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윤희에게> 임대형 감독 - 오타루에서 윤희가 코트를 입은 이유는
2020-03-12
글 : 김소미
사진 : 오계옥

<윤희에게>는 10대의 끝무렵, 여자들의 사랑을 인정받지 못했던 두 소녀가 20여년이 훌쩍 지나 재회하는 이야기다. 윤희(김희애)와 준(나카무라 유코)의 유예된 사랑과 상처는, 이제 윤희의 딸 새봄(김소혜)의 성장과 함께 뜻밖의 복원 궤도에 오른다. 오타루의 설원과 담담한 편지 내레이션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한국과 일본을 잇는 중년 여성의 퀴어 멜로드라마이자 일상의 근심을 덜어내는 아스라한 겨울 여행기로서 구석구석 충만하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후 빠르게 개봉(11월 14일)까지 달려온 지금, 영화는 현재 4주째 다양성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지켰고 10만 관객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관객의 입소문에 힘입어 배급 상황의 악조건을 버텨내는 중인 <윤희에게>의 아름다움을 가능한 한 더 세심하게 들어보고 싶었고, 이에 화답한 임대형 감독이 부산, 광주, 대구 등 지방 순회 GV(관객과의 대화)가 한창인 와중에 <씨네21> 스튜디오를 찾았다.

-배우 김희애·김소혜 팬덤과 더불어 N차 관람객 등 관객의 자발적인 입소문이 체감되는 상황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작은 소품이나 설정 등 작품의 구석구석을 다정하고 꼼꼼하게 지지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사랑받고 있는 것 같다. 어찌 보면 이런 영화가 세상에 진즉 나왔어야 했다는 관객의 갈증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기쁜 것은 영화에 대한 감상을 관객 각자의 2차 창작물로 풀어낼 때다. 소설, 일러스트 혹은 감상곡 형태로 자신들의 SNS나 유튜브에 올리는데 그걸 찾아보면서 ‘내가 이런 분들을 위해 영화를 만들었구나’ 하고 위로받는다.

-<윤희에게>의 출발점을 짚고 넘어갔으면 한다. 일본 오타루 여행에서 중요한 인상을 얻었고, 부산국제영화제 인터뷰 당시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2017)에서 여성 인물을 더 집중적으로 다루지 못한 것에 대해 감독으로서의 아쉬움을 토로한 적 있다. 또 매년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오타루 여행 중에 만난 동네 할머니 한분이 “눈이 언제 그칠까요?”라고 말하는 모습이 그 공간에 대한 인상으로 남았다. 매년 눈이 아주 많이 오는 동네에서 그 말을 하는 것이 새롭게 들렸다. 정서적인 측면에서 내가 당시에 갖고 있던 그런 막막한 감정들을 <윤희에게>에 담으려고 했다. LGBTQ에 대한 관심은 이 영화가 세상에 꼭 나와야 하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많이 하면서 확신으로 이어졌다. 한국 중년 여성의 퀴어 서사는 아직 아무도 하지 않은 이야기다. 왜냐하면 여러모로 너무 어려우니까.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2019년을 살아가는 창작자로서 스스로 부여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있었다.

-그 어려운 이유 중에는 창작자가 스스로 당사자성의 여부를 두고 검열하게 되는 지점도 있었을 것 같다.

=‘이게 내가 해도 되는 이야기인가?’라는 생각은 모든 감독들이 갖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하지만 내가 어디 멀리 있는 외계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야만 할까 싶기도 했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얼마간 이중적인 태도가 필요했다. 내 한계점을 명확히 인지하려고도 했다. 기꺼이 오해받고 의심받고, 또 스스로도 그렇게 살피면서 한땀 한땀 만들고 싶었다. 영화가 감독 개인의 문학작품이 아니라는 마음도 중요했는데, 많은 스탭들의 아이디어를 반영했다. 이번 인터뷰에선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부터 함께했던 하지혜 스크립터를 언급하고 싶다. 그녀에게 정말 많은 것을 물었고 의지했다. 나는 많은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윤희에게>는 그래서 가능했던 영화다.

-성적 지향을 이유로 정신병원에 다녀야만 했던 윤희, 엄마가 한국인이라는 존재를 숨기고 살았던 준 등 억압되어 있던 인물들이 부지불식간에 삶의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는 순간들이 영화에 담겨 있다. 준에겐 아버지의 장례식이 그 시발점이 되는데, 윤희에겐 어떤 영화적 장치를 부여했나.

