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CJ문화재단 스토리업(STORY UP) 특강 건축가 유현준 편
2019-12-05
글 : 송경원
사진 : 최성열
공간을 읽으면 관계가 보인다

건축과 영화는 많은 지점에서 닮았다. 건축이 공간의 배치와 형태를 통해 지은이의 의도를 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영화 역시 직접 대사에 표현하지 않아도 함축된 주제를 품을 수 있다. 건축과 영화 둘 다 오감을 통한 체험인 데 반해 압도적인 정보량이 시각 정보에 기대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공간을 통해 이야기와 캐릭터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영화와 건축은 판박이다. 건축에서 철학을 발견하는 건축가 유현준 교수는 “영화를 볼 때 대사나 스토리보다는 공간의 배치와 캐릭터, 그리고 감독의 의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고 말한다. 감독이 콘티를 짤 때 건축가는 투시도를 그린다. 어쩌면 건축가들이 감독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건축가가 영화를 재해석한다면 전에 보지 못한 관점에서 새로운 투시도를 그려낼 수도 있을 것이다.

11월 22일 CJ아지트 대학로에서 CJ문화재단의 스토리업(STORY UP) 특강이 열렸다. 영화계 창작자들을 지원하고 예비 스토리텔러들의 전문성 강화에 도움을 주기 위해 기획된 스토리업 프로그램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소재 개발의 영감과 폭넓은 시야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올해는 ‘의학, 뉴미디어, 공간과 건축’ 등 세 가지 키워드를 뽑아 세 차례 특강을 진행했다. 앞서 8월 31일 의사이자 작가인 박재영이 ‘병원이라는 무대, 의사라는 캐릭터’를 주제로 첫 번째 만남을 가졌고 10월 19일 김태원 구글코리아 상무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시대의 콘텐츠와 스토리’를 주제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 바 있다. 올해 마지막 스토리업 특강의 주인공은 인문학하는 건축가 유현준 교수다. 유현준 건축가는 ‘건축가는 영화에서 인문학을 본다’라는 주제로 영화 속 숨겨진 인문학적 상상력에 대해 심도 있는 분석을 이어갔다.

이날 특강에서 유현준 건축가는 <건축학개론>(2012)부터 <마지막 황제>(1987), <아포칼립토>(2006), <굿 윌 헌팅>(1997), <타이타닉>(1997),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매트릭스>(1999)까지 다양한 영화에 대한 흥미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특히 <건축학개론>의 경우 60분 가까운 시간 동안 숏바이숏으로 꼼꼼한 분석과 함께 평론가 못지않은 참신한 해석을 덧붙였다. 그는 “처음 보는 순간 완전히 내 이야기인 줄 알았다. 나 역시 대학 시절 음대 다니는 여학생을 좋아했고 재수생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라며 개인적인 체험으로 문을 연 후 각 캐릭터의 고민과 성장이 영화 속 공간을 통해 어떻게 재현되어 있는지를 하나하나 설명해나갔다. “건축은 공간을 연결시키는 작업이다. 벽을 세우면 단절이 되고 문을 뚫으면 연결이 된다. 창문을 내면 시각적으로는 연결되지만 물리적으로는 차단된다. 발코니나 툇마루는 실내공간이면서 외부공간과 연결되는 장소다.” 특히 시선의 위치와 권력의 상관관계를 연결시킨 해석에서는 참석자들의 경탄이 이어졌다.

유현준 건축가는 “관계가 공간을 통해 어떻게 컨트롤되는지를 읽으면서 영화를 본다”고 정리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도 한국의 상황을 반지하라는 특수한 공간을 통해 흥미롭게 풀어냈다”며 좋은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공간에 대한 이해가 깊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내가 하는 일들의 방향성을 말한다면 갈등을 완화시키고 사람들의 관계를 연결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은 그걸 실현시키는 수단 중 하나다. 선을 그리면 벽이 되는 거고 문을 만들면 소통이 되는 거다.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이야기를 통해 그 작업을 하는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문제와 상황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말고 이야기 안에서 해결까지 할 수 있는 창의적인 스토리들을 많이 만들어주길 바란다.” 유현준 건축가는 사람을 향한 영화에 대한 당부를 마지막으로 2시간에 걸친 열띤 강의를 마쳤다.

●<건축학개론> 영화 속 그 공간

<건축학개론>, 2층집

“잘 모르겠는데 너무 낯설어.” 승민(엄태웅)은 서연(한가인)의 집을 새로 짓기 위해 여러 아이디어를 내지만 서연은 매번 탐탁지 않아 한다. <건축학개론>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다. 승민이 제시하는 신축 건물은 과거의 것을 모두 부수고 단절된 채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일이다. 당연히 낯설 수밖에 없다. 이에 승민은 증축을 제안하고 그때부터 서연의 인생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과거의 기억이 담긴 집에 현재의 자신을 합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3차원적 존재라 사물을 바라볼 때 2차원으로 인식한다. 1층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2층을 올려 해결한다는 건 발상의 전환이자 관계의 도약이다. 그렇게 완성된 2층집 잔디 위에서 잠든 승민을 서연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다른 곳을 보던 이가 드디어 상대를 제대로 봐주기 시작한 것이다.

