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트>(2011)로 잠깐 주춤했는지 모른다. 이성한 감독이 8년의 공백을 깨고 스크린으로 돌아왔다. <어제 일은 모두 괜찮아>는 13년간 ‘밤의 선생’으로 불리며 밤거리의 아이들을 직접 찾아나서 선도한 야간고등학교 선생 미즈타니 오사무의 교육 철학과 방법론을 기록한 에세이 <얘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를 바탕으로 만든 성장드라마다. ‘내가 아이를 죽였다’는 책임의식을 가진 선생 민재(김재철), 비행청소년 준영과 지근(윤찬영이 1인2역을 한다), 용주(손상연), 현정(김진영)의 이야기가 와닿는다. 야쿠자와 대적하는 원작의 상황을 덜어내고, 현재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아파하고 고민하는 지점을 찾아낸 이성한 감독. 2012년부터 무려 7년간 준비를 거쳤으며, 연출·각본·촬영·음악까지 1인다역을 해냈다. 대한민국 성장 서사의 ‘숨은 고수’ 같은 영화 <바람>(2009)과 <스페어>(2008)와 엮어 생각하면 이성한의 ‘성장 3부작’으로도 읽힌다. 추운 겨울, 우리 모두에게 ‘어제 일은 모두 괜찮다’라고 말할 수 있는 영화의 도착이다.
-<히트> 이후 근 8년 만의 신작이다. <스페어> <바람> 등 꾸준히 영화를 만들던 시기를 지나, 긴 휴지기 이후 시사를 했다.
=언론배급시사를 하는데 마음이 시렸다. 도움 준 분들도 많은데 마음이 떨리더라. <스페어> 때 기자시사를 했는데 기자가 5명 왔다. 그때 이후 이런 자리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감이 생긴 것 같다. 시사 때 이야기를 하는데, 동체시력처럼 내가 나를 빠져나와서 내가 하는 말실수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가령 나는 ‘슬럼프’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데, “깊은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더라. (웃음)
-전작 <히트>가 도박판을 그린 액션극이었다면, 이번엔 <스페어>와 <바람>에 이어지는 청춘 성장물이라는 점에서, 앞선 작품과 연이은 이성한의 성장 3부작처럼 다가온다. 왜 다시 ‘성장’ 이야기로 돌아갔나.
=<바람>이 잘되고 주변에서 칭찬을 해주니 나 스스로 성공했다고 착각했다. <히트> 때 흥행과 평가가 좋지 않으면서 상처가 컸고 몸도 안 좋아지고 큰 파도를 넘었다. 몸과 마음이 휘청거렸다. 이 마음을 이겨내려면 빨리 영화를 만들자, 라는 결심을 했다. 그러던 차에 김경수 프로듀서가 연락을 주고 비행청소년들을 선도하는 ‘밤의 선생’으로 활약해온 미즈타니 오사무의 자전적 에세이에 대해 얘기해줬다. “감독님이 만들면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라고 하더라. 책을 보면서 제자의 죽음에 대해, ‘내가 죽인 아이다’라고 하며 자기 책임을 말하고 실수를 인정하는 모습에 놀랐다. ‘이런 선생님이 정말 있어?’ 싶더라.
-원작자인 미즈타니 오사무 선생을 만나고 영화화의 허락을 구했다.
=비행청소년을 보호하다보니 야쿠자들의 칼에 맞기도 하고, 죽을 위험을 여러 차례 겪은 분이다. 야쿠자들이 요코하마에서 미즈타니 선생을 만날 때마다 “조심해라. 당신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들도 이력이 났는지 ‘노터치’라고 한다더라. 그런 위협에 이혼을 했으니, 가족은 팽개치고 다른 아이들을 구하는 아이러니한 개인사도 있다. 직접 만나보니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가운데 눈빛이 맑았다. 미즈타니 선생에게 ‘살고 싶어요’, ‘도와주세요’라며 손목을 그어 자해한 사진을 보내는 아이들이 많았다고 하더라. 지금 한국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선생님을 뵐 때 영화를 하고 싶은 심경을 장문의 편지에 담아갔는데, 그걸 보더니 환하게 웃으시더라. 됐구나 싶었다. (웃음)
-마약, 성폭력, 원조교제, 조직폭력배, 폭주족 등이 등장함에도 영화의 표현 수위는 좀더 온건해졌다. 아이들의 잘못을 부각하는 대신 감싸고 보호해주는 느낌이 강하다.