=윤희가 공장에서 나와 철로를 걸을 때 그녀 옆으로 바짝 붙어서 지나가는 기차 신이 그렇다. 그때 돌아보는 윤희의 표정이, 나는 누구이고 지금 어디에 있는가 싶은 황망한 얼굴이다. 윤희란 사람은 10대 시절에 준을 떠나보내고 가족으로부터 크게 상처받은 이후 쭉 잘못된 단추를 끼우며 살아온 사람이다. 오타루로 가는 윤희의 여행은 그 단추를 다시 끼우려고 과거로 가려는 결심이 아닐까. 상처를 제대로 마주한 뒤 첫 단추를 아귀가 맞게 다시 채우고 돌아오는 거지.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딸과 함께.

-윤희와 준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존재와 연대가 빛나는 영화다. 서로를 아끼는 사람들끼리 염려하고 배려하며 살아가고 풍경이 비춰진다. 적당히 느슨하고 자유롭게, 겉으로 보기엔 다소 무심하게 굴기도 한다.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배려하면 좋을지 그 방법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중요한 건 각자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는 거다. 특히 가족의 경우에만 가능한 유대가 있다. 이를테면 마사코 고모는 준을 너무 사랑해서 사실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다. 다만 내색하고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좋은 관계를 위해 한뼘의 간격을 유지하는 미덕, 일종의 인내심이다.

-겨울밤에 홀로 SF소설을 읽는 문학 애호가이자 이 영화의 최연장자인 마사코 고모는 적시에 사랑의 전령사가 되어준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준의 편지를 윤희에게 몰래 부치고, 후반부에서는 준에게 윤희의 딸 새봄의 소식을 전한다. 우연이나 기적이 의인화된 사람 같기도 하다.

=듣고 보니 약간 신적인 존재일 수 있겠다. (웃음) 마사코 고모는 사실 이 영화를 통틀어 내가 가장 이입을 잘할 수 있는 인물이다. 내게 그런 할머니가 있었으면 좋겠고, 내가 그렇게 늙고 싶기도 하다.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야기를 썼다. 현실 세계에서는 어쩌면 희박한 일과 관계성일지 모르지만 나는 <윤희에게>의 세계가 내 현실의 표준이 되기를 믿으며 살고 싶다.

-새봄의 경우 준과 데이트하는 로쿄를 제외하고 극중 모든 주요 인물들(경수, 삼촌, 아빠, 마사코, 준)과 직접 만나 2인 대화를 나눈다. 이 과정에서 조금은 성급하기도 한 그녀의 호기심과 열띤 걱정이 드러난다. <윤희에게>가 스무살을 향하는 새봄의 성장 로드무비로서도 뭉클한 이유다.

=새봄이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다 만나면서 여기저기 헤집고 다닌다는 것을 현장에 가서야 깨달았다. 새봄이 안 나오는 신이 없는 거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 영화의 모든 인물들이 내향적이다. 그런 사람들은 몇 백 년이 지나도 절대 서로 못 만난다. 그들을 만나게 해주고, 답답함을 긁어주고, 자극하고 추동하는 그런 존재가 우리 영화에 있었으면 했다. 그게 윤희의 딸이라는 지점이 중요하기도 하고. 윤희는 어렸을 때 지금과는 달리 아주 대범한 성격이었을 것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커밍아웃을 했고, 필름 카메라 설정도 그녀만의 취향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윤희가 오타루에서 준의 집 앞을 서성이다가, 준이 나오자 골목 어귀로 숨는 장면은 그녀에게 10대 시절의 모습이 되살아난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 마치 지금의 새봄과 겹쳐지도록.

-남편 인호도 세심하게 연출했다. 올해 여성 감독이 연출한 한국 영화에서 눈물을 터뜨리는 남자들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벌새>의 아버지와 오빠, <82년생 김지영>의 남편, 그리고 <윤희에게>의 남편 인호다. 악의는 없지만 인호는 윤희의 감정과 상황에 무지한 채 자기 감정에 취해 있어 약간 유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인호는 꼬인 실타래 같은 존재다. 그걸 윤희가 풀어주길 바라고. 난 그것 자체가 폭력적인 것 같다. 지금 한국 사회엔 자기의 실타래를 스스로 풀 힘이 없는 남성들이 많다.

