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에 인색한 누구라도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감쪽같은 그녀>는 손녀 공주(김수안)와 갓난아기 진주 자매가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 말순(나문희) 앞에 나타나 함께 살면서 벌어지는 따뜻한 가족 이야기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가족은 항상 함께여야 한다는 영화의 메시지는 요즘처럼 혼자 사는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 뜬금없거나 촌스러울지 몰라도, 마음이 절로 무장해제될 만큼 보편적이고 묵직하다. 이 영화는 <신부수업>(2004), <허브>(2007), <마이 블랙 미니드레스>(2011), 중국영화 <웨딩 다이어리>(2014) 등을 연출한 허인무 감독의 신작이다. 12월 4일 개봉을 앞두고 긴장됐는지 그의 목소리는 다소 쉬어 있었다.
-원래 제목은 <소공녀>였는데.
=배우들을 캐스팅할 때 같은 제목의 영화가 이미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지금의 제목으로 바꿨다. 영화를 보면 어떤 뜻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연출을 제안받았을 때 소재의 어떤 점에서 가능성을 보았나.
=일일드라마 <내 남자의 비밀>의 각본을 쓰고 있었을 때다. 할머니와 손녀가 함께 살게되는 아이템을 제안받았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누가 연출을 하더라도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고, 스스로에게 힐링이 될 것 같아 연출을 맡기로 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낸 경험이 시나리오에 많이 반영됐을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는 게 겁난다. 그러다보니 확실히 아는 길을 가고, 그 기준에서 이야기를 확장시키는 게 중요했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이 무섭지 않았나. 반대로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자에게 너그럽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스킨십이 많은 덕분에 그들에게만 비밀을 털어놓은 적도 많다. 그런 경험이 이 영화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시간적 배경을 2000년으로 정한 이유가 뭔가. 2000년은 과거라고 하기엔 가깝고, 현재라고 하기엔 20여년 전이라 다소 애매하다.
=1974년생이라 1980, 90년대를 살긴 했지만 잘 모르는 시대고, 경험을 토대로 써야 하는 이야기이기에 잘 아는 시기인 2000년을 배경으로 설정했다. 극중 공주의 동생 진주가 올해로 20살이 되는 때이기도 하고. 부산 영도를 배경으로 삼은 건 그곳이 변화가 더뎌 과거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해운대도 생각했지만 알다시피 해운대는 해마다 바뀌지 않나.
-조손가정(만 18살 이하인 손자와 65살 이상인 조부모로 구성된 가족.-편집자)은 어두울 수 있는 소재인데 영화는 그들을 밝게 그려서 마음이 편했다.
=영화는 슬픔을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아름다워>(1997)나 <굿바이 마이 프렌드>(1995)가 그렇듯이 어두운 소재를 다룬 영화일수록 밝게 그려야 한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려보면 아프거나 돌아가실 때를 제외하면 항상 즐겁고 유쾌한 기억밖에 없다. 그런 경험도 이 영화를 연출하는 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이 얘기가 나문희, 김수안 두 배우에게도 전달됐을 것 같다.
=캐스팅하는 과정에서 (김)수안이의 어머니로부터 “수안이가 밝은 영화를 작업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고, “우리 영화는 밝다”고 말씀드렸다. 나문희 선생님께서는 코미디 연기를 정말 좋아하셔서 잘 맞았다.
-나문희 선생님의 어떤 면모가 말순 역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나.
=코믹과 감동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배우가 나문희 선생님 말고는 없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무뚝뚝하셨는데 함께 작업하면서 가까워지니 되게 즐겁고 유쾌하셨다. 현장에서 가끔 툭툭 던지는 얘기도 연출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와 함께 서사를 이끌어가는 김수안에 대한 믿음도 컸을 것 같다.
=<부산행>(2016), <군함도>(2017) 등 전작을 보면 수안이가 영화의 엔딩을 마무리하더라. 그와 함께 작업한 감독들이 그만큼 그를 신뢰한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게 영화에도 신뢰를 주는 것 같았다. 수안이가 가진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다만 캐스팅하는 과정에서 수안이가 빨리 자랄까 걱정됐다. (웃음)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니까.
-두 배우가 경험이 많아 특별한 주문이 필요 없었을 것 같다.
=잘해야 본전이라 더욱 긴장됐고, 더 잘하려고 욕심냈다.
-공주와 말순의 주변 인물들도 허투루 다루지 않더라.
=드라마 각본을 썼던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다. 드라마는 주인공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도 비중 있게 다루는 매체니까. 영화나 드라마를 연출하면서 항상 신경 쓰는 게 조연이든 단역이든 작은 역할이라도 그들이 등장하는 신만큼은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조연배우들의 분량이 늘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공주가 할머니를 포함해 마을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로 확장됐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마을이 한 가족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싶었다.
-천우희 배우가 공주의 담임인 박 선생 역을 맡았다. 특별출연이라고 하기엔 분량이 많던데.
=(천)우희씨가 내 연출 데뷔작인 <신부수업>으로 데뷔했다. 그게 인연이 돼 우희씨가 출연을 약속하면서 의리를 지켜주셨다. 오랫동안 우희씨를 지켜보면서 그의 매력적인 얼굴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최대한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
-등장인물 모두 착해서 판타지 같더라.
=물론 악역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적지 않게 받았다. 하지만 세상이 너무 피곤하고 험난하니 이 영화만큼은 관객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말순과 공주에게 닥친 환경과 상황이 악역이라면 악역인데, 인물만큼은 착하게 그리고 싶었다. <감쪽같은 그녀>는 이 선택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간 <천국의 눈물> <천상의 약속> <내 남자의 비밀> 등 드라마 대본을 썼지만 영화는 중국영화 <웨딩 다이어리> 이후 5년 만이다.
=운이 좋게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 시절 <특집 노래자랑> <가화만사성> 등 단편영화를 잘 만들어서 <신부수업>으로 일찍 데뷔할 수 있었지만 여러모로 호된 수업을 치렀다. 공부를 더 많이 해야겠다 싶었다. 작품 수가 늘어날수록 절실함은 더욱 커졌다. 드라마 대본 작업도 즐겁지만 피곤하거나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다시는 영화를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도 많았다. 그간 드라마와 중국영화를 작업하는 동안 한국영화를 찍지 못해 불안했던 게 사실이다. 오랜만에 기회가 오니 내가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싶었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감쪽같은 그녀>의 후반작업을 진행해보니 휴먼드라마가 감정을 연결하는 작업이라 의외로 충분한 후반작업 시간이 필요하더라. 후반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가족영화 3부작을 꼭 해보고 싶었다. 전작 <허브>가 엄마와 딸을, <감쪽같은 그녀>가 할머니와 손녀를 다룬 이야기라면 다음 작품은 노모와 아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그전에 <감쪽같은 그녀>부터 잘되어야 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