=미즈타니 선생이 그런 분이다. ‘억울해도 내가 짊어지고 갈게’ 하는 마음이 보인다. 어른이 된 우리가 붙잡고 보듬어주고 지켜봐주는 그런 마음이 나에게도 생기더라. 나도 지혜롭고 잘 살아서 지금의 어른이 된 게 아니라 그냥 지나고 보니 어른이 됐다. 아이들이 나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해주자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진다. 책과 영화에서, “죽는 것만은 하지 말자”라는 말을 하는데, 10대들에게 그 희망을 주고 싶었다.
-영화의 톤을 만드는 결정적 요소가 아이들에게 책임의식을 가지는 민재 선생의 심경이 담긴 내레이션이다. 다소 과잉일 수도 있는데 밀고 나간 느낌이다.
=호불호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고 분명 필요한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관객과의 대화(GV)를 할 때 첫 질문자가 “이런 영화 만들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하는데 울컥하더라. 적어도 내가 이 영화를 만든 이유는 달성했구나 싶었다. “감사합니다”라고만 하고 말을 잇지 못하니 배우 (김)재철씨가 마이크를 가지고 가 내 마음을 전달해주었다. 부산에서 청소년 상담을 하는 분, 사회복지사로 활동하는 분도 영화를 보고 경험담을 나눠주고 힘이 된다고 하시는데, 오히려 내가 그분들 말에 힘이 났다.
-성인 배우들이 청소년을 연기했던 것과 달리 이번엔 진짜 고등학생 배우들이 또래 캐릭터를 연기한다. 영화의 톤이 전작들과 달라지는 지점을 만들어준다.
=의도한 건 아닌데, 내 표현대로 말하자면 일종의 고집인 것 같다. <바람> 때는 정우를 비롯한 그 배우들이 맞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고, 이번엔 그 나이대의 배우들이 하는 게 분위기에 맞다고 생각했다. 오디션을 보고 촬영하는 동안에도 배우들 연기가 늘어가는 게 보이고 기분이 좋더라.
-배우들에게 ‘나와는 다시 같이 안 해도 좋으니 잘돼라’고만 했다고. 지금까지 견지한 스타일로 볼 때 같이 작업한 배우들과 ‘이성한 사단’을 만들어도 될 것 같은데 늘 신인배우들과 작업한다.
=<바람> 때도 같은 생각이었는데, 비록 이 영화가 흥행은 안되더라도 배우만큼은 상을 받을 거라고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마음이다. 배우들이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걸 보니 흐뭇하더라. 재철씨는 <히트>부터 이번이 세 번째 작업인데도 같이하자는 이야기를 안 했다. 그냥 오디션 공고를 냈다. 작품하면서 이런 생각이 정리됐다. 형, 동생, 오빠, 동생 하려 하지 말아라. 지금 너희들이 만나는 사람들은 다 동료다. 작품이 끝나면 떠나보내고 또 다음에도 기회가 된다면 행복하게 하면 좋겠다. 그때도 좋은 동료로 만나면 좋고. 너무 애착관계를 가지려 하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연출뿐만 아니라 이번엔 각본·촬영·음악까지 1인다역을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초고 나오고 리서치하면서 투자를 받으려 시나리오를 돌렸는데 다들 안된다고 했다. ‘일본 원작이라 한국적 정서에 맞지 않을 거다’, ‘에세이 형식이라 모두 각각의 에피소드만 있는데 한편의 영화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등의 반응이었다. 2012년부터 무수한 거절의 말을 듣고 시나리오 수정과 캐스팅 과정을 거치면서 마지막에 결심했다. ‘이렇게는 못 만들 것 같다. 내가 매듭을 짓자. 초심으로 돌아가서, 초저예산으로 하자.’ 그 과정에서 촬영, 음악을 같이해준 스탭의 도움을 받아서 지금 규모로 만들 수 있었다.
-이제 긴 휴지기를 지나 2라운드에 들어갔다. 차기작도 궁금하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많이 느꼈다. 정말 이렇게 온전히 한 작품을 위해 애쓰는 건 이 작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이 작품을 통해 나 역시 같이 성장할 수 있었다. 여러 면에서 정말 남은 내 인생 전체를 걸고 이정표가 되는 시기이자 작품이다. 그사이 중편 2편을 찍었다. 지금껏 쉬지 않고 영화를 쭉 해온 사람이고 앞으로도 물론 계속해서 영화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