-준을 몰래 지켜보다가 택시 안에서 눈물 흘리는 윤희, 오타루의 바에 앉아서 한국말로 소망을 이야기하는 윤희는 김희애 배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연기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김희애가 해석한 윤희의 어떤 점에 흡족했나.

=배우가 집중했을 때에만 나오는 미묘한 얼굴의 변화 같은 것. 김희애 배우는 아주 많은 표정을 갖고 있어 표정만으로 전달되는 것들이 많았다. 또 김희애 배우가 출근하러 버스 정류장에서 있을 때, 공장에서 일할 때 어딘가 이질적인 감이 있는데 그게 좋았다. 윤희는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어야 했다. 어쩌면 그녀는 그곳을 한참 전에 벗어나, 준이 있는 곳에서 살았어야 하는 인물이다. 그걸 느낌만으로 보여주고 싶었는데 김희애의 존재감이 해낸 것이다. 이런 뉘앙스가 없었다면 윤희 캐릭터가 제대로 설명되지 못했을 것 같다. 오타루 현지에서는 관광객과 현지인을 패딩 착용의 유무로 구분한다고 하는데(웃음), 윤희에게 멋진 코트를 입힌 것도 그 때문이다.

-윤희와 준의 편지는 어떻게 구상했나. 두 사람의 성격과 라이프스타일이 확연히 구분된다.

=다듬어가는 과정에서 캐릭터성이 더해졌다. 준은 일본에서 대학도 다녔고, 현재 동물병원 수의사에, 집 안 곳곳에 책이 많다. 반면 윤희는 고등학고 졸업 직후 결혼해서 새봄을 낳고 지금은 공장에서 조리사로 일한다. 그 둘의 편지는 무척 다를 거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차이를 노골적으로 두었다. 사실 처음에는 준의 편지를 한국어로 읽을 계획이었다. 나카무라 유코 배우가 한국어를 열심히 연습하기도 했다. 그런데 편지가 자기 속마음을 전하는 매개체라는 점에서 극중 인물과 배우가 가장 편한 언어로 읽도록 수정했다. 평소에도 서간체만의 감정을 좋아하는데, 말의 방향성이 모든 대상에게 다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한 사람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것 같다.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 <애도 일기> 같은 내밀한 에세이들을 좋아하고 <윤희에게>를 쓰기 전엔 슈테판 츠바이크의 <낯선 여인의 편지>를 읽었다.

-준의 편지를 받고, 이어서 자신의 답장을 쓴 뒤에야 영화 마지막에 윤희가 이력서를 쓴다. 인생의 다음장으로 나아가게 되는 순간이 편지에서 이력서라는 쓰기의 활동으로 연결되어 흥미로웠다.

=윤희가 자기 손으로 당당하게 고졸이라고 적는 클로즈업 숏이 첫 시나리오부터 묘사되어 있었다. 뭐랄까, 특별한 경력이 없지만 자기 손으로 그걸 직접 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오빠가 구해준 일을 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일을 찾으려는 노력이고, 무엇보다 그런 모습을 딸에게 보여주는 게 윤희에겐 큰 의미일 것이다. 단지 스스로 용기를 내는 것 이상으로 그 용기를 딸한테 물려주고 싶은 마음. 이력서 장면은 그래서 중요했다. 과거에 어머니가 이력서 쓰는 걸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너무 잘 썼다며 자기가 특별해 보인다고 무척 좋아하시던 게 잊히질 않는다. 그때 느꼈던 감정들도 반영돼 있다.

-오타루 여행을 기점으로 전반과 후반에서 인물들의 행동과 장면 배치가 대구를 이룬다. 영화 초반에 새봄이 삼촌의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고 이후 아빠 인호를 만나는 과정이 후반부에선 윤희가 증명사진을 찍고 남편을 만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든지, 초반부에 준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부장제로부터 비로소 벗어나는 듯한 의미가 후반부에 윤희가 오빠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완성되기도 한다. 마치 서로에게 응답하는 모양새다.