<건축학개론>, 정릉집

서연(수지)이 강남으로 갈 땐 반지하로 들어가야 하지만 강북에는 마당이 있는 집들이 빈집으로 나와 있다. 서연과 승민(이제훈)이 과제를 위해 정릉의 골목을 탐방하다가 빈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특히 인상 깊다. 길을 걷다가 서연이 문득 옆 골목으로 빠지고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간다. 모두가 공유하는 공공의 공간에서 두 사람만 머물 수 있는 사적인 공간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곳은 시간이 멈춰 있다. 서연이 시계태엽을 감자 멈춰진 공간에 두 사람만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서연이 이렇게 여러 차례 신호를 보내고 있음에도 승민은 용기를 내지 못한다. 툇마루에 걸터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기둥이 막고 있다. 여러 겹의 문을 통과하고 도착한 둘만의 공간이지만 심리적인 벽이 존재한다는 걸 이미지로 직접 선보인 것이다.

<건축학개론>, 창을 내다

창문은 마음의 통로다. 실내공간에서 무엇을 보도록 하느냐가 건물의 방향성을 드러낸다. 승민(엄태웅)은 서연(한가인)의 집을 증축하면서 마지막에 커다란 가로 창문을 하나 낸다. 유럽쪽은 세로 창이 많은 반면 우리는 가로 창이 대부분이다. 강수량이 적고 땅이 단단한 유럽은 평평한 지붕에 진흙 등으로 집을 짓는다. 무른 재료를 쓰기 때문에 가로로 길게 창을 내면 집이 무너질 수 있어 세로로 길게 창을 뚫는다. 거기에 나무로 덧문을 씌우는데 바깥 풍경이 중요치 않다는 의미기도 하다. 반면 우리는 나무로 집을 짓는 기둥 중심의 건축이다 보니 창문을 크고 넓게 낼 수 있다. 처마처럼 디자인이 대부분 나무가 썩지 않게 하는 데 맞춰져 있어 주변 풍경과의 관계가 중요해지는 것도 특징 중 하나다. <건축학개론>에서 가로의 시원한 창을 내는 건 서연에게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일이다.

●공간 돋보인 그 영화

권력, 담을 넘다 <마지막 황제>

황제가 되기 위해 끌려온 꼭두각시 황제 푸이가 자금성을 탈출하기 위해 담을 넘어 건물 옥상 위를 가로지르는 장면이 있다. 이때 푸이는 담장 위에 올라 자금성의 전경을 바라보는데 수십겹의 장벽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게 바로 권력을 발생시키는 거리다. 황제가 있는 공간으로 가려면 여러 공간을 뚫고 나아가야 한다. 뚫고 가야 하는 벽과 문이 많을수록 안쪽 공간이 신성시된다. 스톤헨지보다 오랜 최초의 인류 문명 유적인 괴베클리 테페(BC 1만년경)는 동그란 담장을 두겹 정도 쌓은 형태에 불과하다. 그 얇은 두겹의 벽을 통해 권력자의 공간이 발생한다. 예전에 타워펠리스에 사는 친구를 방문하려고 했을 때 무려 3번의 경비를 통과해야 했는데 그때 그 친구가 성공했다는 걸 새삼 느꼈다. 벽은 곧 권력이다.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은 권력자의 공간이 아니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하려면 일단 벽을 넘어가야 한다.

권력, 높이와 시선 <아포칼립토>

권력은 또한 시선의 높이에서 발생한다. <기생충>에서 부자들은 언덕 위에 살고 서민들은 반지하에 살며 그보다 더 밑바닥의 지하에 사는 사람들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높이에 다다를 순 있지만 노동력을 써선 안된다. 고층빌딩의 펜트하우스와 옥탑방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다락방이나 옥탑방을 가기 위해선 걸어 올라가야 한다. 반면 권력자들은 차를 타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갈 수 있는 높은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이 시선의 위치가 권력을 만든다. 유일한 예외가 제의를 지낼 때다. <아포칼립토>에서 제사장은 높은 곳까지 걸어 올라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권력의 위치를 점할 수 있는 건 모두의 시선이 모이는 장소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미있는 공간이 그리스의 원형극장이다. 그곳에선 배우가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다는 측면에서는 주인공이고 권력자다. 반면 원형극장은 무대가 아래에 있고 객석이 위에 있다. 높이의 측면에서는 관객이 권력자다. 다시 말해 원형극장에서 관객과 배우는 동등한 관계가 된다. 민주주의 사회의 건축물인 셈이다.

모두의 공간 <굿 윌 헌팅>

<굿 윌 헌팅>에서 윌 헌팅(맷 데이먼)과 숀 교수(로빈 윌리엄스)가 나란히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카메라가 이들의 뒷모습을 찍었다는 게 중요하다. 벤치는 도심 속에 허락된 공공의 공간이다. 현대사회에서 앉을 수 있는 공간은 다 돈을 지불해야 한다. 돈이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이 공통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장소가 없는 것이다. 그걸 보완해주는 게 공원과 벤치다. 그곳은 사회가 만들어준 공동의 공간이다. 뉴욕 브로드웨이 선상에 벤치가 170여개가 넘는데 서울의 강남에는 50개가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카메라가 윌과 숀 교수의 뒷모습을 잡을 때 관객은 이들과 같은 시점으로 주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 동시에 갈등이 해소되는 순간 주인공과 공간의 관계를 제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효과도 함께 얻는다. 공간은 언제나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당신이 주의 깊게 바라본다면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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