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와 고래 / 월트 역
<프란시스 하>와 <결혼 이야기>를 만든 감독 노아 바움백의 초기 작품. <오징어와 고래>는 부모가 어린 두 자녀에게 이혼을 통보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다룬다. 한때 유명 소설가였던 아버지는 쉽게 남을 평가 내리면서, 지적 소양만이 유일한 자존심으로 남은 허영적 인물이다. 위험하게도 제시 아이젠버그가 연기한 맏아들 월트는 그의 성정을 쏙 빼닮았다. 반대로 막내 프랭크(오웬 클라인)는 아버지와 대화가 잘 통하지 않고, 어머니에게 조금 더 강한 애착을 느끼지만 정작 어머니는 아들의 불안을 어루만지지 못한다.
<오징어와 고래>에서 누구보다 눈길을 끄는 인물은 월트다. 다이내믹한 표정보다는 되레 심각해 보이는 굳은 얼굴로 감정의 우물을 길어올리는 제시 아이젠버그. 그의 전매특허 연기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건 아닌가 보다. <천국의 이편>을 읽어 봤느냐고 동급생이 묻자, 월트는 빠른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니, 피츠제럴드의 졸작이야. <위대한 개츠비>가 걸작이지"라고. 얼핏 문학에 통달한 조숙한 청년처럼 보일 법도 한데, 갈수록 월트는 불쌍한 캐릭터가 되어간다. 월트는 자신이 말하는 것들이 실제로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한다. 그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은 '경험'이 아닌 무수한 '기준'들이었다. 22세의 제시 아이젠버그는 허영의 껍데기를 물려받은 아들을 탁월히 연기했다.
소셜 네트워크 / 마크 주커버그 역
감히 최대의 규모라고 말할 수 있는 사용자와 정보망을 구축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페이스북'. 그러나 결코 창대하지만은 않은 탄생 비화를 데이빗 핀처가 <소셜 네트워크>로 영화화했다.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마크 주커버그(제시 아이젠버그)는 소위 컴퓨터 천재다. 발단은 여자친구에게 차인 굴욕감을 떨치고자 온라인에 비방글을 올린 것인데. 마크는 여기서 더 나아가 대학 홈페이지를 해킹하곤 여대생들의 외모를 순위 매기는 '페이스매시'(FACEMASH) 사이트를 만들어 버린다.
대책 없는, 그러나 명석한 악동에 관한 소문을 듣고 윙클보스 형제(아미 해머)가 영입에 나선다. 그들은 선남선녀들의 인맥 교류 사이트인 '하버드 커넥션'을 만들고자 했고 마크는 얘길 듣자마자 다른 곳으로 불꽃이 튄다. 윙클보스의 아이디어로부터 페이스북의 아이디어를 얻게 된 것이다. 사용자가 직접 자신의 정보를 입력하고 공개하는 획기적인 시스템으로 페이스북은 날개 돋친 듯 퍼져 나갔고 그는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가 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성공을 호락호락하게 두지 않는 윤리성에 대한 고민을 뻗친다.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인간의 욕심은 어디까지인가? 빠른 호흡으로 몰아치던 영화의 결말부, 공허함만이 남은 제시 아이젠버그의 눈빛이 기억에 남을 영화.
로마 위드 러브 / 잭 역
유럽의 아름다운 도시를 경유한 로맨스를 만들던 우디 앨런. <로마 위드 러브>에서는 네 쌍의 커플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병치시키며 유쾌한 리듬을 만들어 간다. 그중 제시 아이젠버그의 에피소드를 들여다보자. 삼각관계는 삼각관계인데, 완전히 맥 빠진 삼각관계 이야기다. 로마에 살고 있는 잭(제시 아이젠버그)과 샐리(그레타 거윅) 커플에 한 가지 변화가 닥친다. 미국에서 온 샐리의 절친 모니카(엘렌 페이지)가 집에 함께 묵기로 한 것이다. 사전에 샐리는 잭에게 여러 번 주의를 준다. 모니카가 박식하고 매력이 넘쳐서 남자에게 인기가 많으니, 잭 역시 반할 수도 있다는 것.