=어떤 관객이 데칼코마니 같다고 표현했던 기억이 난다. 신의 배치나 컷의 순서를 짤 때 나름대로 상당한 논리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나는 어쩐지 무한정 열려 있는 메타포가 불안하다. 비교적 정확하고 닫혀 있는 메타포를 좋아한다. (웃음)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플롯을 볼 때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서사적으로는 윤희와 준, 윤희와 새봄이 다르지만 비슷하고, 한국과 일본 또한 다르지만 비슷하다는 느낌이 이런 형식과 잘 맞겠다고 판단했다. 사회적으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분위기에서 결국은 모두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어떤 반복 속에서 계속해서 서로의 기억이 상기되는 감각을 나타내고 싶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가 불치병에 걸린 남자가 소원을 실현한 뒤 삶을 아름답게 정리하는 종결형에 가까운 작품이었다면, <윤희에게>는 묵혀둔 과거를 마주하고 새 삶으로 나아가는 회복과 복원의 서사라는 점에서 얼핏 비슷하지만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좋은 드라마란 한 인간이 자신을 억압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존엄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작법서에서 본 이후로 기억하고 있는 말이다. 전작과 <윤희에게>의 차이가 있다면 얘기한 대로 전작은 조금은 과거지향적인 영화를 찍은 것 같다. 나 스스로 지난 시간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고, 영화를 만들고 나서는 과거의 상처나 영향 아래있는 내가 싫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새 영화는 반드시 현재를 마주하고 또 미래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아,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윤희에게>도 감독으로선 아쉬운 지점이 많다.

-이를테면 어떤 것들인가.

=누군가는 느리다고 느끼더라도 나에게는 전혀 지루하지 않은 길이와 호흡이 있는데, 가능한 많은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문턱을 낮추는 과정에서 내 호흡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체념한 부분이 있다.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결함도 보이고, 화면 안에 있는 소품 중에 저것 말고 다른 것을 넣었으면 어땠을까 싶은 온갖 아쉬움이 든다. 그래서 영화에 집중을 못한다. <윤희에게>는 관객으로서 내가 보고 싶은 영화이기도 했는데 정작 나는 잘 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얼마 전 <씨네21> 인터뷰에서 김희애 배우도 비슷한 방식으로 아쉬움을 토로했다. 구상했던 여러 버전의 윤희 중에 다른 것을 택했으면 또 어땠을까 하고.

=<윤희에게> 팀은 어디서 자기 검열이 심한 사람들만 일부러 모아놓은 것 같다. 다들 흡족해하는 법이 없다. (웃음) 김희애, 김소혜, 성유빈 배우, 여러 스탭까지 다들 ‘더 잘할 수 있었는데…’라는 말 밖에 안한다. 특히 소혜 배우는 지금도 그런다. 윤희와 새봄 모녀가 현실에서도 참 닮았구나, 느끼게 되는 지점이다. 말이 나와서 보태자면, 두 배우는 조금 다른 각자의 스타일대로 굉장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내가 더 성장해서 두 분을 다시 만나고 싶다.

-윤희와 준의 만남은 시계탑 앞에서의 마주침과 이후 운하를 걷는 뒷모습, 단 두 장면으로 매우 짧게 처리된다. 애초에 계획한 분량이었나.

=덜어냈다. 조금 있으면 각본집이 나오는데, 그걸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웃음) 시나리오와 다르게 1시간 50분 남짓한 러닝 타임의 영화에서는 새로운 호흡과 리듬이 필요했다. 박세영 편집감독과 머리를 많이 쥐어뜯었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우리가 그 신을 자르기로 한 이유는 어떤 대화나 행동을 보여주는 것보다 관객이 상상하게 하는 것이 그 시간의 가치를 표현하는 최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짧은 대신 사운드에 더 공을 들였다. 또 준이 자주 꿈속에서 윤희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는데, 그 대사를 빌려 어느 정도 두 사람의 만남이 꿈이나 환상처럼 보이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해후 장면을 생략한 데에는 그만큼 오래된 세월과 둘 사이의 장벽을 관객이 체감하도록 만들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던 것일까.

=예를 들어 새봄과 경수의 관계는 딱히 방해받지 않는데 윤희와 준은 왜 그렇게도 같이 있는게 어려웠을까, 그것을 질문해보고 싶었다. 둘은 그동안 왜 꿈에서만 같이 있을 수 있었나 하는 것. 윤희와 준이 운하를 같이 걷고 있는 순간에 관객이 기대하는 것은 그 이상일 수 있다. 성애 묘사가 있다든지, 진한 대사들이 오간다든지. 그런데 나는 오랜만에 해후한 두 사람에게 그런 것들이 마냥 자연스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플롯의 절정부를 가장 짧게 처리한 셈이다. 그에 비해 영화 전체적으로는 리듬이나 분량 면에서 굳이 이야기를 경제적으로 다루려는 강박이 느껴지지 않는다.

