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지만 멀게 느껴지는 나라의 영화들이 있다. 바로 중국의 작품들이다. 엉성한 CG로 범벅된 코미디 액션 영화, 혹은 이제는 다소 작위적이게 보이는 무협 영화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일까. 국내 수입된 중국영화들은 대부분 큰 주목을 받지 못하며 씁쓸한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일반화일 뿐. 중국에서도 매년 작품성을 인정받은 여러 영화들이 배출되고 있다.
11월 7일 개봉한 바이슈에 감독의 <열여섯의 봄>은 생계를 위해 위태로운 선택을 이어가는 16살 소녀의 시린 성장담을 그려내며 호평을 받았으며, 11월 21일 개봉을 앞둔 후 보 감독의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도 각자의 사정으로 암담한 삶을 살고 있는 네 인물의 동행을 담아내며 여러 영화제를 휩쓸었다. 두 작품 모두 덤덤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짙은 드라마를 자아낸 사례다. 이처럼 최근 평단의 지지를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던 중국영화 다섯 편을 소개한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SoulMate)
첫 번째는 2017년 제작된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다. 제목만 보자면 B급 감성을 섞어낸 대만발 로맨스 영화와 유사할 것이라는 예상이 들지만, 반대 지점의 톤으로 감성 세포를 자극한 작품이다. 어린 시절부터 단짝이었던 안생(주동우)과 칠월(마사순)이 14년 동안 우정을 쌓고, 갈등하며 성장하는 내용이다. 어쩌면 뻔할 수 있는 이야기. 그러나 영화는 서운함, 시기, 배려, 애착, 후회 등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촘촘히 담기며 짙은 공감과 여운을 자아냈다. 시간이 지나며 상이한 성향을 가지는 두 소녀가 서로의 삶을 동경하며 결핍을 메우려는 대목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연출을 맡은 배우 출신의 증국상 감독은 소녀들의 심리를 현실적이게 그리기 위해 네 명의 여성 작가와 함께 각본을 완성했다. 그중 두 명은 극 중 안생 같았고, 나머지 두 명은 칠월 같았다고. 그렇게 탄생한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관객과 평단 모두의 호평을 받았으며 두 주연배우가 금마장영화제에서 최초로 공동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현재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국내에서 <혜화,동>의 민용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리메이크가 준비 중기기도 하다. <마녀>로 데뷔한 김다미가 캐스팅됐으며 두 주연 캐릭터 중 어떤 이를 연기할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후래적아문> (Us and Them)
<후래적아문>는 부쩍 추워진 요즘 날씨에 어울리는 영화다. 다만 마음을 녹여줄 달달한 로맨스를 생각했다면 오히려 더욱 시릴 수 있으니 주의하자. 앞서 소개한 주동우가 주연을 맡았으며 그녀와 함께 <몬스터 헌트> <사랑: 세 도시 이야기>로 활약했던 정백연이 주연을 맡았다. 이외에도 배우 출신 감독 유약영의 연출작, 서정적인 분위기, 청춘의 방황 등 여러모로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와 유사점이 많다.
기차에서 처음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 젠칭(정백연)과 칭(주동우). 그러나 막막한 현실 앞에 그들은 이별을 택하고, 우연히 다시 만나 서로를 택한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전개라고? 부정할 수 없다. <후래적아문>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담아냈다. 그러나 ‘한국영화 고질병’이라고도 불리는 신파 요소를 배제, ‘후회’라는 만연한 감정을 내세워 먹먹함을 선사했다. 이와 함께 중국의 빈부격차, 청년 실업 문제를 자연스럽게 섞었다. 탄탄한 만듦새를 자랑한 <후래적아문>는 중국 내에서 입소문을 타며 크게 흥행했으며, 국내에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며 좋은 평을 이끌어냈다.
<나는 약신이 아니다> (Dying to Survive)
소개하는 영화들 중 유일하게 코미디가 섞인 작품이다. 포스터만 보자면 중국 특유의 슬랩스틱 코미디가 남발할 듯한 <나는 약신이 아니다>다. 종종 웃음을 위한 지점들이 존재했지만 영화는 짙은 휴머니즘을 우선순위로 뒀다. 또한 실화를 모티브로 중국의 각박한 의료 체계를 비판했다. 주인공은 순전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도산 불법 백혈병을 약을 수입해 판매하는 청융(서쟁). 구하기 힘든 약을 독점하게 된 그는 사람들에게 ‘약신’으로 불리게 되고, 경찰은 그를 추적한다. 청융은 여러 사건을 겪은 뒤 문제점을 깨닫고 점점 사람들을 위해 행동한다.
