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센타>는 어느 한적한 국도변, 장사가 잘 되지 않는 작은 카센터에서 재구(박용우)와 순영(조은지) 부부가 벌이는 사기행각을 그린다. 도로 위에 못을 박아 카센터 앞을 지나는 자동차는 이곳을 들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 부부의 작전이다. 10년 전 <빵꾸>라는 제목으로 초고를 썼던 하윤재 감독에게 <카센타>는 “언제가 됐든 반드시 세상에 내놓겠다고 다짐한” 작품이었다. “김태성 촬영감독이 <빵꾸>는 신인감독의 연출력을 보여주기에 좋은 아이템이라며, 투자를 받지 못해도 우리끼리 소액 투자를 받아서 찍자고 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알던 스탭들을 모으게 됐다.”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장편/저예산영화 제작지원작으로, 경기콘텐츠진흥원 G-시네마 제작투자지원작으로 선정되며 제작에 급물살을 탄 <카센타>는 11월 27일 개봉해 관객을 만나는 중이다.
-10년 전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들른 카센터 주인과 나눈 대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50대 후반의 인상이 험상궂은 아저씨였다. 기다리는 동안 솔직히 좀 무서웠다. 이미 해가 져서 주변은 어둡고 주변에 인가는 없고. 내가 영화하는 사람이다 보니 별의별 상상이 다 되더라. 내가 여기서 실종되면 사람들이 날 찾아낼 수는 있을까? 사장님과 타이어를 고르며 대화를 나눠보니 와이프는 읍내에 살고, 자기만 여기에서 생활한다고 했다.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재도구도 별로 없는 그곳이 왠지 영화 세트장 같았다. 아저씨가 장사가 너무 안돼서 괴롭다고, 주변에 리조트가 들어오고부터 상황이 더 어려워졌다고 토로하더라. 읍내 아파트는 싫고 땅을 밟고 살고 싶다든지 자영업자로 살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초고를 쓰고 10년 후에 영화가 만들어졌다.
=홍보 마케팅으로 영화 일을 시작했다. 당시엔 기획 PD를 하며 살고 싶었다. <빵꾸> 시나리오를 정승혜 영화사 아침 대표님, 안상훈 상상필름 대표님 등 주변에 조언을 구할 수 있는 분들에게 보여드렸다. 공통된 반응이 있었다. 기획 PD가 썼다고 하기에는 동선이나 비주얼이 너무 명확하다는 것이다. 감독이 될지, 기획 PD가 될지 다시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그리고 상업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좀더 장르적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초고는 2주 만에 썼지만, 이런 의견을 반영해 2고를 완성하기까지는 6개월이 걸렸다. 그리고 내가 연출쪽으로 가야 하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단편을 찍었다. 당시 스탭들을 앉혀놓고 내가 감독으로서 부족한 점이 있다면 냉철하게 얘기해달라고도 했다. 이후 다른 제작사와 2~3년 동안 <미자와 스테파니>라는 작품을 기획·개발했다. 상처와 트라우마를 가진 두 여성의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당시에는 여성 투톱 영화는 흥행 면에서 불안하다는 말이 많아 혼자 10고까지 고치게 됐는데, 번아웃이 돼서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4~5년이 지났다. 무척 사랑했던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처럼 <미자와 스테파니>는 다시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있다.
-김태성 촬영감독, 최유리 미술감독 등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스탭들과 <카센타>를 만들었다.
=충무로에서 잘나가는 스탭들이다. 이분들을 알고 지낸 지 10년 가까이 됐고, 김태성 촬영감독은 17년 정도 됐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아는 분들이라 재구와 순영의 개싸움 장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2테이크 안에 다 찍었다. 촬영도 한달밖에 안 걸렸다. 22회차, 보충 촬영까지 23회차. 비도 안 오고 굉장히 복받은 현장이었다.
-한정된 공간인 ‘카센터’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라 그림이 심심해질 수 있다는 우려는 없었나.
=그래서 인물의 밀도감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재구와 순영 외에 읍내에 살고 있는 순영의 처가 식구들을 등장시키고 이들이 서로 밀어내는 공기가 필요했다. 이미지적으로 단조롭지 않게 하기 위해 중간중간 풀숏으로 확 빠지는 순간을 넣었다. 사실 순영이 문 사장(현봉식)을 만나고 돌아오는 신은 순영의 감정에 좀더 집중해야 하는게 아니냐는 스탭들의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인물의 감정과 카메라 사이즈의 불균형이 생기는 방식으로 화면에 변화를 주려고 했다. 그렇게 공간의 협소함을 커버했다.
