트모어랜드(왼쪽부터).

신예 감독들의 리얼리즘, OTT 플랫폼의 장르물

도쿄영화제의 메인인 경쟁부문의 심사위원장은 중국 배우 장쯔이가 맡았다. 경쟁부문 14편 중 터키, 필리핀, 프랑스-콜롬비아, 덴마크, 그리고 두편의 일본영화까지 총 6편의 작품이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되었고 이 중 덴마크영화 <엉클>(Uncle)이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장애가 있는 삼촌을 돌보며 농가에서 생활하는 젊은 여성을 그린 <엉클>은 반복적이고 정적인 농장 생활의 묘사를 통해 의도된 단조로움 혹은 지루함을 자아내며 그 끝에 삶에 허락된 아름다움까지 살포시 건드린다. 여백을 추구하는 영화인 듯 보이나, 여성 인물이 겪는 자아실현의 욕망이나 로맨스 등의 심리묘사를 예리하게 포착해 영화의 저류에서 맴도는 생동감이 매혹적이다. 자국 덴마크보다는 일본, 대만 등 아시아영화의 관조적인 시선을 닮은 영화이기도 하다. ‘아시안 퓨처’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중국 신예 감독 유싱의 영화 <서머 나이트>(Summer Knight)는 1997년의 어느 여름날, 자전거를 잃어버린 두 소년의 모험을 그리면서 성장기를 채우는 잉여의 시간들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 특히 최근 개봉한 김보라 감독의 <벌새>,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4관왕을 달성한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처럼 한국의 젊은 감독들에게서 발견되는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영향 혹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향을 함께 감지할 수 있는 작품이기에 더욱 흥미로웠다.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으로 레드카펫에 선 배우 장쯔이.

일본국제교류기금(재팬 파운데이션) 아시아 센터가 아시아영화의 진흥을 위해 만든 ‘크로스컷 아시아’ 부문은 올해로 6회를 맞았다. 동남아시아영화계와의 긴밀한 네트워킹을 강조하는 이 섹션은 도쿄영화제의 개성을 드러내는 주력 프로그램 중 하나로 올해는 호러와 판타지 장르가 강세를 보였다. 필리핀 감독 라브 디아즈의 <더 홀트>(The Halt), 싱가포르 감독 에릭 쿠가 프로듀싱한 <HBO 아시아>의 호러 앤솔러지 <포크로어 시리즈>(Folklore Sereis)의 두 에피소드가 공개되어 특히 주목받았는데, 이중 <타타미>(Tatami)를 연출한 일본의 감독 겸 배우 사이토 다쿠미는 현지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높은 인기와 화제성을 보여 젊은 관객의 트렌드를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경쟁부문을 제외한 사이드 섹션에서 OTT 플랫폼 영화들을 흡수한 도쿄영화제의 부분적 지지는 스페셜 스크리닝을 통해 <아이리시 맨> <결혼 이야기> <지진새> 같은 넷플릭스 영화들을 다수 상영한 것에서도 드러났다. <지진새>로 영화제 초반 도쿄를 찾은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할리우드 스타로서 올해의 빅 게스트다운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재패니스 시네마 스플래시 부문 최우수작품상 <나-저널리스트의 다큐멘터리>.

●일본 애니메이션 진화의 역사 그리고 여성의 미래

도쿄영화제는 올해 ‘더 에볼루션 오브 재패니스 애니메이션/VFX’ 부문을 신설해 <백사전>(1958), <아키라>(1988) 등 기념비적인 애니메이션 회고전을 열고, 동시에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 유아사 마사아키의 <너와 파도를 탈 수 있다면>, 고사카 기타로의 <옷코는 초등학생 사장님!>, 와나타베 아유무의 <해수의 아이> 등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선보였다. <아키라>에서 각각 카네다와 테츠오를 연기한 두 베테랑 성우 미쓰오 이와타와 노조무 사사키가 토크 행사를 통해 30년 만에 처음으로 조우하는 진풍경이 연출됐고, 4K 복원을 거친 라이브-액션 TV시리즈 <울트라Q>(1966)의 상영과 긴 토크가 이어졌다. 프레스 소식지 <스크린 데일리>는 “일본 VFX 기술의 랜드마크와 같은 <울트라Q>를 되짚으며 일본 애니메이션의 터닝포인트를 모색하려는 시도”라고 이를 올해 도쿄영화제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 중 하나로 꼽았다. 한편 “여성 중심의 영화가 늘고 있다”며 야타베 요시 프로그래머가 자부했듯, 프로그램 전반에 걸쳐 소폭이지만 예년에 비해 여성감독과 여성 캐릭터의 수가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비러브드 와이프>(A Beloved Wife), <37초>(37Seconds), <미시스 노이지>(Mrs. Noisy), <라이프: 언타이틀드>(Life: Untitled), <미야모토>(Miyamoto) 등 남녀 관계나 공동체 내에서 여성이 겪는 불합리와 어려움을 주요하게 다루면서 여성 캐릭터의 감정선을 힘 있게 전개한 작품들의 약진이 감지됐다. 일본영화의 새로운 조류를 파악하고 발굴하는 ‘재패니스 시네마 스플래시’ 부문의 심사위원으로 초청된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는 영화 <신문기자>의 모티브가 되었던 여성 저널리스트 모치즈키 이소코의 활동을 기록한 <나-저널리스트의 다큐멘터리>(i-Documentary of the Journalist)를 “스플래시 부문에서 단연 독보적이었던 작품. 지금 일본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잘 알려주면서 인물에 대한 묘사도 매력적인 다큐멘터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어 비러브드 와이프> 아다치 신 감독 인터뷰 - 행복이란 고난과 기쁨, 그리고 유머