잭은 '나는 너(샐리)를 사랑하고, 다른 여자에겐 관심이 없고, (모니카가)예쁘기는 하지만 나에겐 매력이 없다'는 둥 수시로 철벽을 과시한다. 하지만 모니카는 잭이 좋아하는 작가의 시구절을 척척 읊는 것도 모자라, 도발적이고 충동적인 행동들로 바른 생활을 자극한다. 사실 모니카는 마치 <오징어와 고래>에서의 월트를 보듯 허세의 전형에 가까운 캐릭터다. 그럼에도 잭은 예견된 수순처럼 모니카의 매력에 서서히 빠져든다. 말하자면 이 에피소드의 기승전결은 전지적 잭의 시점에서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응'인 셈인데, 우디 앨런은 고작 이 정도의 웃음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다. 이 위험한 커플이 맞이한 마지막 국면은 더없이 깔끔하고 허탈해서 우습다.
아메리칸 울트라 / 마이크 역
생각보다 너무 안 어울리는 장발을 하고 나타난 제시 아이젠버그. 하지만 그마저 이 영화의 B급 감성을 자극하는 요소가 된다. 취향 장난 아니게 탈 것 같은 <아메리칸 울트라>는 액션 장르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그 이음새는 너무나도 마이너하다. 대마초 중독자 마이크(제시 아이젠버그)는 사랑하는 여자친구 피비(크리스틴 스튜어트)가 곁에 있다는 것 말고는 그다지 즐거운 인생을 살지 못한다. 공황발작은 수시로 찾아오고, 그로 인해 중요한 순간마다 피비를 실망시키는 일도 잦다.
하지만 어느 날 인생 최대의 반전이 찾아온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편돌이 생활을 하던 그에게 한 여자가 찾아와 알 수 없는 말들을 남기고 사라진 것. 사실 마이크는 CIA의 최정예 액션 병기로 훈련된 존재였지만 그 위험성 덕에 강제로 기억을 삭제당하고 평범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의문의 여자가 남긴 말은 그를 깨우는 암호였고, 액션 본능이 되살아난 마이크는 숟가락 하나로 단숨에 괴한들을 몰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도 모르는 나의 본능, 안다고 생각했던 여자친구의 정체. 혼란 속에서 본능 하나로 펼치는 액션과 로맨스가 희한한 매력을 준다.
카페 소사이어티 / 바비 역
이 작품으로 제시 아이젠버그는 우디 앨런과의 두 번째 협업을, 크리스틴 스튜어트와는 세 번째로 협업했다. (스튜어트와의 첫 번째 만남은 코미디 영화 <어드벤처랜드>에서다.) 앨런과 함께한 두 번째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에서의 제시는 어떨까? 다시 짠내나는 캐릭터로 돌아왔을까? 대답은 예스다. 1930년대 할리우드 부흥기를 조명한 이 영화에서 제시 아이젠버그의 역할 바비는 가난한 집안의 백수였다. 할리우드의 이름난 거물이라는 삼촌 필(스티브 카렐)에게 일자리를 부탁해보려 LA로 향한 뉴욕 청년 바비. 그는 그곳에서 원하던 일자리도 얻고, 첫눈에 반한 사랑도 얻는다.
안타깝게도 그가 반한 삼촌의 비서 베로니카(크리스틴 스튜어트)에게는 유부남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상대는 바로 필 삼촌이었다. 하지만 삼촌과 조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베로니카 말고는 당사자 둘은 이 삼각관계에 대해 눈치채지 못하면서 이야기는 흥미진진해진다. 필이 부인과의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하자 베로니카는 바비와의 관계를 정리하려 하고, 다시 필이 이혼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베로니카는 바비와 가까워진다. 이 사랑의 먹이사슬의 끝에 삼촌이 있다는 걸 모르는 순진한 바비는 "나이는 중요치 않다"며 삼촌에게 연애 상담을 해 주기도 하고, 부인과의 이별을 결심한 삼촌의 결단을 베로니카에게 전하기도 한다. 이어지는 바비의 성공과 실패에 관한 서사는 저명한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비틀면서, 제시를 행복한 남자로 마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