<나는 약신이 아니다>는 청융의 변모 과정을 속도감 있게 전개하며 오락성과 메시지를 모두 잡았다. 사회 비판도 비판이지만 저마다의 사정을 품은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한 점도 한몫했다. 이외에도 음산한 중국 빈민가의 풍경을 완성도 높게 구현하고, ‘법의 필요와 그림자’ 등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논쟁점들을 엮었다. 덕분에 <나는 약신이 아니다>는 몬트리올국제영화제, 금마장영화제 등에서 트로피를 거머쥐었으며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며 중국 내에서 역대 흥행 5위 자국 영화로 자리매김했다.
<지구 최후의 밤> (Long Day's Journey Into Night)
다음은 비간 감독의 <지구 최후의 밤>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뤄홍우(황각)가 과거에 만났던 여인 완치원(탕웨이)을 찾아 헤매는 이야기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진행되며 1부는 현실이 배경, 2부에는 그 무대가 꿈인지 기억인지 모를 공간으로 옮겨졌다. 사실 <지구 최후의 밤>은 많은 관객들이 제목과 감각적인 스틸컷만 보고 마치 SF 로맨스 영화로 착각했다고 한다. 그 결과 난해한 내러티브에 실망한 이도 적잖게 있었다고.
그러나 다소 지루할 수 있는 1부를 지난 뒤, 2부가 펼쳐질 때는 판타지 장르를 넘어서는 화려한 시청각 경험이 펼쳐졌다. 2부는 1부와 달리 3D로 구현, 과감한 카메라 무빙과 원테이크 촬영을 통해 몽환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이를 위해 세 명의 촬영감독이 투입됐으며 인물들을 따라 땅끝부터 하늘까지 유려하게 오가는 카메라로 독특한 간접 체험을 선사했다. 탕웨이는 1부와 2부를 두고 “60분짜리 영화 두 편을 찍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강렬한 이미지의 향연과 미스터리 장르의 매력을 끌어올린 <지구 최후의 밤>은 평단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비간 감독에게는 ‘포스트 왕가위’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
<애쉬 이즈 퓨어리스트 화이트> (Ash is Purest White)
마지막은 중국의 6세대 거장 감독 지아 장 커의 최신작 <애쉬 이즈 퓨어리스트 화이트>다. 2018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의 <버닝>,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등과 경합을 벌였던 작품. 누아르 장르를 끌어온 지아 장 커 감독은 메마른 산업도시를 배경으로 댄서 챠오(자오 타오)와 조직폭력배 빈(리아오 판)의 사랑을 그렸다. 그러나 선혈이 낭자한 누아르를 상상하진 말자. 영화는 빈을 위해 대신 징역살이를 하게 된 챠오의 발걸음에 초점을 맞췄다. 제목에 들어간 재(Ash)도 모든 것을 소진해버린 그녀를 은유, ‘가장 순수한 흰색(Purest White)’도 그 마음을 대변한 단어다. 온갖 고생을 거치며 생존하는 그녀는 그만큼 단단하고 투명해 보였다. 주연을 맡은 자오 타오는 <천주정> <산하고인> 등 여러 작품들로 지아 장 커 감독과 함께 해온 페르소나이자 아내. 덕분에 즉흥 연기를 통해 훌륭한 장면이 탄생하기도 했다고.
동시에 지아 장 커 감독은 두 사람이 점점 지쳐갈수록 번성해가는 산업도시의 황량한 풍광을 강조하며 독특한 괴리를 보여줬다. 사건을 거듭할수록 강인해져가는 챠오, 반대로 야성적이었지만 점점 나약해져가는 빈의 모습을 교차하는 것도 마찬가지. 비록 칸영화제에서는 무관에 그쳤지만 <애쉬 이즈 퓨어리스트 화이트>는 아시안 필름 어워드 최우수 각본상, 시카고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