씨네21 김소미

아다치 신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어 비러브드 와이프>는 감독의 반자전적 소재를 바탕으로 소설을 쓴 뒤 이를 다시 영화화한 작품이다. 안도 사쿠라 주연의 <백엔의 사랑>을 통해 각본가로 이름을 알린 그는 이번 영화로 도쿄에서 각본상을 거머쥐며 작가로서의 역량을 다시금 증명했다. 무능력한 시나리오작가 고타와, 남편 대신 가정을 이끌고 염려하는 아내 치카의 괴팍한 결혼생활을 그리는 영화는 서로의 결점을 더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위기에 몰린 부부가 툭하면 격분하고 폭언을 쏟아내는 모습을 코믹하게 좇는다.

-<백엔의 사랑>에 이어 서민의 경제적 어려움이 작품의 주요 위기로 작동한다.

=가난을 소재 삼으려는 의도는 특별히 없지만, 사회가 어려워지면 기득권에겐 아무런 영향이 없고 가장 하층계급의 평범한 사람들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는 말에 공감하는 편이다. <백엔의 사랑>과 비슷하게 <어 비러브드 와이프> 역시 시나리오작가로서 내 생활이 불안할 때 영감을 얻었다.

-돌이킬 수 없어 보일 정도로 서로에게 밑바닥을 보여주는 부부관계가 묘사된다. 그러나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를 절대 깨트리지 않는다.

=결혼을 하고 오랜 시간 함께하게 되면 각자의 추하고 숨기고 싶은 면들이 서서히 드러나게 되어 있다. 아내 치카는 그 누구보다도 남편 고타의 부족한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고타가 다른 사람들 눈엔 생각보다 평범하고 별 문제 없어 보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현재의 고타는 치카에게 더이상 과거에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나 믿음을 지켜나가는 태도가 의미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작가인 고타의 시나리오 취재차 가족이 여행을 떠나는 로드무비다. 여행지의 온화한 이미지와 달리 음악은 군가를 연상시키는 거칠고 독특한 구성을 갖췄다.

=갈등이나 역경에도 쉽게 퇴색되지 않는, 인간 존재가 지닌 강한 역동성을 음악이 품고 있었으면 했다. 터키의 오래된 군가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비참한 상황에서 슬랩스틱이나 유머를 동원한다. 페이소스가 중요한 영화적 동력인 것 같다.

=시나리오작가 야마다 다이치의 TV드라마를 동경하며 자랐다. 그의 작품은 평범한 사람들이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야기다. 행복해지는 길은 누구에게나 무척 가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나가다 보면 누구나 조금씩 더 나은 개인으로 성장할 것이라 믿는다. 고난과 기쁨이 동시에 섞여 있는 그 과정을 묘사하는 데 있어 나로서는 유머가 가장 효과적인 방식 같다.

●수상결과

-경쟁부문

도쿄 그랑프리 <엉클> 심사위원특별상 <아틀란티스> 감독상 사이드 루스타이 <저스트 6.5> 여우주연상 나디아 테레즈키에위츠 <온리 디 애니멀스> 남우주연상 나비드 모함마드자데 <저스트 6.5> 예술공헌상 <차오그투 위드 사룰라> 각본상 <어 비러브드 와이프> 관객상 <온리 디 애니멀스>

-아시아퓨처부문

최우수작품상 <서머 나이트> 아시아정신상 레자 자말리 <올드 맨 네버 다이>

-재패니스 시네마 스플래시 부문

최우수작품상 <나-저널리스트의 다큐멘터리> 최우수감독상 와타나베 히로부미 <크라이>

공로상 나카다이 다쓰야, 오바야시 노부히코

사진 도쿄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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