-촬영은 어디서 했나.
=재구, 순영 다음 주인공은 공간이다. 시나리오상으로는 해남군 송지면이었다. 내가 10년 전 들렀던, 카센터가 있던 밀폐되고 보수적인 지역의 정서는 갖고 오되 휴양지 느낌도 나야 했다. 카메라를 360도 돌렸을 때 주변 3~4km 이내에 인가가 없다는 조건을 충족해야 했는데, 요즘엔 그런 곳이 지방에도 없더라. 다행히 강화도 석모도에서 적절한 로케이션을 찾았다. 2.35:1 비율로 찍은 것도 주변 공간을 넓게 보여줄 때 이를 다 담아낼 수 있는 스크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카센타>는 결국 ‘계급’에 대한 이야기다.
=10년 전 카센터 아저씨와 이야기한 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로드킬당한 개구리들의 흔적을 봤다. 도로 위에 까만 줄처럼 찐득하게 시체가 남아 있더라. 아스팔트를 깔지않았다면 그들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지역사회가 발전하는 것을 반대하는 아저씨의 삶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센타>에도 개구리가 많이 나온다. 촬영 헌팅을 나가보니 이젠 도로 위에 개구리가 보이지도 않더라. 고속도로가 들어오면 국도는 죽고, 재구 같은 사람들은 계속 밀려난다. 그리고 생태계도 바뀌고 파괴된다. 아스팔트까지 올라왔다가 죽음을 맞이한 개구리처럼 재구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먹고사는 것. 그래서 도로에 못을 박은 거다. 그리고 그렇게 변하는 것은 거창한 게 아닌 작은 계기로부터 시작된다. 편의점에 1천원짜리만 들고 갔는데 가격이 1200원으로 올라 사지 못하면 분할 때가 있지 않나. 그런 사소한 계기로 재구와 같은 사람들이 흔들리고 독기를 품게 된다. 못은 아주 작지만 영화에서 중요한 상징을 담당한다. 난 이게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영화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원래 시각디자인과를 나와 광고회사에 다녔다. 영화를 너무 하고 싶어서 주말이면 한겨레신문사 같은 곳에서 하는 워크숍도 들었다. 주변에 영화하는 사람이 없어서 당시 <공동경비구역 JSA>(2000)로 한창 핫했던 심재명 대표님을 뵙겠다고, 종로경찰서에 무작정 건물 위치를 물어보고 찾아갔다. 약속도 하지 않은 내가 명필름 막내 직원의 착오로 건물에 들어가게 됐다. 그렇게 40분 넘게 심재명 대표님과 독대하며 대화를 나눴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감사하다. 무작정 찾아온 사람에게 “그렇게 영화를 하고 싶다면 언젠가 이 바닥에서 또 만날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해주시다니. 다음날 바로 회사를 때려치우고 여성영화인모임 홍보마케팅 과정 수업을 듣게 됐다. <하얀방>(2002)이란 작품의 기획실에 들어가 홍보마케팅을 하면서 영화계 경력을 시작했다. 심재명 대표님과 고 정승혜 대표님, 안상훈 대표님. 이 세분이 내가 이 바닥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셨다.
-앞으로의 계획은.
=언론배급시사회 이후 기자분들이 좋게 평가해줘서 기분이 좀 업됐다. 나름대로 다음 스텝을 다 정해놨는데 요 며칠 <카센타> 흥행 추이를 보며 너무 힘들었다. 오전 8시 아니면 새벽 1시 10분에만 영화를 볼 수 있다. 어제 봉은사에서 국화빵 굽는 봉사를 4시간 넘게 하면서 심정적으로 힘들었던 부분을 정리했다. 영화는 10년 만에 나오는데, 국화빵은 1~2분 안에 구워진다. 그 단순한 이치가 큰 힘이 되더라. 40대 여성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라든지 생각해둔 작품들이 있었는데, 나만을 위한 게 아니라 주변 배우와 스탭에게 모두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영화를 해야겠다고 마음이 바뀌었다. <카센타>는 나와 마음이 맞는 스탭들이 모여서 만들었지만 앞으론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다음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