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구스 반 산트 / 출연 알렉스 프로스트, 에릭 듀런, 존 로빈슨, 엘리어스 매코널 / 제작연도 2003년
시원하게 영화를 말아먹었다. 제정신으로 만들었다고 보기 힘든 나의 데뷔작 <삼거리극장>보다도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나랏돈이 들어간 적은 예산으로 만든 영화였지만 부족한 제작비에 기꺼이 돈과 마음과 열정을 보태신 분들에게 미안해 죽을 것 같다. 작품을 믿고 지난 2년을 함께 달려온 동료들에게도 그들의 헌신을 보상하지 못한 것 같아 송구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별을 선언하고 야멸차게 돌아선 연인의 차가운 등짝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한때는 내 전부였으나 이제는 만나기 전보다 더 깊은 무의미의 블랙홀로 나를 걷어차버린 연인의 추상같은 뒷모습에 살을 에는 듯 아프다.
살다보니 이렇듯 세상이 나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노트북 폴더를 뒤져 찾아보는 영화가 있다. 2003년작,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 첫 장면부터 숨이 턱 막혔다. 술에 잔뜩 취한 채 아들 존을 학교로 데려다주는 존의 아빠가 모는 낡은 자동차가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한적한 주택가 도로를 굴러간다. 남루한 존의 아빠는 아들 앞에서 마지막 남은 서푼짜리 호기를 모아 자신이 과거 존경받을 만한 존재였음을 증명하려 횡설수설한다. 존은 그런 아빠가 안타깝고 짜증나고 가엾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영화를 해보겠다고 닥치는 대로 단편을 만들고 장편 시나리오를 쓰면서 묵직하고 불투명한 세상으로 들어서던 무렵이었다. 당시에 수도 없이 반복해 들었던 스타세일러의
도대체 왜 이 선량한 아이들이 희생돼야 하는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납득되었다. 세상은 그런 곳이다. 세상의 불가해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구스 반 산트는 이 세계가 서 있는 구조를 완벽히 꿰뚫고 있었다. 이 영화는 현대의 과학이다.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세상의 불가해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고 느낄 때마다 이 영화를 본다. 위로받기보다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영화 속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인, 사진을 좋아하는 일라이는 포크를 구부린 팔찌를 손목에 차고 있다. 나도 몇년 전 미국에서 이와 비슷한 팔찌를 구해 지금도 끼고 다닌다. 그처럼 나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 필름을 현상하는 순수하게 광학적인 기쁨을 느끼길 원하면서, 동시에 세상의 불가해함에 희생되더라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길 바라면서.
●전계수 영화감독. <삼거리극장>(2006), <러브픽션>(2011), <버티고>(2018) 등을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