=클라이맥스에서 관객의 진을 빼놓게 되면 그 이후 장면들은 마치 절정의 잉여분처럼 보일 수 있다. 어느 정도 감동을 주면서도 다음을 생각하고 싶었다. 누구나 결국 자기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니까. 플롯의 관점에선 초반부에서 충분히 천천히 쌓지 않았다면 후반부에서 일종의 해소나 벅찬 감정을 느끼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 조금 느리고 지루하다는 인상을 주더라도 어떤 시간을 견디고 무언가를 알아야만 비로소 극중 인물들이 제대로 보인다. 고구마를 먹어야 사이다를 먹었을 때 더 시원한 것처럼? (웃음)

-태도 면에서는 1940~50년대 헐리우드 고전 멜로드라마를, 로케이션으로는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 등과 비교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츠바이크의 소설을 영화화한 막스 오퓔스 감독의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1947)를 본 적은 있다. <러브레터>(1995)의 경우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그 영화를 한 번도 끝까지 본 적이 없다. 일본 영화들 중에는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들을 정말 좋아한다.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2017)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이 내한했을 때 영화제에서 일하는 이탈리아 친구에게 부탁해 감독님 사인도 받았다. (웃음) 일본에서는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을 ‘담담계’라고 표현하는데, 감독 본인은 정작 자기 영화를 담담하다고 느끼지 않는단다. 그렇게 보일 뿐이지, 그들이 통과하는 상황과 감정은 무척 드라마틱하다는 거다. 정말 슬프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영화를 보면서 관객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영화들을 만드는 것 같다. 나 또한 <윤희에게>가 담담한 영화가 아니라 사실은 무척 격정적인 영화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다.

-감독의 취향이 확고하게 드러나는 영화다. 중년 여성, 퀴어, 혼혈, 담배 피는 여자들, 홀로 SF 소설을 읽는 할머니, 필름 카메라를 든 고등학생, 천재적인 귀여움을 자랑하는 고양이까지. 사려깊게 가시화된 취향과 지향의 집합체가 공동의 관심사를 보유한 관객들을 환호하게 만든다.

=살다보니 주변에 좋아하는 사람들만 남게 되는 것 같다. 내 세계가 협소해지는 인상을 받기는 한데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특히 담배, 고양이, 필름 카메라는 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담배는 끊어야 하는데 의지가 박약하여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에 술, 담배, 로큰롤이 범람하듯이 나처럼 가난한 사람에겐 담배가 꼭 필요한 기호식품이다. 항상 카우리스마키 영화를 핑계삼아 못 끊었다고 말한다.

-개봉과 함께 공들인 OST 앨범 발매를 했다. 김해원, 임주연 음악감독이 작업한 이번 영화음악은 전작보다 훨씬 서정적이고 풍성한 선율을 자랑한다. 곧 각본집 발간을 예고하기도 했다.

=물성이 있는 결과물을 갖는 것에 욕심이 많다. 이것도 일종의 아날로그 취향일까. 어쩔 수 없이 근대적인 인간 같다. 컴퓨터 파일보다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게 좋아서 특히 OST 앨범은 영화 완성 전부터 제작사 대표에게 무조건 해달라고 졸랐다. 예산이 문제긴 했지만, 다행히 박두희 영화사 달리기 대표도 뭐든 시도하길 좋아하는 사람이라 잘 성사됐다.

-<겨울왕국2> 개봉 주에도 평일 좌석 판매율 1위, 주말 좌석 판매율도 3위를 지키면서 작품의 힘을 증명했다. 동시에 상영관 부족에 대한 원성도 있었다. 순제작비 10억원으로 전작에 비해 큰 제작 및 배급 시스템을 겪으면서 고충도 많았겠다.

=여느 감독들처럼 적어도 남한테 손해를 끼치진 말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떨치기 어렵다. 그래서 사실 마음이 아프다. 손익을 넘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윤희에게>와 비슷한 영화들이 선례를 남겨야만 다음 창작자들이 수월하게 도전할 수 있기에 그런 아쉬움도 크다.

-새 작품은 어떤 이야기를 구상 중인가.

=요즘 우울하고 시니컬한 상태인데 휴식을 취하려고 한다. 내 상태가 이렇다고 작품 속 인물을 비정하게 다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있고, 끝까지 사려 깊은 태도를 취하려 노력하고 싶다.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늘 관심이 많고, 장르물도 정말 좋아한다. 잠시 동면기를 가지면서 많이 읽고 보려고 한다. 그럼 곧 새로운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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